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항공 참사 1년] <하> 치유 위한 조건은
-美 항공안전 전문가 3명 인터뷰
-美 항공안전 전문가 3명 인터뷰
무안국제공항 제주항공 여객기 참사 현장에서 미국 국가교통안전위원회(NTSB)와 보잉사 관계자, 국토부 항공철도사고조사위원회가 참사 원인으로 지목되고 있는 로컬라이저(방위각시설)이 있는 둔덕에 올라 사고기체를 살피고 있다. 연합뉴스
“유족과 조사 당국 간 신뢰 형성의 성패는 사고 첫날(Day One)에 결정됩니다. 첫 단추를 잘못 끼우면 조사과정 전반에 가해지는 부담이 갈수록 커질 수밖에 없습니다.”
존 고글리아 전 미국 연방교통안전위원회(NTSB) 이사회 위원은 지난 21일(현지시간) 국민일보와의 화상 인터뷰에서 이같이 단언했다. 그는 “미국은 대형 참사 발생 시 즉각 조사 당국의 워싱턴DC 본부는 물론 전국 NTSB 사무소에서 인력을 투입하고, 초동 조사팀에 ‘유가족 지원 전담팀’을 반드시 포함시킨다”고 덧붙였다.
국민일보는 12·29 무안 제주항공 참사 1주기를 맞아 고글리아 전 위원을 비롯해 제프 구제티 전 미 연방항공청(FAA) 사고조사국장, 존 콕스 전 국제항공조종사협회(ALPA) 항공안전위원장 등 미국의 항공안전 베테랑 3인과 화상 및 서면 인터뷰를 진행했다. 고글리아 전 위원은 약 50년간 항공업계에서 활동한 항공안전 전문가로, 재임 중 1997년 대한항공 괌 추락사고 조사에 참여한 이력이 있다. 구제티 전 국장은 35년 이상 경력의 항공안전 전문가이며, 콕스 전 위원장도 US에어웨이스 기장 출신으로 항공안전의 다양한 자문을 맡아왔다.
전문가들은 미국의 유족 지원 시스템 역시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쳐 지금의 형태를 갖췄다고 설명했다. 구제티 전 국장은 “30년 이상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면 미국에서 발생한 대형 사고들은 대체로 유가족 요구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며 “그 과정에서 ‘이대로는 안 된다’는 사회적 공감대가 형성됐고, 결국 NTSB와 미 의회가 제도적 개선에 나서게 됐다”고 설명했다. 고글리아 전 위원은 “1996년 탑승자 230명 전원이 사망한 트랜스월드항공 800편 추락사고에서도 초기 혼선 탓에 끝내 모든 신뢰를 되찾지 못했다”고 말했다.
대표적인 전환점은 1994년 미국 펜실베이니아주에서 발생한 US에어 427편 추락사고였다. 탑승객 132명 전원이 숨진 이 사고에서 조사 당국과 항공사의 미흡한 소통은 유가족의 거센 반발을 불렀다. 당시 조사에 참여한 고글리아 전 위원은 “솔직히 말해 당시 우리는 유가족과의 소통을 정말 형편없이 했다”고 털어놨다. 이 같은 반성은 1996년 ‘항공재난가족지원법’ 제정과 NTSB 내 유가족지원전담조직(TDA) 신설로 이어졌다.
유족과 조사 당국 간 불신이 깊어질 경우 나타날 위험에 대한 경고도 이어졌다. 구제티 전 국장은 “유가족이 조사 당국을 공개적으로 비판하는 상황이 지속되면 조사 결과에 대한 국민적 신뢰가 흔들린다”고 말했다. 고글리아 전 위원도 “사안은 곧 정치 문제로 비화된다”며 “유가족은 정치권에 압박을 가하고, 정치인들은 기술적 전문성 없이 조사기관을 압박한다”고 말했다. 이어 “조사관들은 출구 없는 소용돌이에 빠지게 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무너진 신뢰 회복을 위한 해법을 두고는 전문가들의 방점이 달랐다. 고글리아 전 위원은 정서적 접근에 무게를 두며 “권한을 가진 책임자가 언론 발표에 앞서 유가족을 직접 만나 소규모로 설명하는 과정이 반복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반면 콕스 전 위원장은 “유가족의 기대는 현실적이어야 한다”며 “조종실 음성기록(CVR)을 제외한 모든 자료는 투명하게 공개돼야 하지만 방대한 자료 요구는 조사 절차 훼손의 위험성이 있다”고 지적했다.
세 전문가 모두 참사 원인 규명과 인도적 지원을 분리해서는 안 된다고 입을 모았다. 구제티 전 국장은 “조사와 병행되는 NTSB식 가족 지원의 법제화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고글리아 전 위원은 “조사가 본격화되기 전까지 유가족이 과정에 참여하고 있다고 느끼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콕스 전 위원장은 “사고 조사는 재발 방지를 위한 기술적 절차지만 이 과정이 유족들에게 제대로 설명되지 않으면 불신은 구조적으로 확대될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