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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지는 물가 괴리
통계와는 달리 물가가 계속 오르면서 살림살이가 팍팍해지고 있다. 사진은 서울의 한 대형마트에서 장을 보는 시민의 모습. [연합뉴스]
“물가가 안정됐다고 하는데, 대체 무슨 물가가 안정됐다는 건지 모르겠어요.” 서울에서 직장 생활을 하는 사회 초년생 김다혜(29)씨는 “점심 한 끼 가격이 1만원이 넘다 보니 일주일에 한두 번은 동료와 편의점 도시락을 먹는다”며 이렇게 말했다. 한 편의점 브랜드의 올해 1분기 도시락 주문 건수는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39% 급증했다. 물가 상승으로 ‘런치플레이션’(점심+인플레이션)이 심화하면서 도시락의 인기가 높아지고 있다는 게 편의점 측의 설명이다.
서울에 사는 직장인 박모(46)씨도 “분식점에서 김밥에 라면을 먹어도 7000원이 넘는다”며 “계산대 앞에서 멈칫할 정도로 주말에 장을 보러 가는 것도 무섭다”고 말했다. 이런 와중에 최상목 전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지난달 16일 국회에서 “윤석열 정부 3년간 물가가 안정됐다”고 말해 비난을 샀다.
내달 수도권 지하철 요금도 150원 올라
매달 정부가 발표하는 소비자물가지수(CPI)는 안정 흐름을 보이지만, 국민이 일상생활에서 느끼는 물가는 전혀 ‘안정’되지 않고 있다. 국제유가가 큰 폭으로 내리면서 CPI를 끌어내리고 있지만, 먹거리처럼 소비자가 가격 상승을 즉각 체감할 수 있는 품목은 여전히 상승률이 높기 때문이다. 여기에 올해는 그간 동결했던 대학 등록금까지 줄줄이 오르고 있다.
그래픽=정수경 기자 [email protected]
4월 CPI는 전년 대비 2.1%로 1월(2.2%)과 2월(2.0%), 3월(2.1%)에 이어 넉 달 연속 한국은행의 물가 목표(2%)에 근접했다. 겉으로는 안정돼 보이지만, 세부 항목을 들여다보면 전혀 다른 풍경이 펼쳐진다. 예컨대 가공식품 가격은 4.1% 오르며 2023년 12월 이후 16개월 만의 최대 상승 폭을 기록했고, 외식 물가도 3.2% 올라 13개월 만에 최고치를 경신했다. 국민의 ‘먹는’ 물가가 CPI 흐름과는 다르게 최고점을 경신하면서 체감 물가가 고공행진을 하는 셈이다.
실제 한국소비자원이 운영하는 ‘참가격’에 따르면 4월 서울 기준 김밥 한 줄 평균 가격은 3623원으로 전월보다 0.6% 상승했다. 같은 기간 칼국수는 9615원(1.6% ↑), 삼계탕은 1만7500원(0.9% ↑), 삼겹살(200g 기준)은 2만447원(0.8% ↑)으로 집계됐다. 주요 외식 메뉴 8개 가운데 5개의 가격이 한 달 만에 또 올랐다. 지난해 같은 기간과 비교하면 상승 폭은 더 크다. 서울에서는 김밥(4.4%)·자장면(3.4%)·칼국수(3%)·냉면(2.7%) 등 모든 품목이 지난해보다 비싸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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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탁 위 필수 반찬인 무(41%)·양파(17.5%)·깐마늘(37.7%)·계란(5.1%)의 가격 오름세도 꺾이지 않고 있다. 공산품도 마찬가지다. 올해 들어 원재료 가격 폭등과 운영비 증가 등을 이유로 생활 전반에 걸쳐 가격 인상이 이어지고 있다. 유통업계에 따르면 갈아만든배·코코팜포도·비락식혜·환타·파워에이드 등 음료 가격이 제품당 100~200원씩 줄줄이 올랐다. 이렇다 보니 생활필수품을 중심으로 작성하는 보조지표인 생활물가지수는 지난달 2.4%로 소비자물가지수(CPI)보다 상승률이 높았다.
‘먹는’ 것뿐 아니라 ‘사는’ 데 필수인 품목 역시 큰 폭으로 오르고 있다. 당장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나 음원, 생성형 인공지능(AI) 서비스 구독료가 줄줄이 오르고 있다. OTT 넷플릭스는 9일 오전 10시부터 광고형 멤버십 월 구독료를 5500원에서 7000원으로 인상했고, 투자금 회사에 나선 AI 서비스 업체도 올해 들어 구독료를 20~30% 올렸다. 전호겸 서울벤처대학원대학교 구독경제전략연구센터장은 “매달 내는 구독료는 큰돈은 아니지만 가정마다 2~3개의 구독 서비스를 이용하고 있는 만큼 구독료 인상은 부담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여기에 올해는 그간 동결해 온 대학 등록금마저 올랐다. 한국대학교육협의회가 발표한 대학정보공시 분석 결과에 따르면 4년제 대학 139곳 중 136곳이 등록금을 인상했다. 이는 지난해 26곳 대비 5배 이상 늘어난 수치다. 학생 1인당 연간 평균 등록금은 710만6500원으로, 전년 대비 4.1% 상승했다. 특히 사립대 등록금은 평균 800만2400원으로 4.9% 증가했고, 국공립대는 평균 423만8900원으로 0.7% 상승했다. 이 와중에 소비자가 실제 받는 임금은 물론 물가상승률을 반영한 실질임금이 반년 만에 다시 하락했다.
그래픽=정수경 기자 [email protected]
고용노동부에 따르면 올해 2월 기준 상용근로자 1인 이상 사업체 근로자 1인당 임금 총액은 411만7000원으로, 전년 동월 대비 5.4%(-23만4000원) 줄었다. 임금도 줄었지만, 물가수준을 반영한 실질임금은 2월 기준 354만7000원으로 전년 동월(382만4000원)보다 7.3%(-27만7000원) 감소했다. 김상봉 한성대 경제학과 교수는 “물가는 오르는 데 월급과 실질임금이 동시에 준 만큼 소비자가 느끼는 체감물가는 더 클 수밖에 없다”며 “정부가 더 면밀하게 물가를 관리해야 한다”고 말했다.
국민 10명 중 6명도 물가 안정을 최우선 민생 과제로 꼽았다. 한국경제인협회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최근 국민 1000명을 대상으로 민생 과제를 조사한 결과, 응답자 60.9%가 ‘물가 안정’을 첫손에 꼽았다. 특히 40대(63.5%)·50대(64.9%)는 물론 20대 이하에서도 57.2%가 물가 안정이 시급하다고 응답했다. 이상호 한경협 경제산업본부장은 “고물가와 경기 침체 장기화로 국민의 경제적 어려움이 가중되고 있다”며 “농산물 수입선 다변화, 유통구조 개선 등에 노력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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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앞으로다. 국제 유가가 지난해보다 큰 폭으로 내려 CPI는 안정세를 유지할 가능성이 크지만, 농·수산물이나 가공식품 가격은 계속 오르고 있기 때문이다. 정부가 최근 물가관계차관회의를 열고 추가경정예산(1200억원)을 활용해 농산물 할인 지원을 확대키로 하는 등 물가 안정 노력을 하고 있지만, 체감 물가를 잡기는 쉽지 않을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하다. 내수 부진 장기화에 미국의 관세 정책으로 물가 상승 압력이 커지고 있어서다.
실제 물가의 ‘기초 체력’으로 불리는 근원물가가 지난달 2.1% 상승했다. 2월(1.8%), 3월(1.9%)에 이어 석 달 연속 상승 폭이 커졌다. 근원물가는 변동성이 큰 농산물·석유류를 제외한 물가지표로, 상승 폭이 커지고 있다는 건 일시적 가격 변동이 아니라 구조적 인플레이션(물가 상승) 압력이 커졌다는 의미다. 한국은행의 향후 1년 기대인플레이션(소비자물가 상승률 전망치)도 지난달 3.7%로 나타났다.
국민 61% “물가 안정, 최우선 민생과제”
당장 다음 달부터는 수도권 지하철 요금도 오른다. 서울시와 경기도·인천시·코레일은 최근 운임 조정안을 확정하고, 교통카드 기준 기본요금을 1400원에서 1550원으로 150원 인상하기로 했다. 청소년 요금은 800원에서 900원으로, 어린이는 500원에서 550원으로 각각 조정된다. 전문가는 “생활비 전반에 걸친 물가 인상이 당분간 이어질 것”이라며 “특히 여름철 추가적인 식료품·에너지 가격 인상 가능성도 있다”고 내다봤다.
음료·교육비·대중교통 등 생활 필수 분야의 가격 인상이 동시다발적으로 이뤄지면 서민경제는 더 타격을 받을 수밖에 없다. 소비 품목별 가중치 등 물가 산정 방식에서 오는 체감물가와의 틈새를 최대한 줄일 방안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은희 인하대 소비자학과 교수는 “CPI는 평균적 지출 구조를 반영하기 때문에 실제 물가와 틈새가 벌어질 수밖에 없다”며 “하지만 정부가 국민에게 현실을 제대로 보여주기 위해서는 지표와 체감상 차이를 줄일 방안을 지속해서 연구해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