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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일보 기자들이 직접 여러 사회 문제와 주변의 이야기를 젠더적 관점에서 풀어냅니다. '젠더, 공간, 권력' 등을 쓴 안숙영 계명대 여성학과 교수의 글도 기고로 함께 합니다. 게티이미지뱅크
게티이미지뱅크


"옛날 옛적에 마음씨 착하지만 가난해서 장가를 못 간 나무꾼이 산속에서 홀어머니를 모시고 살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나무꾼은 사냥꾼에 쫓기던 어린 사슴을 숨겨주었는데, 사슴은 나무꾼에게 보답으로 조언을 해줍니다. '연못에서 선녀들이 목욕을 할 때 선녀의 날개옷 하나를 감추고 아내로 맞으라'고요. 나무꾼은 사슴이 일러준 대로 옷을 감췄고, 하늘로 올라가지 못해 울고 있던 선녀를 집으로 데리고 와 아내로 맞이합니다."

어린 시절 누구나 읽어봤을 전래동화 '선녀와 나무꾼'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현대적인 관점에서 곰곰이 생각해보면 마음에 걸리는 부분이 한두 군데가 아닙니다. 우선 나무꾼을 '장가를 못 간 사람'이라고 설명하는 부분부터 그렇습니다. 결혼은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이며, 결혼을 하지 않은 상태는 결핍 또는 실패라는 암시가 담겨있습니다. 또 그 원인을 개인의 능력 부족(가난)이라고 간단히 서술하지요. 나무꾼의 어머니는 '홀어머니'라는 표현으로, 이야기 속에서 아들에게 희생을 요구하는 대상으로 나옵니다.

더 이상한 건 그다음입니다. 처음 보는 사슴마저 장가를 못 간 나무꾼을 안타깝게 여깁니다. 그리고 세 자매가 목욕하는 장면을 훔쳐보라고 권합니다. 나무꾼은 자신이 옷을 감췄다는 사실을 숨긴 채 울고 있던 선녀를 집으로 데리고 와 혼례를 올립니다. 결국 행복하게 살았으니 됐다고요? 아니요, 선녀는 옷을 되찾자마자 두 아이를 데리고 하늘로 떠납니다.

사실 우리가 익히 아는 전래동화들을 떠올려보면 이런 사례가 여럿 있습니다. 심청전도 그렇죠. 심청은 아버지를 위해 자신의 생명을 희생할 결심을 하고 공양미 300석에 상인들에게 몸을 팝니다. 연꽃에 담긴 심청이는 왕궁으로 '보내지고' 왕은 심청이의 아름다움과 희생정신을 보고 마음에 들어 심청이와 결혼하기로 '선택'합니다. 결국 '착한 딸은 참는다' '여성의 희생은 아름답다' '아름다운 여성이 남성에게 선택받는다' '좋은 결혼으로 보상받는다'는 메시지가 담겼죠. '바보 온달' 이야기는 어떨까요? 온달은 가난하고 행색이 초라한 데다 일자리를 찾지 못해 '무능한 남성'으로 간주됐고 이 때문에 '바보'로 불렸죠.

"모험 떠나는 여주인공 여전히 귀해"

한 어린이가 11일 부산 해운대구 벡스코 제1전시장에서 열린 2025 부산국제아동도서전에서 전시 중인 도서를 살펴보고 있다. 뉴스1
한 어린이가 11일 부산 해운대구 벡스코 제1전시장에서 열린 2025 부산국제아동도서전에서 전시 중인 도서를 살펴보고 있다. 뉴스1


그렇다면 현대 아동문학은 어떨까요. 전래동화처럼 노골적인 내용이야 많이 사라졌지만, 여전히 개선이 필요한 부분이 존재한다고 합니다. 특히 등장인물이 맡는 역할을 뜯어보면 그렇습니다. 김지은 서울예대 문예학부 교수는 논문 '성평등 관점에서 본 아동문학의 현황과 쟁점-성역할 고정관념을 중심으로'에서 "아동문학작품의 주인공을 여성 어린이가 맡는 경우는 여전히 낮다"면서 "모험 서사이거나 주인공이 적극적으로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경우는 더더욱 적다"고 비판했습니다. 겉으로는 칭찬처럼 보이지만 성차별을 전제한 표현도 많다고 합니다. "너는 여자아이치고 참 운동을 잘하는구나" "너는 남자아이인데 참 예쁜 옷을 입었구나" 등입니다.

그저 책일 뿐이라고요? 하지만 감수성이 예민하고 배운 내용을 잘 흡수하는 아이들에게 해석 없이 읽어주기에는 뭔가 걸리는 점이 있죠. 전래동화나 그림책과 같은 아동문학은 아이들에게 무엇이 정상이고 무엇이 예외인지를 조용히 가르치기 때문입니다. 누가 모험을 하고, 누가 돌보며, 누가 선택권을 갖는지에 대한 반복된 서사는 어느새 아이들 마음속 기준이 됩니다. 아동문학의 성평등은 특정한 가치나 이념의 문제가 아니라, 아이들에게 가능한 삶의 범위를 넓혀주는 문제에 가깝습니다.

김 교수는 "아동문학은 책 속의 어린이 인물을 성평등하게 그려냄으로써 어린이 마음속의 성역할 고정관념을 허무는 역할도 맡게 된다"고 했습니다. 어린 시절 읽는 책이 아이들의 가치관을 형성한다는 것입니다. 최근 주요 연구에 따르면 아동은 6, 7세 이전에 성역할 인식을 형성하고 반복노출된 서사가 진로와 자기 효능감에 영향을 미친다고 합니다.

산타 할머니는 왜 없나요?...아동문학 다시 쓰기



독서토론 모임 '구오'가 전래동화 10편을 성평등 관점에서 다시 쓴 책 '선녀는 참지 않았다' 표지. 위즈덤하우스 홈페이지
독서토론 모임 '구오'가 전래동화 10편을 성평등 관점에서 다시 쓴 책 '선녀는 참지 않았다' 표지. 위즈덤하우스 홈페이지


이렇다 보니 아동문학의 성평등을 고민하는 이들이 늘어났습니다. 최근 수원여성회에선 '성평등한 세상을 위해 권하는 그림책 가이드북'을 발간하기도 했습니다. 수원 여성회가 추천한 그림책 '산타 할머니'에선 산타가 되고 싶은 할머니가 산타 시험에 합격하기 위해 열심히 체력 단련을 하고 썰매 운전, 굴뚝 타기를 연습합니다. 할아버지는 음식을 만들고 청소를 하며 할머니의 꿈을 응원합니다. '인어를 믿나요'에선 '남자는 인어를 좋아하면 안 된다'는 성역할 때문에 인어를 좋아한다고 말하지 못하는 소년 줄리앙이 나옵니다.

전래동화 다시 쓰기를 통해 문제를 제기하려는 움직임도 있습니다. 제목부터 통쾌한 '선녀는 참지 않았다'가 대표적입니다. 선녀와 나무꾼을 비롯해 서동과 선화공주, 처용, 우렁각시, 장화홍련전, 콩쥐팥쥐전 등 전래동화 열 편을 재해석해 다시 썼습니다. 이 책에선 선녀들은 옷이 없어진 선녀만 두고 하늘로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함께 기다리고 있다가, 동태를 살피러 온 나무꾼을 혼내줍니다. 우렁각시전에는 우렁각시가 아닌 우렁총각이 등장합니다. 우렁총각은 요리를 무척 좋아했지만 매일 '사내가 뭐 하는 짓이냐'며 용왕에게 구박받다 뭍으로 떠나 비로소 자신의 요리실력을 기뻐해주는 아내를 만나 행복하게 삽니다.

유네스코는 아동 청소년을 대상으로 하는 출판물에 다음과 같은 내용을 검토해줄 것을 제안했습니다. △남·여 캐릭터 비율이 균형적인가 이야기 속 역할이 전통적 성역할에 묶여 있지 않은가 △주요 인물이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거나 선택하는가 △성중립적이고 포괄적인 표현을 사용하고 있는가 △가족·사회 속 역할이 성별 틀에 얽매이지 않는가 △그림에서 성별 역할이 고정되지 않고 다양한 문화·배경을 존중하며 성별을 포괄적으로 묘사하는가 등입니다.

아동문학의 성평등을 위해 노력하는 이들의 바람은 분명합니다. 수원여성회는 "여자라서, 남자라서 하면 안 되는 것이 아니라 하고 싶으면 누구든 다 할 수 있는 세상, 차별과 혐오가 없는 세상, 서로를 존중하는 세상을 보여주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남자아이든 여자아이든, 정해진 자리에 머무르지 않고 스스로의 이야기를 써 내려갈 수 있도록 말입니다. 동화가 그런 상상을 허락할 때, 아이들의 세계도 그만큼 넓어지지 않을까요.

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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