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경보통학교 교사 박정희가 만주군관학교 입교를 위해 만주로 떠나기 직전인 1940년 2월 한 행사에서 지역 유지들과 함께 찍은 사진. 붉은 원 안이 박정희 교사다. 정운현 제공
박정희와 김대중<9>
박정희는 대구사범학교 졸업 후 문경공립보통학교에 부임해 아이들을 열정적으로 가르치면서도 군인의 길을 향한 꿈을 버리지 않았다. 하지만 식민지의 가난한 청년이 그 꿈을 이루기란 쉽지 않았다.
일제가 1931년 만주사변을 일으켜 만주 일대를 점령하고 다음해 관동군을 앞세워 괴뢰국인 만주국을 세우면서 도약의 꿈을 꾸던 식민지 청년들에게 기회가 찾아왔다. 일제가 만주국을 대륙 침략의 발판으로 삼기 위해 오족협화(五族協和·일본족, 조선족, 만주족, 한족, 몽골족의 협력과 화합) 기치를 내걸고 조선인과 한족, 만주족 출신들의 등용을 장려하면서다. 식민지 조선의 청년들도 능력만 있으면 만주국에서 행정기관의 고급 관리나 남만주철도주식회사 같은 큰 회사 직원으로 일할 수 있었다. 국가를 이끌어갈 인재를 길러내기 위해 건국대학, 군관학교 등 각종 인재 양성기관도 설립되었기에 기회가 많아졌다.
군인의 꿈을 버리지 않은 교사 박정희...'입신출세의 신천지' 만주로 가다
이 시기 만주는 입신출세의 신천지였다. 일본 본토 출신뿐만 아니라 조선과 중국, 몽골에서 야망을 품은 젊은이들이 몰려들었다. ‘동양의 엘도라도’ ‘동양의 서부(西部)’라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조선반도 남쪽 끝에 위치한 목포상업학교에 다니던 김대중이 만주 건국대학 진학을 염두에 두고 3학년 때 진학반으로 옮긴 것도 1940년 전후의 이 같은 만주행 열기의 영향이었다.
1930년대 만주 다롄 중앙 대광장을 그린 엽서. 일제는 허허벌판 만주에서 근대적 도시공간 창출을 실험했다. 식민지 청년들에게 만주는 입신출세의 신천지였다. 문학과지성사 제공
일제 강점기 잡지 ‘삼천리’ 1937년 5월호는 ‘만주국에서 활동하는 인물’이라는 기사에서 만주국 행정기관의 관리나 관동군, 영사관, 경찰, 중앙은행, 법조계, 학교, 언론기관에서 활약하는 조선인들을 소개했다(강상중 현무암 저, 이목 옮김, ‘기시 노부스케와 박정희’). 셋째형 박상희 집에 드나들며 다양한 서적과 잡지를 접했던 박정희도 이 기사를 읽었을 가능성이 있다.
이 기사가 아니더라도 박정희는 이미 만주국 군관학교에 조선인 출신도 들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박정희는 1935년 대구사범학교 4학년 수행 여행 때 만주를 처음 가봤다. 수학여행단은 신경(新京·지금의 장춘)의 관동군 사령부도 견학했는데, 대포, 탱크 등 당시로서는 어마어마한 신무기들을 구경했다. 만주국은 군 지휘관 양성을 위해 2년제 봉천(지금의 심양)군관학교(정식 명칭은 만주국 중앙육군 훈련처)를 설립해 운영 중이었는데, 박정희는 수학여행 중에 이에 대해서 알게 되었을 것이다.
박정희가 문경공립보통학교에서 안정된 교사 생활을 하다 만주행을 결행한 배경을 놓고 교장과의 불화, 지역 일본인 기관장들과의 다툼 설이 있다. 하지만 이 같은 사건들보다는 박정희가 오랫동안 간직해온 군인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서였다는 견해가 더 타당해 보인다.
나이 많아 만주군관학교 갈 수 없었던 박정희...그가 짜낸 아이디어
문경공립보통학교에 부임한 지 2년이 되던 1938년 하반기 박정희는 마침내 만주행을 결심했다. 그런데 나이의 문제가 있었다. 이미 만주군관학교 모집 조건에 해당하는 연령을 넘겼던 것이다. 그래서 학교 숙직실에서 함께 기거하던 유증선 교사에게 고민을 털어놓고 상의하다 혈서(血書)를 써서 보내는 아이디어를 얻었다.
박정희는 면도칼로 새끼손가락을 베어 ‘진충보국 멸사봉공’(盡忠報國 滅私奉公·충성을 다하여 나라의 은혜에 보답하며 개인의 이익을 버리고 공공 대의를 받든다)이라고 썼다. 이 혈서를 동봉한 편지를 만주국 담당부서(치안부 군정사 징모과)로 보냈다(조갑제, 박정희 1).
이 혈서문구는 훗날 박정희의 친일 행적을 언급할 때 자주 거론되었다. 하지만 당시 군인의 꿈을 이루려는 식민지 청년 교사 박정희의 절절한 심정을 담은 것이었다. 이 혈서 편지 사연은 ‘만주신문’(1939년 3월 31일자)에 ‘혈서 군관지원 –반도의 젊은 훈도로부터’라는 제목으로 보도돼 화제를 모았다. 그런데 이 기사에는 당국이 이 청원 편지에 감격했지만 “정중히 사절했다”는 내용도 포함되어 있었다. 혈서 청원 자체로 입학시험 자격을 얻지 못했다는 것이다(강상중 현무암 위의 책).
대구사범 시절 교련주임의 도움으로 군관학교 입학
그러나 사실상 만주국을 움직이는 관동군에 가 있던 대구사범 시절의 교련주임 아리카와 게이이치(有川圭一) 대좌와 간도특설대 소속 강재호 대위 등의 도움으로 박정희는 군관학교 입학시험 응시가 허용되었다. 그는 1939년 10월 만주에서 신경군관학교 시험을 치렀고, 우수한 성적으로 합격했다. 박정희는 문경으로 돌아와 교직을 마무리하고 다음해 4월 신경군관학교에 입교해 만주 생활을 시작했다.
건설부 장관을 지낸 이한림 전 육군 1군사령관. 그는 함경남도 안변 출신으로 만주 신경군관학교에서 박정희와 동기였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봉천군관학교 대신 새로 설립된 신경군관학교는 그해가 2기 모집이었는데 만계(滿系·조선인도 포함) 240명, 일계(日系) 240명을 뽑았다. 박정희는 만계 240명 중 15등을 차지했다.
동기생 중 조선인은 이한림, 김묵 등 11명이었다. 1기 선배 중 조선인은 이주일 박임항 방원철 등 14명이 있었다. 만주군관학교 1~7기까지 조선인은 모두 48명이었는데, 선후배로 얽힌 이 인맥은 박정희가 훗날 대한민국 군에서 뿌리를 내리고 생존하여 5‧16를 거쳐 대한민국 산업화를 이끌어가는 과정에서 단단한 기반이 되었다.
박정희 대통령이 청와대에서 정일권(왼쪽) 국회의장과 대화하고 있다. 정일권은 만주군 장교 출신 정치인으로 박정희와 긴밀한 관계를 맺는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만주 인맥 범위를 신경군관학교 전신인 2년제 봉천군관학교 인맥까지 확대하면 규모가 훨씬 커진다. 훗날 박정희와 긴밀한 관계를 맺는 정일권(봉천 5기), 백선엽(봉천 9기) 등이 대표적이다(조갑제, 박정희 1. 김용삼, 박정희 혁명).
이 가운데는 남로당 가입과 여순 반란사건에 연루돼 대대적인 숙군 수사 때 상당수가 숙청되었는데, 박정희 자신도 남로당 가입이 문제가 되어 사형당할 위기에 처했다가 간신히 살아남았다. 그의 구명에는 만주 및 일본 육사 인맥의 영향력이 크게 작용했다.
만주군 인맥, 박정희의 운명을 바꾸다
만주행은 박정희의 운명을 바꾸어 놓았다. 이 때 형성한 만주군 인맥은 5‧16 군사정변을 결행하는 기반이 되었고 집권 후에는 중요한 인재 풀이 되었다. 박정희의 만주 인맥은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만주국은 일본 관동군 엘리트들과 야심에 찬 젊은 관료들이 주도한 통제경제로 운영되었다. 자원과 인프라에 집중 투자하여 단기간에 고도성장을 이뤄 만주국을 대륙침략의 병참기지로 만들었다. 이 과정을 이끈 핵심 인물이 기시 노부스케(훗날 일본 총리 역임)였다. 당시 그는 만주국 총무청 차장으로 국가운영의 실권을 쥐고 있었다.
박정희 대통령이 1977년 9월 청와대에서 기시 노부스케(왼쪽) 전 일본 총리를 맞이하고 있다. 기시 노부스케는 만주국의 설계자로 평가받는 인물로, 박정희가 한일 경제협력을 추진하는데 중요한 인맥이 되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박정희가 신경군관학교에 입교한 1940년 4월 즈음 기시 노부스케는 본국의 상공성 차관으로 복귀해 전시 총력전 체제의 핵심인 ‘경제신체제 확립’을 지휘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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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계성 전 한국일보 논설위원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