[커버스토리 : 2026 뉴 리더]
[편집자주]“제자리에 머물러 있으려 해도 온 힘을 다해 뛰어야 한단다. 만약 다른 곳으로 가고 싶다면 최소한 그보다 두 배는 더 빨리 뛰어야 하고.”
소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 나오는 대사다. 아무리 달려도 같은 곳에 머무는 것을 깨달은 앨리스가 영문을 묻자 붉은 여왕이 한 답이다. 여기서 ‘붉은 여왕 효과(Red Queen Effect)’란 용어가 탄생했다. 이 대사는 오늘날 경영학에서 생존의 법칙으로 통용된다. 변하지 않으면 도태하고, 적당한 속도로 변하면 생존하고, 전력으로 변하면 진보한다는 의미다.
한국에서도 남들보다 두 배 더 빨리 달려 ‘판’을 바꿔버린 이들이 등장하고 있다. 30년간 공고했던 대기업 중심의 수직계열화가 흔들리며 그 균열 사이로 완전히 새로운 유전자를 가진 ‘뉴 리더’다.
의대보다 공대가 인기 있던 시절 한국 IT 산업은 새로운 장을 열었다. 1980년대 대학을 다니고 벤처 붐이 한창이던 1990년대 후반 창업에 나선 이들은 훗날 네이버, 카카오, 다음, 넥슨을 설립한다. 대한민국 포털, 메신저, 플랫폼, 게임 산업의 근간을 설계한 것이다. 이들은 지난 30년간 한국 경제를 움직이는 핵심 동력이었다.
하지만 이후 플랫폼 서비스를 뛰어넘는 창업자는 등장하지 못했다. 쿠팡과 배달의민족, 당근마켓 등 플랫폼 산업은 성장했지만 이들 역시 ‘소비재’, ‘내수중심’, ‘서비스 플랫폼’이라는 문법을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최근 몇 년간 이 정체된 판에 균열을 내며 등장한 뉴 리더들은 IT 산업의 2막을 열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플랫폼 시대를 열고 산업을 성장시킨 선배 세대가 사람들의 일상을 점유하는 ‘화면 안의 서비스’에 집중했다면 이들은 글로벌 기술 패권에 도전한다.
네이버와 손잡고 글로벌 핀테크 시장을 공략하는 두나무의 송치형 회장, 한국 반도체가 단 한 번도 주도권을 쥐어본 적 없는 팹리스(설계) 영역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리벨리온의 박성현 대표, 퓨리오사AI의 백준호 대표가 IT 뉴 리더의 대표주자다. ‘두뇌’ 시장 연 반도체 뉴 리더
기업가치 1조원을 넘긴 반도체 팹리스가 등장하면서 지난 50년간 제조 중심이었던 한국 반도체산업이 ‘두뇌’라 불리는 설계 영역으로까지 범위를 넓히고 있다. 리벨리온과 퓨리오사AI는 모두 뇌 신경망을 모방한 반도체인 NPU(신경망처리장치)를 만드는 팹리스다. 현재 AI 연산 대부분이 GPU를 통해 구동된다. 하지만 AI 성능이 높아질수록 이를 처리할 수 있는 반도체가 필수다. GPU도 AI 연산을 처리할 수 있지만 그래픽처리가 목적인 GPU는 비용이나 전력 소모 면에서 비효율적이다. AI 연산에 최적화된 NPU가 본격적으로 양산, 상용화 단계에 접어들면 반도체 업계의 판도가 바뀔 수 있다. NPU는 범용으로 쓰이는 GPU와 달리 특화 분야에서 최대 효율을 발휘할 수 있는 만큼 두 기업은 GPU의 틈새를 공략하겠다는 계획을 세우고 있다.
두 기업은 모두 글로벌 반도체 심장부에서 경험을 쌓은 창업가가 세웠다. 퓨리오사AI는 AMD와 삼성전자 등에서 반도체를 개발했던 백준호 대표가 2017년 세웠다.
퓨리오사AI는 2025년 초 메타로부터 1조2000억원에 인수를 제안받았지만 거절하면서 화제가 됐다. 회사가 처음 시장의 주목을 받은 건 2021년. 퓨리오사AI가 출시한 NPU ‘워보이’가 글로벌 AI 반도체 성능 테스트 대회 ‘엠엘퍼프’에서 엔비디아의 GPU ‘T4’보다 이미지 분류와 객체 검출의 처리 속도에서 높은 성능을 보였다.
올해는 LG가 자체 거대언어모델(LLM) ‘엑사원’에 2세대 AI 칩인 ‘레니게이드’를 공급하며 기술 실증에 나섰다. 엑사원3.5 환경에서 레니게이드 실증 결과 기존 GPU 대비 전력당 성능이 2.25배 향상된 것으로 나타났다.
LG와 퓨리오사AI는 레니게이드를 기반으로 하는 기업용 온프레미스 턴키 솔루션을 국내 고객사를 대상으로 공급하고 이를 발판으로 삼아 글로벌 시장에 진출한다는 계획이다.
리벨리온은 미국 매사추세츠공대(MIT) 박사 출신인 박성현 대표가 2020년 창업한 AI 반도체 스타트업이다. 2021년 초단타매매 등 금융 거래에 특화된 NPU ‘아이온’으로 사업을 시작했다.
KAIST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MIT에서 석사와 박사까지 마친 박 대표는 인텔, 스페이스X에서 반도체를 개발하다 모건스탠리에서 퀀트 트레이더 업무를 수행했다. 그가 아이온을 출시하게 된 배경도 산업을 직접 경험했기 때문이다. 2023년에는 첫 국내 상용 데이터서버용 반도체 아톰, 아톰 맥스를 양산하며 국산 AI 반도체 시장의 한 장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2024년엔 SK텔레콤 산하 팹리스 ‘사피온’과 합병하며 몸집을 키웠다. KT, 사우디 아람코, 반도체 기업 Arm이 리벨리온의 기술력을 믿고 투자했고 기업가치는 1조9000억원 수준까지 성장했다. 특히 아시아 기업 중 Arm의 투자를 받은 건 리벨리온이 처음이었다.
퓨리오사AI와 리벨리온이 공략하는 무대는 세계 시장이다. 박 대표는 최근 리벨리온 창립 5주년 행사를 열고 NPU로 GPU가 채우지 못한 시장을 공략하겠다고 밝혔다.
물론 이들의 미래가 탄탄대로인 것은 아니다. 이미 AI용 반도체 시장은 엔비디아가 장악하고 있고 구글과 Arm 등도 엔비디아에 대항할 수 있는 칩을 개발하며 반도체 독립에 나섰다.
아무리 성능이 뛰어나도 대규모 레퍼런스를 증명하지 못하면 시장 안착은 쉽지 않다. 여기에 매년 수조원을 쏟아붓는 빅테크와의 ‘쩐의 전쟁’에서 살아남기 위한 안정적인 자금 확보와 양산 파트너십 역시 해결해야 할 과제다. 하지만 이들의 도전은 그 자체로 의미가 크다. 한국 반도체산업이 제조를 넘어 설계 경쟁력과 기술 주권을 확장하는 출발점이기 때문이다.
정부는 이들을 지원하기 위해 팔을 걷었다. NPU 기반 AI 컴퓨팅 인프라 투자에 대한 세액공제를 신설하고 ‘국민성장펀드’를 통해 차세대 제품 양산을 위한 대규모 투·융자를 지원한다.
특히 기업들의 레퍼런스 확보를 위해 내년부터 치안, 국방, 행정 등 공공 분야에 국산 NPU를 우선 도입하는 ‘공공선도 7대 과제’를 가동한다. 네이버 손잡은 두나무, 새 혁신 탄생할까한국 IT의 ‘2막’을 여는 혁신은 반도체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국내 가상자산 거래소 ‘업비트’를 설립한 두나무의 송치형 회장은 올해 가장 주목받은 IT 뉴 리더다. 블록체인과 암호화폐 시장을 선점한 데 이어 검색, 쇼핑, 콘텐츠를 아우르는 네이버와 손잡으며 새로운 판을 열고 있기 때문이다.
2025년 하반기 글로벌 4위 가상자산 거래소 업비트를 보유한 두나무가 국내 간편결제 1위 사업자인 네이버파이낸셜의 완전 자회사가 됐다. 시장에서는 네이버파이낸셜의 기업가치를 5조원가량, 두나무의 기업가치를 15조원가량으로 분석한다. 기업가치 20조원에 달하는 ‘핀테크 공룡’이 탄생한 것이다.
‘은둔의 경영자’로 불릴 만큼 공식 활동이나 언론 공개를 최대한 자제해온 송 회장은 이례적으로 합병 기자회견에 등장했다. 두 기업의 합병은 사업 영역을 확대하고 글로벌 무대로 나아가기 위해서다.
송 회장과 이 의장은 공동 기자회견에서 ‘글로벌’이라는 단어를 50번 넘게 언급할 만큼 해외시장 진출 의지를 강하게 드러냈다. 이번 거래를 제안한 건 이 의장이었다. 시장에선 1967년생인 이 의장이 은퇴와 후계를 염두에 두고 송 회장을 택했다는 말도 나온다.
합병 이후 송 회장이 네이버파이낸셜의 경영을 총괄하면서 네이버그룹 내 입지를 다진 다음 송 회장이 네이버 지배구조의 핵심으로 올라설 수 있다는 시나리오다. 현재 이 의장의 네이버 지분율은 3.7%에 불과하기 때문에 두 사람이 네이버 공동경영 체제를 갖춘 다음 스테이블코인을 중심으로 글로벌 기업으로 도약할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송 회장과 이 의장은 모두 서울대 컴퓨터공학과를 나왔다. 송 회장은 98학번으로 IT 기업인 다날에서 병역특례로 복무한 뒤 졸업 후 컨설팅사 등에서 5년 가까이 근무했다. 전자책 사업, 소셜미디어 인기뉴스 추천서비스 등 2년간 6개 사업으로 창업을 시작하고 그 중 잘되는 것에 집중하기로 했다. 그러던 중 김형년 두나무 부회장과 손잡고 개발한 증권 애플리케이션이 2013년 카카오로부터 투자를 유치하면서 핀테크 시장에 진입했다.
2017년에는 암호화폐 거래소 업비트를 선보였다. 가상자산 시장이 급격히 성장하며 몸집을 키운 업비트는 최근 3년간 연매출 1조원 이상을 꾸준히 기록했다. 하지만 두나무의 수익 구조가 사실상 업비트의 거래수수료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데서 송 회장이 한계를 느낀 것으로 보인다. 더구나 국내처럼 규제가 촘촘한 환경에서는 신사업 확장이 쉽지 않았다. 이런 와중에 경쟁자인 해외 가상자산거래소는 금융 혁신을 통해 다양한 산업으로 영역을 확장하고 있었다.
코인베이스와 거래대금이 비슷한 두나무의 기업가치가 7~8배 차이 나는 이유가 확장성에 있었다. 송 회장은 이번 결단의 배경으로 ‘위기감’을 꼽았다. 그는 현재 블록체인 시장을 ‘초기 유튜브 시대’에 비유했다.
그러면서 지금이 아니면 글로벌 주도권을 영영 뺏길 수 있다는 위기의식을 느꼈다고 했다. 이 같은 인식은 그의 오래된 경영철학과도 맞닿아 있다. 송 회장은 2021년 서울대 강연에서 “변화의 시기에는 시장을 끊임없이 관찰하며 그 기회가 얼마나 클지 파악해야 한다”며 “사람들이 좋아할 만한 것에 집중하되 때로는 과감히 포기하는 선택도 필요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