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일 서울 시내 한 주차장에 주차된 쿠팡 배송 차량. 연합뉴스
고객 3370만명의 개인정보 유출 사고가 발생한 쿠팡이 지난 25일 단독으로 자체 조사 결과를 공개하고 26일 국문본과 영문본이 미묘하게 다른 성명을 발표하면서 그 배경에 의문이 일고 있다. 쿠팡의 이런 대응에는 향후 한·미 두 나라에서 벌어질 법적 분쟁을 염두에 둔 전략적 판단이 깔렸을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사태 수습보다는 법적 방어에만 유리하면 된다는 ‘눈 가리고 아웅 식’ 조처가 반복되면서 국민 불안만 높이고 있다는 비판도 제기된다.
쿠팡은 지난 25일 개인정보 유출자를 특정했으며, 고객 정보 유출에 쓰인 장치는 모두 회수했고 제3자에게 유출된 정황이 없다는 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당시 쿠팡은 유출자가 3370만명의 고객 정보를 유출했지만, 그 가운데 3천명가량의 정보만 외부 저장장치에 저장했다고 밝혔다. 이에 정부가 “일방적인 자체 조사 결과 공표”라며 강력하게 항의하자, 쿠팡은 이튿날인 26일 “정부 지시에 따른 조사”라고 반박하는 성명서를 국문과 영문 두가지 버전으로 냈다.
문제는 이 두 버전의 성명서 내용이 미묘하게 다르다는 점이다. 쿠팡은 국문 성명에서 “정부의 감독 없이 독자적으로 조사했다는 잘못된 주장이 제기되면서 불필요한 불안감이 조성되고 있다”고 밝혔는데, 영문본에서는 ‘불필요한 불안감’이라는 표현 대신 ‘잘못된 불안감’(false insecurity)이란 표현을 썼다. 불안 자체가 사실이 아닌 잘못된 정보에 근거한 것이라는 의미를 강조한 것이다. 또한 “정부 기관과 국회, 일부 언론으로부터 ‘쿠팡이 정보 유출 사태에 대해 심각하게 대처하지 않았다’는 억울한 비판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라는 표현은 영문본에선 ‘허위 혐의 제기’(falsely accused Coupang)라는 법적 뉘앙스가 강한 표현으로 번역됐다. 국내 비판을 잘못된 정보에 기초한 부당한 책임 추궁으로 규정하려는 의도가 엿보이는 대목이다.
전문가들은 쿠팡의 이런 행보를 두고 향후 법적 분쟁을 대비한 움직임일 가능성에 주목하고 있다. 최경진 한국인공지능법학회장(가천대 법학과 교수)은 “미국과 한국 시장에서 지게 될 법적인 책임을 고려한 움직임으로 보인다”고 했다. 이번 사태와 관련해 쿠팡은 국내에서 최대 1조원에 이르는 과징금 부과 가능성이 거론되고 있고, 미국에서는 지난 18일(현지시각) 공시 위반과 관리 부실을 이유로 주주들이 집단소송을 제기한 상태다. 특히 미국 현지 집단소송과 관련해 상대방의 주장에 곧바로 부인하지 않으면 사실로 간주될 수 있다는 ‘미국 증거법’ 원칙을 쿠팡이 고려한 것이 아니냐는 분석도 나온다.
한편에서는 이런 쿠팡의 움직임에는 내부 혼란 상황이 투영됐다는 풀이도 있다. 고학수 전 개인정보보호위원회 위원장은 28일 자신의 에스엔에스(SNS)에 쿠팡의 행보에 대해 “쿠팡이 생각하는 전략적 방향성이 드러나는 면도 있지만, 그와 동시에 쿠팡 내부의 혼란 상황 또한 그대로 보여주는 것 같다”며 “(쿠팡의 영문 성명서는) 영어 어법 오류나 부적절한 영어 표현이 군데군데 보이는 것은 물론이고, 마치 저년차 직원의 초안을 그대로 수정 없이 올린 듯한 거친 표현 등이 곳곳에 보인다”고 썼다.
뉴욕 증시에 상장된 쿠팡의 모회사 쿠팡아이엔씨(Inc.)의 ‘주가 방어’ 역시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다. 이 회사 주가는 개인정보 유출 사태 뒤 20% 가까이 하락했는데, 쿠팡의 조사 결과 발표 이후 첫 거래일인 지난 26일(현지시각) 전 거래일 대비 6.45% 상승 마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