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훈 에이피알 대표. 한경DB
30대 중반의 나이에 1조원 이상의 자산을 보유하고 있고 ‘SKY 대학’을 졸업했으며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수백억원짜리 집을 사고 연예인 못지않은 외모를 보유하고 있는 ‘만찢남’이 있습니다. 이 만화 같은 프로필의 주인공은 에이피알의 김병훈 대표입니다.
김 대표는 재벌 2세도 아니고 코인으로 대박을 터뜨린 것도 아니었어요. 여러 번 창업을 한 끝에 2014년 세운 에이피알이 10여 년 만에 국내 최대 뷰티 기업으로 올라섰고 이 덕분에 김 대표도 성공의 결실을 거둔 것이었죠. 에이피알의 시가총액은 2025년 12월 26일 종가 기준 약 8조6000억원으로 7조원에 다소 못 미친 아모레퍼시픽이나 4조원 안팎인 LG생활건강을 크게 앞섰어요.
물론 단순히 운이 좋아 대박을 터뜨린 건 아니었습니다. 기존 뷰티 기업과는 전혀 달랐던 에이피알의 성공 신화는 어떻게 쓰여졌을까요. ◆7번의 실패에서 얻은 교훈김병훈 대표가 창업을 결심한 계기는 중학교 2학년 때 겪은 한 ‘사건’에서 비롯됐어요. 아버지가 사내 정치의 희생양으로 해고당한 뒤에 2년간 침대에서 일어나지 못하는 모습을 목격한 것이었죠. 실력과 관계없이 다른 사람에 의해 운명이 결정될 수 있다는 사실에 공포를 느낀 소년은 그때 결심했어요. “내 운명을 남의 손에 맡기지 않겠다”고요.
그러곤 창업을 결심했어요. 연세대 경영학과에 진학한 뒤 미국 교환학생 시절 곧장 창업 전선에 뛰어들었습니다. 하지만 현실은 냉혹했죠. 당시 김 대표는 ‘블루오션 전략’에 매몰돼 있었어요. 경쟁자가 없는 새로운 시장을 창출해야 크게 성공한다는 게 이 전략의 핵심이었어요.
김 대표는 알람 앱, 헌팅 앱 같은 서비스를 7개나 내놓으며 블루오션을 찾아 헤맸지만 처참하게 실패했어요. 그때 뼈아픈 교훈을 얻습니다. “블루오션이란 곳에 경쟁자가 없는 이유는 그곳이 노다지인 것이 아니라 소비자의 니즈가 없어 아무도 찾지 않는 텅 빈 바다이기 때문”이란 것을요.
김 대표는 이후 SNS 마케팅을 활용한 광고 대행업 시장에 뛰어들었어요. 마케팅 감각이 탁월했던 그는 맡은 제품의 매출을 폭발적으로 늘립니다. 하지만 문제가 하나 있었는데 첫 달 매출만 크게 늘었다는 겁니다. 정작 제품이 형편없어서 둘째 달부터 재구매가 끊기며 매출이 급락하는 현상을 목격하게 됩니다. 마케팅으로 사람을 모을 수는 있지만 결국 사람들을 다시 오게 만드는 건 제품의 본질이란 큰 깨달음을 얻게 됐어요.
그는 남의 제품을 홍보할 게 아니라 직접 제품을 만들어 보겠다며 2014년 에이피알을 설립합니다. 첫 아이템인 천연비누 ‘매직스톤’이 대박을 터뜨렸어요. 매직스톤은 숯과 진주 가루 같은 천연 성분을 담아 만든 검은색 수제 비누였는데 단순히 성분이 좋아서 뜬 건 아니었어요. 젊은 세대의 가장 큰 피부 고민인 ‘모공 관리와 블랙헤드 제거’에 탁월한 효과가 있다는 식으로 마케팅을 한 게 주효했어요. 특히 검은색 비누가 내뿜는 하얀 거품이 피부 노폐물을 씻어내는 강렬한 시각적 대비는 그 자체로 훌륭한 마케팅 소재가 됐어요.
당시 막 태동하던 페이스북의 ‘동영상 광고’ 기능을 십분 활용했어요. 기존 대기업들이 하던 예쁘고 화려한 광고가 아니라 실제 비누를 써서 화장이 지워지거나 모공이 깨끗해지는 과정을 여과 없이 보여주는 ‘리얼한’ 리뷰 영상을 올렸어요. 이 영상들이 SNS에서 빠르게 공유되면서 매직스톤은 ‘페이스북 비누’로 불리며 출시 1년 만에 100만 개 넘게 팔려나갑니다. 첫해 2억원이었던 회사 매출은 이듬해 120억원으로 껑충 뛰었고요.
◆뷰티 디바이스와 화장품의 시너지에이피알이 오늘날 뷰티 부문 시총 1위 기업으로 도약할 수 있었던 결정적인 한 방은 ‘뷰티 디바이스’였어요. 뷰티 디바이스는 쉽게 말해 ‘집에서 쓰는 피부과 기기’, 즉 가정용 미용기기를 말합니다.이전까지의 K뷰티가 좋은 성분을 피부에 바르는 화장품의 영역에 머물러 있었다면 뷰티 디바이스는 전기 자극이나 빛, 초음파 같은 물리적인 기술을 이용해 피부 고민을 더 근본적으로 해결하려는 하드웨어의 영역입니다. 비싼 돈을 내고 피부과에 가거나 에스테틱 숍에서 관리를 받는 대신 화장대 앞에서 버튼 하나로 그에 준하는 효과를 누리게 해주는 ‘손 안의 피부과’를 구현한 것입니다.
사실 가정용 미용기기는 그 이전에도 있었어요. LG전자 ‘프라엘’이 대표적이었죠. 하지만 인기는 오래가지 못했어요. 100만원을 넘은 비싼 가격과 무거운 무게, 그리고 무엇보다 ‘과연 이게 효과가 있는 걸까’ 하는 소비자의 의구심을 넘지 못했기 때문이죠.
하지만 에이피알의 메디큐브 에이지알은 달랐어요. 가격을 20만원에서 40만원대로 설정해 진입장벽을 대폭 낮췄고 한 번만 써도 피부가 쫀쫀해지는 느낌을 시각적으로 전달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뷰티 디바이스가 잘 팔리자 화장품 매출도 폭발적으로 늘었어요. 뷰티 디바이스는 한 번 팔면 끝나는 하드웨어가 아니라 이 회사 화장품 브랜드를 계속해서 쓰게 만드는 ‘강력한 락인 장치’가 됐거든요. 기기의 효능을 극대화하려면 전용 젤이나 기초화장품이 필수적인데 디바이스를 구매한 고객은 자연스럽게 메디큐브의 화장품을 샀어요.
에이피알은 전통적인 화장품 기업과 달리 생산도 직접 하지 않았어요. 한국콜마, 코스맥스 같은 세계 최고 수준의 ODM(제조자개발생산) 인프라를 활용했습니다. 제조는 전문가에게 맡기고 자신들은 가장 자신 있는 분야인 ‘마케팅과 바이럴’에 집중한 겁니다.
에이피알 매출 대비 광고선전비 비중은 약 20~30%에 달해요. 작년 상반기 기준 광고선전비와 판매수수료로만 1822억원을 썼어요. 이건 전체 매출의 30.7%에 달하는 금액이에요. 기존 대기업의 이 비율이 대략 10% 안팎인데 그 세 배나 하는 공격적인 수치입니다. ◆해외 매출 비중 80% 육박 에이피알의 압도적인 성장은 처음부터 ‘글로벌’이이란 시장을 겨냥했기에 때문에 가능했어요.
김병훈 대표는 회사 설립 초기부터 해외의 문을 두드렸어요. 미국에선 아마존을 중심으로 온라인에 우선 집중했어요. 작년 아마존 프라임 데이에서 메디큐브의 ‘제로 모공 패드’와 ‘부스터 프로’가 스킨케어, 뷰티 디바이스 부문 1위를 휩쓸었어요. 아마존 판매 10위권 내에 에이피알 제품이 4개나 이름을 올릴 정도였습니다.
이를 바탕으로 2025년 8월에는 미국 최대 뷰티 유통망인 얼타뷰티 약 1400개 매장에 입점하며 오프라인 시장까지 빠르게 확장했어요.
일본에서도 디지털 네이티브 세대의 소비 패턴을 파고들었어요. 일본 최대 온라인 할인행사인 큐텐 재팬의 ‘메가와리’에서 에이피알 제품은 엄청난 인기를 끌었어요. 2025년 3분기 메가와리에서만 약 250억원의 매출을 올렸어요. 일본 특유의 꼼꼼한 소비자들에게 ‘피부과에 가지 않아도 되는 효능’을 SNS로 입증해 보인 것이 결정적이었요.
이런 성공의 중심에는 MZ세대와의 소통 방식이 있었어요. 디지털에 익숙한 젊은 세대는 단순히 브랜드의 명성보다 SNS 인플루언서의 리뷰를 많이 참고해요. 에이피알은 틱톡과 인스타그램을 통해 뷰티 디바이스의 효과를 시각적으로 잘 보여줬어요. 여기에 K팝이나 ‘케이팝 데몬 헌터스’ 같은 콘텐츠의 인기까지 더해져 그 효과가 더 극대화됐습니다.
에이피알의 매출은 설립 4년 만인 2018년 1000억원을 달성했고 2023년에는 매출 5000억원과 영업이익 1000억원을 넘겼어요. 2025년에는 처음 매출 1조원대, 영업이익 3000억원 이상을 거둔 것으로 추산됩니다. 이 가운데 해외 매출 비중은 2023년 39.2%에서 2025년 2분기 기준 78%까지 치솟았어요.
증권사 애널리스트들은 에이피알이 뷰티 디바이스라는 독보적인 카테고리를 선점한 데다 아마존과 얼타뷰티 등 온·오프라인 투트랙 전략이 안착했기 때문에 2025년 연간 영업이익 3000억원, 2026년에는 5000억원을 넘어설 것이란 낙관적인 전망을 내놓고 있죠.
에이피알은 단순한 뷰티 기업을 넘어 데이터 플랫폼으로 진화하고 있어요. 수백만 대가 팔려나간 뷰티 디바이스를 통해 수집된 전 세계 고객의 피부 데이터는 그 어떤 대기업도 가질 수 없는 에이피알만의 강력한 해자가 되고 있어요.
해외시장 개척도 긍정적입니다. 미국과 일본에서의 성공을 발판 삼아 이제 유럽과 동남아시아 시장 진출을 본격화하고 있습니다. 유럽에서는 프랑스, 영국 등 전통적인 뷰티 강국을 중심으로 ‘홈 뷰티 테크’란 새로운 카테고리를 선점하고 있어요. 동남아에서도 베트남과 태국 등 K컬처의 영향력이 막강한 국가들을 중심으로 빠르게 성장하고 있고요.
설립된 지 갓 10년을 넘긴 에이피알이 10년 후에는 얼마나 더 성장해 있을지 이제는 가늠조차 되지 않습니다. 김 대표의 집념과 패러다임의 전환이 다음 10년에도 똑같이 작동한다면 에이피알은 지금보다 100배 더 성장해 세계인의 화장대를 지배하는 ‘뷰티계의 애플’이 되어 있지 않을까요.
안재광 기자
이홍표 기자 [email protect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