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청 장관’ 유흥식 추기경
유흥식 추기경이 지난 22일 대전 중구 성심당문화원에서 경향신문과 인터뷰를 하고 있다. 유 추기경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가장 필요한 덕목은 ‘경청’이라고 말했다. 정효진 기자 [email protected]
“평화는 시대의 소명”
남북 대화 단절 상황 안타까워…마음에 안 든다고 관계 끊는 건 외교적으로도, 인간적으로도 어리석은 선택
“잘 듣자고요”
내란 이후 세대·진영 갈등, 마음 열고 잘 듣는 게 해결 출발점…청년들에겐 책임 맡기고 실패할 수 있는 자리 내줘야
“공동선을 지키는 방파제”
경향신문 80주년…힘있는 사람보다 조용히 신음하는 이들에 귀 기울이며 평화와 정의의 등불로 남아주길
“레오 14세 교황님과 이재명 대통령, 그리고 김정은 국방위원장. 이 세 분이 나란히 서서 함께 찍는 사진을 보고 싶어요. 이 꿈이 실현되길 바라며 기도해야지요.”
유흥식 추기경의 미소 띤 얼굴엔 설렘이 묻어났다. 아직은 존재하지 않는 사진. 그러나 머지않은 시일에 이뤄지리라 믿는다고 했다. 2주간의 일정으로 방한한 유 추기경을 지난 22일 대전 성심당문화원에서 만났다. 그는 한국 천주교 사상 4번째로 서임된 추기경이자 한국인 최초의 바티칸 교황청 장관(성직자부)이다. 2021년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장관으로 임명된 뒤 현재 레오 14세 교황 체제에서도 직무를 이어가고 있다.
유 추기경은 “여러 차례 북녘 땅을 직접 밟으며 분단의 아픔을 눈으로 본 사람으로서 평화는 선택이 아니라 우리 시대의 소명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살아왔다”면서 “늘 사람들 곁에 서서 평화의 길을 걷는 사제로 남고 싶다”고 말했다. 주교 시절에도, 추기경이 되어 바티칸에 머무르면서도 그가 늘 마음에 품고 절실하게 나누는 대화의 주제는 한반도 평화였다.
윤석열 전 대통령의 내란 사태 수습을 두고 “진실을 밝히고 책임을 묻는 일이 미뤄져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이어 “침묵하거나 계산하는 것은 정의가 아니다. 정의는 언젠가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 지금 응답해야 할 요청”이라며 “국민들이 지금 사법의 역할을 더 엄중하게 요구하고 묻는 현실은 여전히 정의를 믿고 있기 때문이라고 본다. 정의와 신뢰를 지키는 것이 우리 사회의 중요한 과제”라고 했다.
- 2027년 레오 14세 교황께서 방한합니다. 그때 북한도 방문해 평화의 메신저 역할을 해주시리라는 기대감이 높습니다.
“지난 12월 중순 교황님과 대화하면서 한국 국민들이 교황님과 함께 한반도에 새로운 평화가 오기를 얼마나 기대하고 바라는지 말씀드렸습니다. 교황님께선 제 이야기를 들으시고는 그렇게 될 수 있도록 기도하고 노력하자고 하셨습니다.”
- 전임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도 여러 차례 방북 의사를 밝혔습니다.
“교황청은 북한 문제에 대해 오랫동안 일관된 입장을 유지해왔습니다. 핵은 반대하고 모든 문제는 대화로 풀어야 하며 어떤 정치적 상황에서도 인도적 지원은 계속되어야 한다는 원칙입니다. 꾸준히 북한에 노크를 해왔지만 아직까지 공식적인 응답은 없는 상태입니다.”
- 주교 시절 몇차례 방북하셨습니다.
“가톨릭교회 대표 자격으로 여러 차례 만났습니다. 진솔한 대화를 꽤 나눴지요. 그래서 지금의 단절 상황이 더 안타깝습니다. 금강산 관광, 개성공단이 모두 중단되어버린 것도요. 대화에서는 상대의 자존심이나 사고방식을 이해하면서 소위 ‘밀고 당기는 과정’도 필요합니다. 그런데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곧바로 관계를 끊어버리는 것은 외교적으로도, 인간적으로도 어리석은 선택이라고 봅니다.”
- 지난 7월 비무장지대(DMZ) 방문 계획이 유엔사 반대로 무산됐습니다. (유 추기경은 교황청 성직자부 장관 신분으로 통일부를 통해 DMZ 방문을 신청했다. 하지만 유엔군사령부(United Nations Command·유엔사)는 ‘48시간 전 승인’ 절차를 어겼다는 이유로 불허했고, DMZ에서 한반도 평화 메시지를 전달하려던 그의 계획은 이뤄지지 못했다.)
“절차상 문제를 들어 미국 쪽에서 허가가 나지 않았어요. 그럴 때면 과연 미국이 우리 우방이 맞나 하는 의문이 들기도 합니다.”
유 추기경은 헌법재판소의 윤석열 전 대통령 탄핵 결정을 앞두고 사회가 극도의 혼란에 빠졌던 지난 3월 시국선언문을 통해 “정의에는 중립이 없다”고 밝혀 국민들에게 큰 위로와 울림을 던졌다. 유 추기경은 “우리 사회가 느끼는 불안이 그때(내란 직후)와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이기도 하는데, 그 불안을 들여다보면 정의가 제자리에 서지 못하면 어떡하나 하는 두려움도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 내란 이후 극심해지고 있는 사회적 갈등에 대한 우려도 큽니다.
“공동체를 성장시키는 갈등도 있지만, 지금은 깊은 상처를 남기는 극단적 모습으로 흐르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나라의 방향성은 찾았지만 기득권의 반발과 적대감이라는 장애물도 큽니다. 그래도 저는 비관적으로만 보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이미 폭력이 아니라 평화의 방식으로 변화를 이끌어낸 경험을 가지고 있습니다. 지난해 겨울 차가운 거리에서 누군가를 위해 밥값을 결제하고 연대하며 격려하던 시민들의 모습은 전 세계 어디서도 보기 힘든 우리의 힘입니다.”
- 세대와 진영 간 벽도 갈수록 높아지고 있습니다.
“저는 매일 아침 ‘오늘도 잘 들을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기도합니다. 마음을 열고 잘 듣는 일은 너무나 중요합니다. 모든 분들에게 꼭 당부하고 싶어요. 잘 듣자고요. 그것이 해결의 출발점입니다. 각자의 정답을 고집하지 말고 함께 동의할 수 있는 길을 찾아야 합니다.”
- 말처럼 실천이 쉽지는 않습니다.
“서로 통하지 않는 것은 어쩌면 더 자연스럽습니다. 그러니 ‘왜 나랑 다르지?’가 아니라 ‘다른 것이 당연하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부터 시작하면 어떨까요. 자신의 존재가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졌다고 느낄 때 자발적인 화합과 협력이 생기거든요. 그런 마음을 갖고 상대의 말을 들으세요. 끊지 말고요. 또 서로의 이름과 얼굴을 기억하는 거예요. 직함이나 낙인이 아닌, 그 사람으로 말이죠.”
유흥식 추기경은 주교 시절 ‘명랑주교’ ‘미소천사’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상대를 무장해제시키는 환하고 밝은 미소 때문이다. 교황청에서도 유 추기경은 ‘가장 잘 웃는 추기경’으로 통한다. 언제나 사람들에게 스스럼없이 먼저 다가가 인사하는 그는 추기경, 장관 등의 공식적인 호칭 대신 ‘돈 라자로’(라자로 신부)로 불리는 것이 가장 좋다고 한다. “어릴 때부터 사람을 보면 잘 웃는 성격이었어요. 사제생활을 하면서 미소가 얼마나 큰 힘을 지니는지 분명히 깨달았습니다. 상대를 존중하는 신호이고 사랑을 가장 빠르게 전하는 언어라고 생각해요.”
- 종교가 신뢰를 잃고 있다는 지적이 나옵니다.
“종교가 지켜야 할 중심은 인간의 생명, 존엄성, 공동선입니다. 한마디로 양심의 소리를 지키는 것이지요. 약자의 편에 서서 사회의 문제를 외면하지 않고 연대의 자리에 머물러야 합니다. 거창한 논쟁이나 주장보다 한 사람의 고통과 눈물을 외면하지 않는 태도가 종교의 신뢰를 다시 세울 수 있다고 봅니다.”
- 종교가 현실정치에 대해 목소리를 내는 것이 필요할까요.
“극우 세력과 특정 종교 세력이 결합하는 현상은 매우 우려스럽습니다. 종교가 정치적 편향이나 이념의 도구가 되는 순간 본래의 길을 벗어나게 됩니다. 하지만 헌법정신과 인권이라는 기준 앞에서는 침묵하면 안 됩니다. 그건 중립이 아니라 정의에 대한 외면입니다. 정치야말로 우리 삶에 큰 영향을 미칩니다. 그래서 정치인을 위해 기도하지 않는다면 그들을 비판할 자격이 없다고 생각해요.”
- 정치인들을 위해 어떤 기도를 하시는지 궁금합니다.
“정책의 출발점은 언제나 가장 약한 이들이어야 합니다. 나라의 예산과 법, 제도는 많은 것을 가진 이들보다 이 순간 삶이 무너질까 두려워하는 사람들을 먼저 바라봐야 해요. 청년과 불안정한 노동자, 가난한 이들, 돌봄이 필요한 이웃들이 흔들릴 때 국가는 결코 건강할 수 없거든요. 그래서 저는 항상 부탁합니다. ‘이 선택이 가장 약한 이에게 어떤 얼굴로 다가갈 것인가’를 스스로에게 물어달라고요.”
- 청년세대의 신뢰를 얻기 위해 기성세대는 어떤 노력을 기울여야 할까요.
“저는 청년들에게 ‘여러분이 느끼는 불안은 정당하다’고 말해주고 싶어요. 그들의 불안은 개인의 실패가 아니라 사회가 사람을 어떻게 대하고 있는지를 드러내는 신호거든요. 청년들의 이야기를 들어주세요. 청년들이 공동체를 신뢰하지 못하는 이유는 자신의 이야기가 끝까지 받아들여지지 않는다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또 청년들에게 책임을 맡기고 실패할 수 있는 자리를 내주세요. 그렇게 청년들이 모험하고 도전하고 실패할 수 있어야 새로운 창조를 만들어낼 수 있지 않을까요. 청년들을 먼저 믿을 때 그들도 공동체를, 기성세대를 믿기 시작할 것입니다.”
-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인답게 사는 것이 회복의 출발점이라고 시국선언문에서 밝혔습니다.
“인도의 간디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나는 그리스도를 좋아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들 안에서 그리스도를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 말을 늘 마음 깊이 품고 살아왔습니다. 그리스도인답게 산다는 것은 말이 아니라 삶으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사랑과 겸손, 용서, 자비라는 네 가지 덕목을 일상의 선택 속에서 실천하는 삶이지요. 소외된 이들 곁에 다가가고, 낮은 자리에서 섬기고, 복수 대신 화해의 가능성을 열어두고, 판단 대신 이해를 선택하는 것.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길입니다.”
유 추기경은 그동안 주로 여름철에 한국을 찾았기에 이번엔 모처럼 성탄과 연말연시를 고향에서 보냈다. 특히 성탄전야 미사는 청소년기에 신앙생활을 시작하고 세례를 받았던 논산 부창동 성당에서 집전했다. 빡빡한 연말 일정을 소화한 뒤 오는 5일 바티칸으로 출국한다. 교황이 소집한 추기경회의를 비롯해 교황청 장관으로서의 바쁜 일상이 그를 기다리고 있다.
인터뷰 직전 건강검진을 받고 온 그에게 건강상태를 물었다. 장난꾸러기 아이 같은 미소를 지은 대답 때문에 순간 폭소가 터졌다. “의사선생님이 진찰하시더니 저보고 그러세요. 마음속에 신앙심을 더 키우고 사랑도 더 많아져야 할 것 같다고요. 그래서 대답했죠. 아이고, 제가 불치병에 걸린 것 같습니다. 평생을 채워도 채워지지 않아요.”
- 바티칸에서 하루는 어떻습니까.
“아주 규칙적이에요. 오전 4시30분에 일어나서 1시간가량 바티칸 정원을 산책합니다. 8시쯤에 성직자부 사무실로 출근하지요. 성직자부는 보편교회의 사제활동과 생활, 신학교에서의 사제 양성 등을 총괄하는 부서예요. 그래서 하루에도 전 세계에서 보내오는 사제들에 관한 업무를 처리하고 많은 회의를 합니다. 일상적이고 정기적인 회의도 있고 교황님을 모시고 하는 회의도 있지요. 교황청은 작은 도시지만 세계를 품고 움직이는 축소된 지구와 같습니다. 저녁에는 그날 만난 사람들, 각국에서 온 복음의 현장을 떠올리며 잠시 묵상합니다. 하루가 고요해 보이지만 사실은 매우 역동적인 시간이지요. 잠자리에 들면 금방 곯아떨어집니다.”
- 교황청 근무 이후 바람이 있다면요.
“어디에 있든 늘 사람 곁에 서 있는 사제로 남고 싶습니다. 청년들에게 열린 길을 내주는, 불안과 고립을 경험하는 그들 곁에서 함께 걸어주는 사제가 되고 싶어요. 필요한 자리에 서서 누군가의 이야기를 끝까지 열심히 들어주어야지요. 직책은 언젠가 내려놓지만 사제의 소명은 끝나지 않거든요.”
창간 80주년을 맞은 경향신문은 천주교와 깊은 인연이 있다. 구한말 창간됐다가 단명한 주간 ‘경향신문’에 그 역사적 뿌리를 두고 있다.
- 창간 80주년인 경향신문에 당부하실 말씀이 있는지요.
“갈등과 분열이 심하고 사람의 존엄이 쉽게 소모되는 시대일수록 언론의 역할은 더 중요합니다. 언론은 단순한 사실을 전달하는 기관이 아니라 공동선을 지키는 마지막 방파제가 되어야 합니다. 앞으로도 힘있는 사람의 목소리보다 조용히 신음하는 이들의 이야기에 더 깊이 귀 기울여주시길 바랍니다. 다음 80년 또한 평화와 정의, 연대의 등불로 남아주시기를 기원합니다.”
유흥식 추기경의 반지. 정효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