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랭크모어

b.트렌드 트렌드는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욕망과 가치를 반영합니다. 예측할 수 없는 미래의 모호함을 밝히는 한줄기 단서가 되기도 하고요. 비크닉이 흘러가는 유행 속에서 의미 있는 트렌드를 건져 올립니다. 비즈니스적 관점은 물론, 나아가 삶의 운용에 있어 유의미한 ‘인사이트’를 전합니다.
한 해의 끝과 시작이 맞닿는 시점, 서점가 풍경은 매년 비슷합니다. ‘미래’를 예측하는 책들이 주요 진열대를 채우죠. 교보문고가 발표한 12월 11~17일 주간 종합 베스트셀러 집계에선 김난도 서울대 명예교수가 쓴 『트렌드 코리아 2026』이 12주 연속 1위를 지켰습니다. 불확실한 미래 앞에서 사람들은 ‘트렌드’에 관심을 가집니다.

지난 26일 찾은 강남 교보문고의 트렌드 서적 판매대는 이른 아침부터 붐볐어요. 다만 책을 집어 드는 이유는 예전과 조금 달라 보였죠. 연차를 내고 서점을 찾았다는 직장인 강모(36) 씨는 “업무도 일상도 인공지능(AI)에 너무 의존하다 보니, 내가 주체적으로 나아가고 있는 건지 불안해졌다”며 “뒤처지지 않으려면 남들 기준이 아니라 ‘나만의 기준’이 필요하다고 느꼈다”고 말했습니다.

성탄절 이후였던 지난 26일 강남 교보문고 베스트셀러 코너에서 책을 살피는 사람들. 사진 김세린 기자
성탄절 이후였던 지난 26일 강남 교보문고 베스트셀러 코너에서 책을 살피는 사람들. 사진 김세린 기자
코로나19가 만든 고립감, 글로벌 경제 위기, 여기에 AI 기술 확산까지 겹치며 불확실성은 일상이 됐습니다. 사람들은 ‘정답’을 찾기보다, 흔들리지 않기 위한 기준을 찾고 있어요. 그래서 요즘 트렌드는 단순한 유행 목록이 아니라 대비를 위한 언어로 소비됩니다. 더 나답게 살기 위해 어디에 투자하고, 감정 소모를 어떻게 관리할 것인가에 대한 질문이 소비로 이어지고요.

서울대 소비트렌드센터, 생활변화관측소, 대학내일 등 주요 연구기관의 진단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AI가 삶을 더 빠르고 효율적으로 만들수록, 사람들은 오히려 속도를 낮추고 감정과 감각을 회복하는 소비에 집중한다는 분석입니다. 김난도 교수가 ‘필코노미’(정서적 만족을 중시하는 소비)를, 김용섭 날카로운연구소 소장이 ‘경험 사치’(기억에 남는 경험으로 삶의 질을 높이는 소비)를 올해의 키워드로 꼽은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그렇다면 2030은 어디서, 어떻게 지갑을 열고 있을까요. 비크닉은 지난 22~23일 롯데멤버스 리서치 플랫폼 ‘라임(Lime)’과 함께 만 20~39세 남녀 1000명을 대상으로 2026 소비 트렌드 설문조사를 진행했습니다. 그 결과 소비의 중심축이 ‘더 나답게 살기 위한 선택’으로 이동하고 있었는데요, 자세한 내용을 비크닉이 정리해봤습니다.

불황에도 ‘만족이 남는 소비’엔 지갑을 연다 이번 설문에서 가장 두드러진 변화는 소비의 기준이 ‘효율성’에서 ‘개인 취향’으로 이동했다는 점입니다. 최근 1년간 자신의 생활 방식과 가장 가까운 선택지를 묻자 “속도나 편리함보다 내 취향과 감정을 더 중시했다”는 응답이 27.6%로 가장 많았어요. “빠르고 효율적인 선택을 최우선으로 여겼다”(21.5%)를 앞질렀죠.

본인의 소비 태도를 묻는 질문에는 “전반적인 소비는 줄이되, 만족도가 확실한 분야에는 지출을 허용한다”는 응답이 49.5%로 1위를 차지했어요. 불황기에도 무작정 절약하기 보다 쓸 곳과 안 쓸 곳을 가르는 게 2030의 기본값이 된 셈입니다. 절약과 사치가 더는 대립하지 않는다는 점도 눈에 띕니다. “불황일수록 지출을 전반적으로 줄인다”(22.4%)와 “가격보다 지금만 가능한 경험이라면 지출할 의향이 있다”(17%)는 응답이 비슷한 수준을 보였어요. 한 사람의 지갑 안에 절약과 선택적 사치가 동시에 보입니다.

애슐리퀸즈가 시즌 한정으로 진행한 팝업 디저트 뷔페에 사람들이 몰려있는 모습. 사진 이랜드이츠
애슐리퀸즈가 시즌 한정으로 진행한 팝업 디저트 뷔페에 사람들이 몰려있는 모습. 사진 이랜드이츠
직장인 이태은(31)씨는 “경험의 밀도가 높다고 느껴지면 지출이 덜 아깝다”며 “대신 일상적인 소액 지출은 오히려 더 줄이게 된다”고 말했어요. 실제로 ‘실용성은 낮지만, 정서적 만족 때문에 구매한 경험이 있느냐’는 질문에 “있다”는 응답은 61.8%에 달했습니다. 소비의 기준이 가성비 혹은 감성이 아니라 “이 선택이 나에게 얼마나 오래 남는가”로 재정렬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이씨가 꼽은 대표적인 사례는 연말·연초에만 경험할 수 있는 디저트 뷔페입니다. 매년 이 시기가 되면 10만~15만 원대의 고가임에도 예약이 빠르게 마감되는 이유죠. 송주용 반얀트리 서울 호텔 운영 본부장은 “딸기 디저트 뷔페는 예약 오픈과 동시에 완판되는 경우가 많다”며 “특히 2030세대를 중심으로 시즌 한정 경험에 대한 선호가 뚜렷하다”고 전했어요. 또 애슐리퀸즈가 성수 팝업스토어 ‘하우스 오브 애슐리’에서 지난 20일~21일 이틀간 100팀 한정으로 선보인 프라이빗 디저트 뷔페 역시 얼리버드 오픈과 동시에 매진됐는데요. 이랜드이츠 관계자는 “지금 이 시기에만 누릴 수 있는 가치로 인식될 때 소비자의 선택 속도는 훨씬 빨라진다”고 덧붙였습니다.

빠름 대신 ‘리듬 회복’에 돈을 쓴다 AI와 자동화가 일상이 된 시대지만 2030의 선택은 더 빨라지는 방향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일부러 속도를 늦추고, 감정의 파동을 줄이는 데 돈을 쓰는 흐름이 뚜렷해졌으니까요. 이번 비크닉×롯데멤버스 라임 조사에서도 “고자극보다 잔잔함을 선택해 감정 소모를 줄이게 됐다”는 응답이 생활 방식 변화 항목에서 두 번째로 많게 나타났습니다.

서울 성동구 성수동 한 라이프스타일 편집숍에서 손님들이 다이어리 등을 고르고 있다. 사진 김세린 기자
서울 성동구 성수동 한 라이프스타일 편집숍에서 손님들이 다이어리 등을 고르고 있다. 사진 김세린 기자
이 흐름은 콘텐트 취향을 넘어 소비 전반으로 확장하고 있습니다. 숏폼 중심의 자극적인 영상에 피로가 쌓일수록 브이로그·ASMR(소리로 심리적 안정을 유도하는 영상)·풍경 영상 같은 저자극 콘텐트가 꾸준히 소비됩니다. 동시에 필름카메라, 필사, 손글씨 기록처럼 시간이 걸리는 ‘아날로그 소비’도 다시 주목받고 있고요.

비크닉이 라이프스타일 플랫폼 에이블리에 의뢰해 분석한 구매 빅데이터(1월 1일~12월 21일)에 따르면 ‘아날로그’ 키워드를 포함한 상품 거래액은 전년 대비 약 90% 증가했습니다. 한정된 필름으로 순간을 신중하게 담아내는 일회용 카메라는 8.5배(754%), 필사 노트는 3.6배(264%), 유리 펜은 16배(1485%) 가까이 늘었죠. 성수동 한 라이프스타일 편집숍에서 다이어리와 만년필 세트를 구입한 대학생 김세영(22)씨는 “디지털 환경에 계속 노출되다 보니 일부러 손으로 기록하며 마음의 속도를 조절하고 싶어졌다”고 말했어요.

감정을 다루는 방식 역시 달라지고 있습니다. 명상 모임이나 사찰 방문처럼 감정의 볼륨을 낮추는 오프라인 경험도 늘고 있으니까요. 한국리서치의 ‘2025 종교 인식 조사’에서 불교 호감도가 54.4%로 조사 이래 최고치를 기록한 것도 같은 흐름으로 읽힙니다. 2030을 중심으로 퍼진 ‘힙(Hip)불교’ 역시 감정을 덜 흔드는 방식으로 자신을 회복하려는 선호가 반영된 결과입니다.

취향 소비는 이벤트가 아니라 ‘일상’이 된다 서울 성동구 성수역과 서초구 강남역 일대 가챠샵에서 학생들이 캡슐 장난감을 뽑고 있다. 사진 김세린 기자
서울 성동구 성수역과 서초구 강남역 일대 가챠샵에서 학생들이 캡슐 장난감을 뽑고 있다. 사진 김세린 기자
빠름을 내려놓은 자리에는 거창한 보상 대신, 일상 속 작은 만족이 들어왔습니다. 요즘 2030세대가 만족을 채우는 방식은 ‘큰 이벤트’가 아닙니다. 개인의 취향은 특별한 날에만 소비되지 않고, 매일 쓰고·먹고·들고 다니는 일상 안으로 자연스럽게 스며들고 있어요.

취향을 일상으로 들이는 가장 직관적인 통로는 팝업스토어입니다. 최근 찾은 서울 성수동의 한 캐릭터 팝업스토어는 체감 온도가 영하 20℃로 뚝 떨어졌지만 긴 줄이 이어졌어요. 1시간 대기 끝에 헬로키티 한정판 텀블러를 포함해 20만 원어치를 구매했다는 김유리(27)씨는 “일주일에 2~3번 팝업을 찾는 게 자연스러운 루틴이 됐다”며 “한정 기간·한정 수량이라는 조건이 결심을 빠르게 만든다”고 말했어요.

열쇠고리나 가방 참(장식)처럼 노출 빈도가 높은 소형 아이템 소비도 같은 맥락입니다. 이디야커피가 지난 9월 24일부터 10월 3일까지 소셜미디어(SNS)에서 진행한 ‘붕어빵 액막이 키링’ 이벤트에는 240명 추첨에 1만 명 이상이 몰렸습니다. 지난 22일 정식 출시한 키링은 이틀 만에 5000개 이상 판매됐습니다. 회사 측은 “기능보다 ‘지니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위안이 되는 소비가 분명해졌다”고 설명했어요.

최근 늘어나는 가챠샵 역시 취향 소비의 일상화를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가챠는 피규어·키링 등이 들어 있는 캡슐 장난감을 뽑는 기계인데 강남·홍대·성수 등 주요 상권에는 가차샵이 상가 공실을 채우고 있어요. 직장인 김유민(30)씨는 “목적 없이 들러 작은 설렘을 얻는 소비”라고 표현했어요. 취향 소비가 과시의 대상이 아니라, 매일 반복되는 감정 관리의 도구로 자리 잡고 있는 셈입니다.

‘나를 위해 남는 소비’의 조건 2026년 소비의 핵심은 분명합니다. 유행을 따라 물건을 구입하기 보다 불안정한 일상 속에서 나를 지탱해주는 선택에 집중하는 것이죠. 이는 극단적인 소비 양극화가 아닌 절제와 만족을 동시에 관리하는 방식에 가깝습니다.

지난 30일 서울 성수동 한 팝업에서 캐릭터 물건을 고르고 있는 소비자들. [사진 김세린 기자]
지난 30일 서울 성수동 한 팝업에서 캐릭터 물건을 고르고 있는 소비자들. [사진 김세린 기자]
김난도 교수는 『트렌드 코리아 2026』에서 이를 ‘무경계 소비자’로 설명합니다. 연령·성별·국적처럼 소비자를 단순화하던 인구통계 기준은 힘을 잃고 개인의 취향과 가치관이 소비의 핵심으로 들어오고 있습니다. 김 교수는 “불확실성이 높아진 시대에 가장 확실한 전략은 경계를 넘나드는 소비자의 마음을 얻는 것”이라며 “기존의 고정관념을 버리고 소비자의 가치와 취향을 중심에 둬야 한다”고 강조했어요.

불확실성과 번아웃이 일상이 된 시대, 2026년의 소비자는 더 크게 소유하기보다 일상에 스며드는 안정을 선택할 가능성이 큽니다. 결국 남는 질문은 하나입니다. ‘이 소비가 나를 더 나답게 만들어주는가’. 2030의 지갑은, 이 질문에 고개를 끄덕일 때 열릴 것입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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