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한국일보> 논설위원들이 쓰는 칼럼 '지평선'은 미처 생각지 못했던 문제의식을 던지며 뉴스의 의미를 새롭게 해석하는 코너입니다.
소셜미디어에 올라온 가난 챌린지. 스레드 캡처
'현지 누나'에 인사청탁 다리를 놓다 직(청와대 디지털소통비서관)을 내려놓은 김남국 전 의원은 2023년엔 60억 원대 코인 투자로 공분을 샀다. 국민 화를 더 북돋운 건 그의 '가난팔이'다. 매일 라면만 끓여 먹고, 구멍 난 운동화를 신고, 호텔 아닌 모텔에서만 잔다던 그의 위선적 삶에 뒤통수를 맞아서다.
□대중의 인기를 먹고 사는 연예계 또한 '가난팔이'가 흔하다. 2025년 SBS 연예대상을 받은 이상민은 수십억 원대 빚과 가난을 반복적으로 웃음과 연민의 도구로 삼았다. 그런 그가 월세 500만 원 넘는 초호화 아파트에 살고 수백만 원짜리 고가 신발을 신는 모습을 공개했을 때 대중들은 "가난을 도둑맞았다"고 허탈해했다. 신용불량자임을 거듭 내세우던 모델 출신 방송인 지연수도 정작 소셜미디어(SNS)에선 명품 브랜드 제품을 과시했다.
□요즘 SNS에서 유행하는 '가난밈'을 두고 시끄럽다. '지긋지긋한 가난'을 키워드로 한 가난 호소 게시물은 실제로는 경제적 여유를 자랑하는 반전 도구다. 매일 먹는다는 라면과 김밥 사진 옆에는 외제차 키가 놓여 있고, 고가의 외제 시계를 착용한 채 외제차 운전대를 잡은 사진에는 '기름 넣을 돈도 없어서 오늘도 출근한다'는 글을 다는 식이다. 해외 5성급 호텔 욕실 사진을 올리며 '지독한 가난 때문에 마일리지와 포인트로만 여행을 다닐 수 있다'고 적기도 한다. 게시물에 달리는 '그 가난 저한테 좀 물려주세요' 같은 댓글 또한 가난의 희화화다.
도둑맞은 가난
□박완서의 단편 '도둑맞은 가난'은 달동네에서 어렵게 하루하루 살아가는 '나'와 가난 체험을 하라는 아버지의 지시로 동거를 하는 부잣집 청년 '상훈'의 이야기다. 50년도 더 된 1975년 발표된 소설에는 예언과도 같은 이런 섬뜩한 대목이 있다. '이제부터 부자들 사회에선 가난 장난이 유행할 거란다. 그들은 빛나는 학력, 경력만 갖고는 성이 안 차 가난까지 훔쳐다가 그들의 다채로운 삶을 한층 다채롭게 에피소드로 삼고 싶어 한다는 건 미처 몰랐다.' 가난이 더 아프고 시린 연말연시여서 이 도둑질이 더 폭력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