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가에서 소비자까지 유통경로 따라가며 과제와 해법 짚어봐
전문가 “소농가 조직화 통해 가격 등 다양한 문제 풀 수 있어”
전문가 “소농가 조직화 통해 가격 등 다양한 문제 풀 수 있어”
지난 12월 18일 충남 논산 연무농협 공동선별출하회 회원들이 새벽에 딴 딸기가 플라스틱 상자(콘티)에 담겨 있다. 이 딸기는 당일 대전의 유명 빵집 ‘성심당’으로 들어간다. 이재덕 기자
[주간경향] 지난 12월 18일 오전 11시 충남 논산시 연무읍 연무농협 산지유통센터(APC). 연무읍 일대의 농산물을 모아 선별·포장한 뒤 대형마트 물류센터 등으로 내보내는 곳이다. 봉동리에 사는 농부 황금철씨(67)가 자신의 비닐하우스에서 새벽부터 이른 아침까지 딴 딸기를 트럭에 싣고 왔다. 트럭 화물칸의 천막을 젖히자 달큰한 향내가 확 퍼졌다. 화물칸에는 딸기가 가득 담긴 녹색 플라스틱 상자, 이른바 ‘콘티’가 빼곡히 쌓여 있었다.
연무농협 직원들이 콘티를 내려 딸기 상태를 살폈다. 크기대로 잘 분류됐는지, 모양이 예쁜지, 상처나 짓무른 곳은 없는지 거르는 1차 단계다. 68개 콘티에 담긴 딸기는 대체로 품질이 고르고 깔끔했다. 직원들은 알이 잘은 딸기가 담긴 콘티 6개는 따로 빼 팔레트 위에 올리고, 나머지 62개는 선별·포장 작업이 이뤄지는 공동선별장으로 옮겼다. 양보승 센터장이 팔레트 위 콘티들을 가리키며 “성심당으로 들어가는 딸기”라고 설명했다. 이곳에서 40㎞ 정도 떨어진 대전의 빵집 성심당에서 케이크를 만들 때 사용하는 딸기다. 양 센터장은 “성심당에 매일 두 팔레트(콘티 200개·200㎏)를 보내는데, 그쪽에서는 물량이 부족하다며 가능한 한 많이 달라고 요청한다”고 전했다. 성심당은 제철 딸기를 케이크 상단과 내부에 가득 채운 겨울 한정 케이크 ‘딸기시루’로 유명하다. 이번 크리스마스를 앞두고도 대전 본점에는 이 케이크를 사려는 사람들이 5시간 넘게 줄을 서 기다리기도 했다.
매년 크리스마스 대목이면 딸기 케이크가 어김없이 등장하지만, 1년 전 상황은 달랐다. 추석 무렵 이상고온으로 딸기묘가 고사하고 정식이 늦어지면서 성수기 출하 물량이 급감했다. 일부 업체는 딸기 대신 샤인머스캣을 크리스마스 케이크 위에 올렸다. 한 베이커리 업계 관계자는 “딸기는 기온 영향을 많이 받아 수급이 안정적이지 못하다”며 “올해는 공급 계약에 특히 공을 들였다. 진열장이 빨간색(딸기)일 때와 초록색(샤인머스캣)일 때의 소비자 반응은 확연히 다르다”고 말했다.
산지의 딸기는 어떤 경로를 거쳐 소비지로 향할까. 그 과정에서 수급·가격·품질을 흔드는 ‘병목’은 어디에 생길까. 주간경향은 한겨레21, 시사IN과 공동기획으로 겨울 과일·과채의 유통경로를 따라가며 과제와 해법을 짚어봤다. 주간경향은 딸기를, 한겨레21과 시사IN은 각각 감귤과 사과의 경로를 추적했다.
성탄절을 이틀 앞둔 지난 12월 23일 서울의 한 빵집에 크리스마스 케이크가 진열돼 있다. 연합뉴스
쿠팡·이마트와 협상하는 법
공동선별장에서는 ‘선별사’라 불리는 50여명의 여성 아르바이트 노동자가 딸기를 작은 투명 플라스틱 용기에 담고 있었다. 선별사 중 한국인은 60대 이상의 노인 10여명. 대부분이 몽골, 베트남 등에서 온 이주노동자다. 벽면에는 이마트, 쿠팡, 킴스클럽, 코스트코 등 출하처별 딸기 선별·포장 방법을 안내하는 글이 붙어 있었다. 선별사들은 투명 용기 안에 딸기를 세로로 3알씩, 가로로 4알씩, 모두 12알을 넣고, 얇은 스펀지로 덮은 뒤 다시 그 위에 딸기 12알을 담았다. 500g 소포장 용기에 총 24알이 들어가는, 알 굵은 딸기를 이곳에서는 ‘특’이라고 하고, 상인들은 그냥 ‘34(3×4로 포장하는 딸기라는 뜻)’라고 부른다. 이 딸기가 가장 비싸게 팔린다.
선별사들이 소포장한 딸기가 컨베이어벨트를 따라 출하장으로 이동했다. 중간에 무게 측정기가 설치돼 있는데, 500g 소포장 용기 무게 정량이 540g에 맞춰져 있다. 정량에서 0.01g이라도 모자라면 측정기가 경고음을 울린다. 무게 측정기를 통과한 소포장 딸기를 우즈베키스탄과 카자흐스탄에서 온 두 명의 남성이 커다란 상자에 담아 팔레트 위에 올렸다. 이 딸기들은 전국에 있는 대형마트·쿠팡 물류센터로 이동하는데, 대부분의 딸기가 수도권 소재 물류센터로 간다고 양 센터장은 설명했다.
충남 논산 연무농협 산지유통센터(APC) 내 딸기 공동선별장에서 여성 노동자들이 딸기 포장 작업을 하고 있다. 이재덕 기자
공동선별장에서 500g 단위로 소포장 된 딸기가 컨베이어벨트를 따라 출하장으로 이동하고 있다. 이재덕 기자
논산에서는 연무농협 APC가 지역의 딸기를 주무르는 ‘큰손’이다 보니 대형마트, 쿠팡 등에 물건을 납품하는 중간유통업자들이 연무농협을 찾아와 딸기 물량과 가격 조건 등에 관해 협상을 벌인다. 양 센터장은 “가진 물량이 많다 보니 어느 정도 협상력을 갖는다. 업체가 가격을 낮춰 부르면 우리는 높이고, 우리가 직접 포장 단위를 개발해 업체에 제안하기도 한다”며 “개별 농가에서는 불가능한 일이지만, 같이 모이면 힘이 생긴다”고 했다.
농가별 상황, 수확량 등의 데이터도 쌓였다. 며칠 뒤, 몇달 뒤의 생산량도 가늠할 수 있을 정도다. 이날은 딸기 생산량이 출하해야 하는 양에 미치지 못했는데, 이를 예상하고 전날 연무농협 직원들이 서울 가락시장에서 부여·산청·거창 딸기를 수십 상자 사왔다. “물량이 부족하면 사입하는 방식으로라도 물량을 맞춰야 거래처에 신뢰를 주지 않겠어요?”
연무읍의 딸기 농가는 약 300곳에 달하지만, 모두가 연무농협 APC를 이용하는 건 아니다. 조합원 중 ‘공동선별회’에 가입한 80개 농가만 이곳에 딸기를 맡긴다. 양 센터장은 “우리도 처리할 수 있는 물량이 한정돼 있어 모든 조합원을 받기란 불가능하다”며 “다만 새로운 거래처를 뚫고, 설비를 늘리면서 공동선별회 규모를 키우고 있다”고 말했다. 지난해 10농가를 새로 받았고, 올해도 10농가를 추가로 받았다.
연무농협 APC는 이들이 맡긴 딸기를 판매하고, 농가에 정산해주는데, 판매금액 중 선별사 인건비, 수수료 등을 제한다. 황금철씨는 “연무농협 APC가 내 딸기를 제값 받고 판매해준다. 얼마를 받고 어디에 판매하는지 투명하게 공개하기 때문에 신뢰가 생긴다. 공동선별장에서 선별·포장하는 시간에 나는 다른 일을 처리할 수 있어 만족도가 높다”고 했다.
‘도매시장’으로 쏠린 눈
반면, 지리산 기슭의 경남 산청 단성면에서 딸기 농사를 짓는 양정석씨(58)는 딸기를 직접 선별·포장해 서울의 도매시장으로 보낸다. 지난 12월 14일 양씨와 아내 이말숙씨(51)는 딸기 비닐하우스 앞 컨테이너 상자에서 딸기를 고르고 있었다. 이씨가 “4시간 따고, 8시간 포장한다”며 혀를 찼다. 이들 부부가 조합원으로 있는 산청군농협도 APC 내에서 딸기 공동선별장을 운영하지만, 공동선별회 회원 농가는 800여 딸기 농가 중 67곳뿐이다. 산청군농협은 2028년까지 공동선별회 회원을 100곳으로 늘리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이처럼 지역마다 농협 APC를 이용하지 못하는 농가가 많다 보니, 이들의 농산물을 구입해 자체 인력으로 선별·포장하는 민간 APC가 여럿 있다. 양씨도 몇년 전까지 지역의 영농조합법인이 운영하는 민간 APC에 자신의 딸기를 넘겼다. 대형마트와 거래하는 업체였다. 그는 “(민간 APC가) 수수료를 과하게 떼어가기도 하고, 정산을 제대로 해주지 않는 경우도 있었다. 대형마트 할인행사 때 그 부담을 농가에 지우는 APC도 있다”고 했다. 인근에서 딸기 농사를 짓는 배영미씨(58) 역시 인근의 민간 APC에 딸기를 넘겼는데, 지난해 판매 대금 수백만원을 받지 못했다고 했다. 배영미씨 부부는 올해부터는 직접 선별하고 포장한다.
경남 산청 단성면에서 남편 양정석씨와 함께 딸기 농사를 짓는 이말숙씨가 지난 12월 14일 수확한 딸기를 직접 포장하고 있다. 이재덕 기자
경남 산청의 딸기 농부 양정석씨(왼쪽)가 지난 12월 14일 수확한 딸기를 1t 트럭에 싣고 있다. 이 딸기들은 하동군 옥정면의 한 운수회사에서 팔레트 포장 작업을 거쳐 서울 강서시장으로 이동한다. 이재덕 기자
양씨와 배씨 등 단성면의 8개 농가는 그날 수확한 딸기를 경남 하동군의 한 운수업체를 통해 서울 강서농수산물도매시장(강서시장) 경매장으로 보낸다. 서울 가락농수산물도매시장(가락시장)과 강서시장은 농산물을 판매할 곳이 마땅치 않은 농가들이 선택하는 ‘최후의 보루’다. 양씨가 말했다. “갖고 가기만 하면 다 팔 수는 있으니까….” 특히 가락시장 경매장에서는 많은 물량이 거래되다 보니 낙찰가가 그날 전국 농산물의 판매가격을 결정하는 ‘기준가격’이 된다. 다만 폭설 등으로 서울 가는 도로 상황이 좋지 않으면 물량이 적어져 그날 가격이 상승하고, 물량이 쏟아지는 날에는 가격이 폭락한다.
지난 12월 17일 새벽 서울 강서시장 내 강서청과 경매장에서 산청 딸기 경매가 이뤄지고 있다. 이재덕 기자
지난 12월 17일 새벽 1시 강서시장. 산청의 농민들이 전날 수확한 딸기가 거창 딸기, 서귀포 감귤, 상주 곶감 등과 함께 강서청과 경매장에 놓였다. 경매에 참여하는 중도매인들이 돌아다니며 딸기를 살폈다. 새벽 2시에 시작한 감귤 경매가 끝나자 딸기 경매가 이어졌다. 장우순 딸기 경매사(43)가 외쳤다. “정석, 34, 점바라점바라” 양정석씨가 출하한 알 굵은 ‘34’ 딸기 상자(2㎏)를 경매한다는 뜻이다. ‘점바라점바라’는 호가를 올리기 위해 경매사가 외치는 일종의 ‘주문’이다. “영미, 34, 점바라점바라” 배영미 농부의 딸기 호가가 잘 오르지 않자 경매사가 다시 한번 외쳤다. “여기 것 당도 좋잖아요. 지금보다는 (호가가) 더 나와야지요.” 낙찰가가 다른 도매시장에 비해 낮게 책정되면, 농민들이 이곳이 아닌, 다른 도매시장으로 농산물을 출하할 가능성이 있다. 경매사로서도 달갑지 않은 일이다.
이날 양씨의 ‘34’ 딸기는 2㎏ 상자 1개당 3만2000원에 낙찰됐다. 양씨의 딸기를 산 중도매인은 “경매에 참여하는 중도매인들은 어떤 농부의 딸기가 좋은지 다 알고 있다”며 “그날그날 산지에서 올라온 딸기의 상태도 중요하지만, 각자 선호하는 농가의 딸기가 있다”고 말했다. “중도매인 대부분이 낙찰가에 1000원을 더 붙여 파는 ‘1000원 떼기’를 해요. 500원 떼기를 할 때도 있고, 밑지고 팔 때도 있고요. 오늘은 평소보다 낮은 가격에 낙찰받았거든요. 이럴 때는 ‘2000원 떼기’도 할 수 있죠.”
이 중도매인은 양씨의 딸기를 인천의 검단신도시에서 장사하는 소매상인에게 ‘1000원 떼기’를 해 팔았다. 소매상인은 2㎏ 상자에 담긴 딸기를 500g씩 나눈 뒤 500g 딸기를 1만900원에 팔았다. 양씨에게 이를 전하니 “그래요?”라며 무심하게 답한다. 검단신도시의 부동산 가격, 인건비 등을 고려하면 수긍이 가는 가격이다.
농가가 2㎏ 1상자 가격을 3만3000원 정도로 책정하고, 여기에 배송비 5000원을 붙여 온라인 직거래로 소비자에게 팔면 농가와 소비자 모두 이득이 아닐까? 양씨의 아내 이씨가 말했다. “우리가 그 생각을 왜 안 해봤겠어요. 그런데 택배 보내려면 면 소재지까지 나가야 해요. 송장도 일일이 찍어서 소비자들에게 보내줘야 하고요. 택배 부치러 갔다 오면 2시간이 날아가요. 포장도 그냥 하면 안 돼요. 택배는 막 던지고 그러니까 꼭꼭 싸매는데, 아무리 싸매도 딸기는 다 망가져요. 그럼 또 반품·환불 처리해야지요. 결국은 포기했죠. 그냥 하던 대로 서울 도매시장으로 보내자. 직거래는 그냥 지인들에게만 조금 보내주자.”
백혜숙 지속가능국민밥상포럼 대표는 “‘가락시장이 문제다, 직거래를 늘려야 한다’ 차원의 소모적인 논의에서 벗어나야 한다”며 “품목별로 맞춤형 정책을 어떻게 펼 것인가, 각각의 품목에 최적화한 유통구조는 무엇인가 등의 논의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상춧값 폭락의 비밀
조직화가 잘된 지역 농협에서는 조합원들이 모여 당면한 문제를 풀어간다. 예컨대 딸기 농가들은 매번 인력난에 시달리는데, 미등록 이주노동자의 일당은 12만~14만원에 이른다. 수확 철에는 이들 인력을 공급하는 인력사무소들이 일당을 높여 부르기도 한다. E-9(비전문취업) 비자를 받고 온 이주노동자를 고용하는 농가도 있다. 딸기가 나는 11월부터 이듬해 5월까지는 이들에게 월급을 주는 게 어렵지 않지만, 딸기가 나지 않는 6월부터 10월까지는 사정이 다르다. 황금철씨가 말했다. “월급은 줘야 하니까 다들 상추를 심었죠. 다들 상추만 하니까 여름 상추가 똥값이 됐어요.”
충남 논산 연무읍의 한 딸기 농장에서 딸기를 수확하는 몽골인 계절 근로자. 경향신문 자료사진
이에 연무농협에서는 조합장, 직원들이 지자체 관계자들과 함께 직접 몽골로 가서 딸기 철에만 한국에 들어와 일하는 계절 근로자를 선발해 데려온다. 몽골 노동자들은 연무농협의 계약직 직원으로 월급을 받고 농협이 마련한 숙소에서 지낸다. 몽골 노동자들을 쓰는 딸기 농가들은 일당 8만~9만원을 연무농협에 지불한다. 황씨는 “몽골 사람들 데려오면서 여기 인력사무소 일당이 전부 8만~9만원으로 내려갔다. 인력사무소가 더 이상 장난질을 치지 않는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소규모 농가들이 조직화하는 방식으로 다양한 문제를 풀 수 있다고 지적했다. 이주량 과학기술정책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딸기 농가들은 20년간 수익성이 좋았기 때문에 당면한 문제에 개별적으로 대응해왔지, 조직화하는 데에는 큰 신경을 쓰지 않았다”며 이렇게 말했다.
“딱 샤인머스캣이 그랬어요. 처음에는 맛도 좋았고 가격도 비쌌죠. 농가들이 너도나도 들어왔지만, 조직화는 되지 않았고, 결국 가격은 떨어지고, 농가들은 재정 압박을 받고, 품질 안 되는 거 출하하면서 전체 시장의 이미지가 나빠졌죠. 딸기도 안전해보이지 않아요. 지역 농협 차원을 넘어 전국 단위로 굵직굵직하게 묶여서 생산량·가격·품질 등을 관리할 수 있는 수준이 돼야 합니다. 뉴질랜드의 키위 협동조합 ‘제스프리’가 그런 방식으로 성공했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