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뇌종양 판정, 3년 투병 끝 세상 떠나
연극·뮤지컬서 배우·제작·연출 전방위 활약
연극·뮤지컬서 배우·제작·연출 전방위 활약
2012년 4월 영화 '봄, 눈'의 개봉을 앞두고 한국일보와 인터뷰 중이던 배우 윤석화. 한국일보 자료사진
한국 연극계 '1세대 스타' 윤석화가 19일 뇌종양 투병 끝에 별세했다. 향년 69세.
고인은 2022년 7월 연극 '햄릿' 무대에 선 뒤 같은 해 10월 영국 출장 중 쓰러져 뇌종양 판정을 받았고, 이후 수술과 치료를 이어 왔다. 2023년 손숙의 연기 인생 60주년 기념 연극 '토카타'에 약 5분간 우정 출연한 게 그의 마지막 무대가 됐다.
1956년 서울에서 태어난 윤석화는 1975년 연극 '꿀맛'으로 데뷔했다. 광고 삽입곡을 노래하는 일을 하던 중 광고회사 인근 민중극단 사무실을 드나들다 연극과 인연을 맺었다. 등장과 동시에 연극계 스타로 떠오른 그는 "저도 알고 보면 부드러운 여자예요"라는 커피 광고 카피를 유행시킬 만큼, 연극 배우로서는 이례적인 대중적 인지도를 얻었다.
연극 '신의 아그네스'의 윤석화. 한국일보 자료사진
윤석화의 이름을 연극사에 각인시킨 작품은 '신의 아그네스'였다. '아이를 낳아 탯줄로 목을 감아 죽인 젊은 수녀 아그네스'라는 충격적 소재로 1979년 미국에서 초연된 작품이다. 미국 뉴욕대에서 유학 중이던 윤석화는 브로드웨이에서 이 작품을 보고 국내 상연을 결심, 1983년 대본을 직접 번역해 주연으로 무대에 올랐다. 초연 당시 10개월 최장기 공연 기록을 세우며 소극장 연극도 장기 흥행이 가능하다는 인식을 확산시켰고, 여성 인물을 중심에 둔 작품이 관객을 끌어모을 수 있음을 증명했다.
이후에도 '윤석화 장르'라는 말이 나올 만큼 공연 기획의 새로운 흐름을 만들어냈다. '딸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90분간 1인 다역을 소화하며 여성 1인극의 신화를 썼고, 40대에 출연한 '덕혜옹주'에서는 역사 속 인물의 13세부터 60세까지를 연기했다. 2016년에는 예순의 나이로 '햄릿'의 오필리아 역을 맡아 화제를 모았다.
뮤지컬에서도 확실한 존재감을 드러냈다. 1995년 창작뮤지컬 '명성황후' 초연에서 타이틀 롤을 맡아 작품의 원형을 만들어냈고, '아가씨와 건달들', '브로드웨이 42번가' 같은 쇼뮤지컬에도 참여했다. 무대를 중심으로 작품을 선택했던 터라 방송·영화 출연은 영화 '봄, 눈'(2012), 드라마 '우리가 만난 기적'(2018) 등 소수에 머물렀다.
윤석화가 제작·연출한 뮤지컬 '토요일밤의 열기' 2003년 공연. 한국일보 자료사진
윤석화는 배우에 머물지 않고 무대 안팎에서 공연 생태계를 고민한 예술인이었다. 1995년 종합엔터테인먼트사 돌꽃컴퍼니를 설립해 만화영화 '돌아온 영웅 홍길동'을 제작했고, 1999년에는 경영난에 빠졌던 공연예술 전문 월간지 '객석'을 인수해 발행인을 맡았다. 2002년에는 서울 대학로에 소극장 정미소를 개관해 실험적 작품을 꾸준히 선보였다. '객석' 운영 적자를 메우기 위해 뮤지컬 ‘토요일 밤의 열기’ 제작·연출에도 나섰다. 그가 제작에 참여한 영국 웨스트엔드 뮤지컬 '톱 해트'가 '영국의 토니상'으로 불리는 로런스 올리비에상을 받기도 했다.
아들과 딸을 입양한 그는 입양 문화 개선을 위한 자선 공연을 이어가며 예술인의 사회적 책임을 실천했다. 부침도 있었다. 문화예술계 전반에 학력 위조 논란이 번졌던 2007년 이화여대 중퇴로 알려졌던 자신의 학력이 거짓이었음을 밝혔다. 백상예술대상 여자연기상을 네 차례 수상했고 동아연극상, 이해랑 연극상, 대한민국문화예술상 등을 받았다.
빈소는 서울 신촌세브란스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됐다. 유족으로는 남편 김석기 전 중앙종합금융 대표와 아들 김수화, 딸 김수민씨가 있다. 발인은 21일 오전 9시다.
신촌세브란스병원에 마련된 윤석화 빈소.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