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개 시·도 교육청 파악 인원 112명의 8배 넘어
“피해 사실 알려지면 ‘네가 VIP냐’ 같은 말 들어”
질병결석 인정이 전부···다수가 주변 괴롭힘 겪어
“피해 사실 알려지면 ‘네가 VIP냐’ 같은 말 들어”
질병결석 인정이 전부···다수가 주변 괴롭힘 겪어
지난달 8일 서울 마포구 노을공원에서 환경보건시민센터 등 주최로 열린 ‘환경 피해자 추모 나무 심기’ 행사에서 가습기 살균제로 6개월 된 아이를 떠나 보낸 아버지인 김홍석씨가 식재한 나무 주변을 정리하고 있다. 권도현 기자
환경부 산하 한국환경산업기술원(이하 기술원)이 올해 초·중·고교 재학 연령대인 2007~2018년생 가습기살균제 피해자를 907명으로 집계한 사실이 확인됐다. 17개 시도 교육청이 파악한 초·중·고교 재학 중인 피해학생 규모인 112명의 8배에 달하는 규모다. 대다수의 피해학생들이 피해사실을 숨기고 학교에 다니고 있다는 뜻으로, 학부모들은 “유난 떤다는 말을 듣고 난 뒤부터 학교에 알리지 않기로 했다”고 했다. 학교가 대형 참사 피해자 지원과 보호에 힘써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26일 취재를 종합하면 기술원은 올해 2007~2018년생 가습기살균제 피해자를 907명으로 집계했다. 2023년 1192명, 2024년 1068명 등 시간이 흐르면서 초중고 연령대의 피해자 규모는 줄고 있다. 다만 이들이 실제 학교에 다니고 있는지까지는 파악되지 않은 연령 기준의 집계치다.
반면 시도 교육청이 파악한 피해학생 규모는 8분의 1 수준에 불과하다. 기술원은 “(저희가) 피해학생의 개인정보 동의를 하나하나 받아 교육청에 공유하는 것보다, 학교에서 직접 파악하는 게 더 빠르다고 보고 있다”고 했다. 국회 교육위원회를 통해 확보한 ‘17개 시도교육청 가습기살균제 피해학생 현황’을 보면, 경기도교육청을 제외한 16개 시도교육청은 초·중·고교에 피해학생 112명이 재학 중이라고 밝혔다. 경기도교육청 관계자는 “관할 구역이 넓고 개인정보 공개를 꺼려하는 분위기가 있어 집계를 하지 않고 있다”고 했다. 서울시교육청 관계자는 “원격수업을 하는 피해학생 규모도 파악하기 어려운 게 사실”이라고 했다.
피해학생의 부모들은 “학생들이 피해사실을 학교에 알리지 않으려는 이유를 살펴봐줬으면 한다”고 했다. 단순히 질병을 숨기고 싶어서, 피해정도가 심하지 않아 입을 닫는 것은 아니라고 했다. 실제 가습기살균제로 입은 피해를 회복해가며 학교에 별도로 알리지 않은 학생도 일부 있지만, 피해정도가 심해 원격수업을 듣거나 결석일수가 매 학기 7일 넘는 학생들도 적지 않다.
환경보건시민센터, 서울환경연합 등 시민사회단체 회원들이 지난 3월11일 서울 광화문광장 이순신 동상 앞에서 가습기 살균제 참사 관련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문재원 기자
피해학생의 부모 A씨는 “아이들이 어렸을 때 가습기살균제 피해자라는 사실이 알려지자 반에서 ‘유별나다’ ‘유세떠는 거냐’는 식의 이야기를 들었다”며 “요새는 저도 (가습기살균제와 관련된) 활동을 중단했고 아이들에게 피해가 가지 않도록 지내고 있다”고 했다. A씨는 가습기살균제로 호흡기 질환을 앓는 고교생 자녀 2명을 키운다.
가습기살균제 피해학생 2명을 키우는 채경선씨는 “한때는 ‘네가 VIP냐’ 이런 소리까지 자녀들이 듣기도 했다”고 했다. 각 학교는 2차피해 방지 등에 힘써달라는 공문을 교육청에서 받지만 피해학생들은 수군거림에 속수무책이다. 학교에는 매해 담임교사와 교장, 교감선생님에게 피해 정도를 알리는데 “어떤 분을 만나느냐에 따라 자녀가 맘편히 병원에 다녀올 수 있는 환경이 달라졌다”고도 했다.
가습기살균제 피해 자녀들의 학교 적응을 위해 부모가 학교운영위원회에 참석하거나 학부모회 보직을 맡는 경우도 적지 않다. 일부 부모들은 조금 더 자녀를 신경써줄 것을 기대하고 자녀의 사립학교 진학을 선택하기도 한다. 일종의 자력구제에 가깝다.
가습기살균제 피해를 입은 고등학생 자녀를 키우는 추준영씨는 학교에서 활발하게 활동하는 부모 중 하나다. 추씨는 학교에 자녀의 피해 사실을 알리면 “그래서 뭘 원하세요?”라는 말을 한때 들었다. 추씨의 자녀는 호흡기가 좋지 않아 체육수업을 따라가기 벅차하지만 별도 기준을 적용받지 않는다. 가습기살균제 질환으로 병원을 가면 질병결석 인정을 받는 게 사실상 학교에서 받는 피해지원의 전부다. 추씨는 “주변의 괴롭힘을 경험한 피해학생들이 적지 않다”며 “아이들은 ‘참사 피해자’임을 내세웠을 때 득보다 실이 많다는 것을 알기에 피해 사실을 알리지 않는 것”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