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랭크모어

[청년 표류기]
<1> 조각 경력
풀스펙 지원자 넘치는데 기업 신입 채용 감소
인턴·계약직 6번…"공백기 없애려 떠돈다"
취준생 절박함 빌미, 불량 일자리·노동 착취
채용→단기 일자리화...4.7개월 '올인' 요구

편집자주

청년들은 불안하다. 어느 세대보다 준비된 세대이지만, 첫 직장을 얻기까지 걸리는 시간은 매년 역대급이다. 졸업 후 구직이 공식이 되면서 단기 경험을 전전하는 '조각 청년'이 늘고 있다. 2026년 새해, '아프니까 청춘'이 아닌 '불안이 일상'인 청년들의 취업 현실을 구조적으로 짚어보고, 그들의 희망과 대안을 함께 모색한다.

일러스트=신동준 기자
일러스트=신동준 기자


민주
(가명·26)씨는 인턴이다. 서울 대기업 인사팀으로 출근한 지 석 달째다. 중견기업에서 6개월, 또 다른 대기업에서 2개월, 공공기관에서 6개월. 그는 17개월 차 계약직 직원이다.

퇴근 인사를 한 민주씨를 팀장이 불러 세웠다. "할 말이 있는데, 잠시만요." 무슨 잘못이라도 했을까, 재빠르게 하루를 돌아봤다. 팀장의 목소리는 밝았다. "민주씨, 여기서 더 일해볼 생각 있어요?"

처음 출근했을 때 들은 말이 퍼뜩 떠올랐다. "잘만 해준다면 한 식구가 될 수도 있고..." '한 식구'라는 말은 또렷했다. 정규직 전환을 제안하는 걸까? 2년째 취업 준비 중인 민주씨는 납득할 준비가 돼 있었다.

"물론, 지금 계약을 연장하는 식이긴 할 텐데..."


그러면 그렇지. 툭하고 맥이 빠졌다. 네 번째 일터, 언제나 끝은 비슷했다. 한두 번 계약이 연장되고는 어쩔 수 없이 짐을 빼야 했다. '민주씨, 열심히 일하는 것 잘 아는데.' '우리도 같이 계속 일했으면 좋겠는데.'

미안하긴 한데, 자신들 잘못은 아니라는, 당신이 감수해야지 어쩌겠냐는 모호하고 애매한 표정과 말투. 그렇게 민주씨의 조각 난 경력은 이력서의 또 한 줄을 채울 것이다. 평소 같았으면 "기회 주셔서 감사합니다." 덥석 제안에 응했을 민주씨가 어쩐지 망설였다.

'이러다 평생 계약직만 전전하는 거 아니야?
이렇게 살아도 되나?'


청년들이 몇 달 수명의 '
조각 일자리
'를 전전하고 있다. 각종 대외활동, 분야별 실무 경험을 무장한 완성형 인재들이 끊임없이 나오는데, 첫 정규 직장에 들어가는 시점은 점점 더 늦어지고 있다. 일하고 싶어도 제때, 제자리에서 일할 수 없는, 2025년 대한민국 취업 준비생들의 현실이다.

지난해 12월 한국고용정보원은 '청년층 첫 일자리와 일자리 미스매치 분석' 보고서를 내놨다. 보고서에는 청년층(15~29세)의 첫 직장 중 계약직 비중이 2020년 33%에서 2025년 37.5%로 증가했다는 내용이 담겼다. 3명 중 1명 이상이 계약직으로 사회에 첫발을 딛고 있다는 얘기다. 시간제 일자리(1주 36시간 미만 노동) 비중도 같은 기간 21%에서 25%로 늘었다.

징검다리가 끊어졌다

취업 준비생 이모씨가 지난달 16일 모교인 서울의 한 대학교에서 취업 지원 프로그램을 살펴보고 있다. 강예진 기자
취업 준비생 이모씨가 지난달 16일 모교인 서울의 한 대학교에서 취업 지원 프로그램을 살펴보고 있다. 강예진 기자


인턴 혹은 계약직 청년들의 하소연은 한 단어로 요약이 가능하다. 바로 '악순환'이다. 그건 정규직이 아닌 일에 대한 우려나 걱정이 아니다. 계약 종료 후 맞이해야 할 당황함과 막막함, 그리고 자괴감이다.
쳇바퀴를 구르듯, 또 다른 계약직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다는 자각
이다.

"(계약직에서) 안정적인 직장으로 가는 징검다리는 사실상 끊겼다고 봐야 해요. 열심히 하겠다고, 젊고 준비된 인력들이 넘치는데 기업이 질 좋은 정규 일자리를 늘릴 이유가 없는 거겠죠? 청년들은 뭐든 하려 하고, 악순환이죠."

한국노동사회연구소 이명규 소장도 이들의 좌절을 공감하는 한 명이다. "고용의 벽이 점점 높아지며 청년의 사회 안착 자체가 어려워지고 있다"는 게 '2025년 취업 준비생의 현실'. 여기에 기업들이 수시·경력 채용만 늘리면서, 청년들에게 주어지는 선택지는 매우 한정적이란 분석을 더한다.

그래픽=강준구 기자
그래픽=강준구 기자


한국일보가 취준생 71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심층 조사에서도 또 다른 민주씨는 쉽게 만날 수 있었다. 71명 가운데 취업 준비를 위해 단기 일자리를 경험해 봤다는 응답은 46명(65.7%)이었는데, 이 중 단기 경력을 2회 이상 쌓은 청년이 27명에 달했다.
취업 준비 기간이 1년 이상인 청년은 평균 2.6회의 조각 경력
을 갖고 있었다.
형태는 인턴, 계약직부터 파견직까지 다양했지만 기간은 대부분 한 번에 1년을 넘기지 못했다.

공백기를 채울 수 있다면



'조각 일자리'가 내실이라도 있다면 견뎌볼 텐데, 현실은 그렇지 않다. 전에는 직무를 사전에 경험하려는 청년과 단기 일용 인력이 필요한 기업 간의 니즈가 맞으면서 비교적 건실하게 운영됐고, 채용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그런데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경으로 단기 일자리를 전전하는 취업 준비생이 늘어나면서 '수요와 공급의 눈높이'는 틀어지기 시작했다.

민주씨의 첫 인턴이 딱 그랬다.
교육 분야에서 잔뼈가 굵은 중견기업에 마케팅 직무로 입사했는데, 반년간 '디시인사이드' 등 온라인 커뮤니티에 광고 댓글만 달았다. 광고 링크 유입 수가 저조하면 "어그로(자극적인 콘텐츠로 관심을 유도하는 행위)를 잘 못 끄네" "자극적으로 좀 써 봐" 면박당하기 일쑤였다. 마케팅 교육은커녕 생전 들여다본 적 없는 음지 커뮤니티 용어만 영어 단어처럼 외웠다. "'난 바이럴 마케팅 실무 중이다' 최면 걸며 애써 버텼어요. 일단 유명한 회사고, 힘들게 얻은 기회잖아요."

취업준비생 김모씨가 지난달 15일 서울 종로구 청계천 인근에서 높은 건물들을 바라보고 있다. 임지훈 인턴기자
취업준비생 김모씨가 지난달 15일 서울 종로구 청계천 인근에서 높은 건물들을 바라보고 있다. 임지훈 인턴기자


기업의 악독함은 도처에서 모습을 드러낸다. 정규직보다 싸게 쓸 수 있다는 점을 노리고, "능력과 에너지를 최대한 뽑아먹으려는 꼼수"를 부리기까지 한다. 직원이 20명 정도 되는 회사 개발팀에 들어간
박지원
(가명·32)씨는 난데없이 총무팀, 회계팀에서 소화해야 할 기초 자료 정리를 떠맡았다. 엑셀 자격증이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싫은 티를 내자 '전임자들은 잘만 하던데'라는 핀잔이 돌아왔다. 각 팀의 신입사원의 일을 계약직 1명이 돌려 막아 왔단 건 나중에 알았다.

백엔드(데이터베이스 관리) 개발자로 입사한
홍민지
(가명·25)씨는 돌연 인공지능을 만들라는 주문을 받았다. 중국어 전공자에게 스페인어 작문을 시키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할 수도 없을뿐더러 민지씨의 커리어에 도움이 되는 일도 아니었다. 그래도 퇴근 후 따로 스터디까지 잡아 가며 어떻게든 해보려 했다.

채용 전환의 덫

2023년 서울의 한 채용박람회에 참여한 구직자가 기업의 발표 내용을 필기하고 있다. 이한호 기자
2023년 서울의 한 채용박람회에 참여한 구직자가 기업의 발표 내용을 필기하고 있다. 이한호 기자


최근 기업들이 선호하는 '전환 가능 계약직' 등도 또 하나의 조각 일자리 채용이다. 기업이 과거 '서류→필기시험→면접'을 통해 단기간에 많은 신입을 뽑았다면, 요즘엔 몇 달간 인턴으로 출근하게 하고 이를 평가한다. 아예 '전환 가능 계약직' 등 조건부 채용을 내거는 곳도 있다.

기업 입장에서는 직무 경험 제공이라는 순기능을 강조한다. 하지만 이미 복수의 조각 경력을 쌓아 온 요즘 청년들에겐 경험보다는 오히려 부담이다. 자리가 급한 건 청년들이다. 시간과 노동력을 '올인'할 수밖에 없다.

김이현
(가명·28)씨도 반년을 그렇게 보냈다. 오전 5시 30분에 일어나 회사에 도착하면 오전 8시, 근무 시작 한참 전부터 인턴 대부분이 빈 사무실에 나와 있었다. 상대적으로 불성실해 보일 수도 있다는 걱정 때문이었다. 그렇게 하루 종일 보고서를 쓰다가 자정이 다 돼 퇴근하길 반복했다. 다른 공고에 한눈을 팔 여유는 없었다.
그러나 여름이 끝나고 전환에 성공한 건 25명 중 4명뿐이었다. 고작 15%의 확률에 21명이 그해 상반기를 통으로 날렸다.


"얻은 것 없이 '전환 실패' 꼬리표만 붙은 거니 허탈했죠. 앞으로 다른 기업 면접에서 이 이력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걱정도 됐고요."


그렇다면 이 같은 채용 방식은 일부에 불과한 걸까. 한국일보가 취업포털사이트인 '잡코리아'에 등록된 매출 1,000대 기업의 신입 채용 공고를 자체 검토해봤다. 그 결과, 지난해 1월부터 12월 첫째 주까지 올라온 채용전환형 인턴 공고는 82개에 달했다. 인턴에 쏟아야 하는 평균 기간은 자그마치 4.7개월이었다. 1개월 이상 3개월 미만 근무를 요구하는 공고가 31개로 가장 많았고, 이현씨가 그랬듯 6개월 이상 출근해 상반기 혹은 하반기 대규모 채용 시즌 중 최소 하나를 포기해야 하는 공고도 21곳(25.3%)으로 적지 않았다.

전환율을 알려 주는 곳은 거의 없었다.
82개 공고 중 전년 합격자 수 등 예상 전환율을 명시한 건 6개(기업 3곳)에 불과했다
. 정식 신입 채용이 아니더라도 민주씨처럼 우선 1년 미만 계약을 맺은 뒤 '평가에 따라 정규직 전환'이라며 모호한 가능성만 열어 둔 공고도 25개나 됐다.

그래픽=박종범 기자
그래픽=박종범 기자


현행법상 사기업은 정규직 전환율 공시 의무가 없다. 평가 절차 등 세부 내용이 비공개인 경우가 많다. 이렇다 보니 3개월 인턴 과정을 통과하고도 계약직으로 9개월을 더 일해야 정규직 전환 심사를 받을 수 있거나(A 제과기업) 4개 직무를 6개월씩, 총 2년을 저당 잡는 등(B 주류기업) 일부 기업들의 '갑질'은 심해지는 추세다.

"기업이 신입 발굴, 육성에 들였던 시간과 비용이 취준생에게 전가된 것, 그게 본질입니다." 고용 사각지대에 놓인 근로자들을 주로 대리하는 하은성 노무사의 진단은 단호했다. "기업이 리스크가 적은 경력 채용을 늘리는 쪽으로 변화하면서 취준생들도 일 경험을 쌓기 위해 단기 일자리를 전전하는 구조에 놓였습니다. 그런데도 신입 채용 과정에서조차 또 한 번의 불안정한 단기 노동을 거치게 하는 건, 기업이 져야 할 부담을 구직자에게 과하게 떠넘기는 행위예요."

표류는 계속된다



민주씨는 지난해 2월 네 번째 퇴사를 했다. 습관처럼 접속한 취업포털엔 전 직장이 된 그 기업의 인턴 모집 공고가 올라와 있었다. 손쉽게 대체되고 퇴사를 거듭하는 삶에 질린 순간이었다. 한동안 일을 쉬고 인적성 시험에 대비하는 등 공채에 집중하기로 했다.

이현씨는 지난해 초 한 외국계 기업에 계약직으로 입사했다. 그의 여섯 번째 조각 경력이다. 기계적으로 지원서를 써왔던 것과 달리 이번엔 생각이 많아졌다. "일 경험이 많다고 무조건 좋은 게 아니란 생각도 요즘엔 들어요. 그렇지만 (전환형 인턴도 떨어졌는데) 공백기라도 없어야 하지 않겠나 싶어서…"

그래픽=강준구 기자
그래픽=강준구 기자


2025년 하반기 민주씨와 이현씨가 지원한 기업은 20곳이 넘었다. 그중
한 군데에서도 합격 통지를 받지 못했다.
민주씨는 공백기가 발목을 잡은 것 같아 취업포털의 단기 일자리를 다시 둘러보기 시작했다. 이현씨는 전환형 인턴 탈락과 더불어 '그간 해 온 일 경험의 내실이 부족하다'고 스스로를 진단했다. 올해 봄 계약이 끝나기 전 좀 더 큰 기업에 이력서를 돌리려 한다.

지난해 상반기 기준 기업 채용 공고 약 14만4,000건 중 82%는 경력직 채용(한국정보고용원)이었다. 경력·신입을 병행해 채용한 경우가 15.4%였고, 신입만 채용한 경우는 2.6%에 그쳤다. 근로 의향이 있음에도 취업하지 못한 2030세대는 지난해 11월 기준 약 159만 명에 달한다. 전년보다 2만8,000명이 늘었다(국가데이터처 경제활동인구조사).

준비된 지원자는 계속 늘고 있고 기업은 신입에게 문을 걸어 잠갔다. 그래서 취업준비생들은 묻고 답을 듣고 싶어 한다. "취업난, 이게 개인 의지나 역량에 좌우되는 문제라고 보시나요?" 안타깝게도 어떤 답을 듣든,
취업 준비생은 오직 자신을
탓하고 몰아세울 것이다.
그리고 안착할 곳을 찾는 청년들의 표류는 아마도 2026년, 2027년 계속될 것이다.


■한국일보 특별취재팀팀장: 김동욱(경제부)•신은별(엑설런스팀)
취재: 한소범•이유진(엑설런스팀), 황은서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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