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카이 긴겔(Skye Gyngell, 1963.9.6~ 2025.11.22)
영국에서 활동한 호주 출신 요리사 스카이 긴겔은 수확한 채소의 절반 가까이가 너무 작거나 커서, 또 예쁘지 않아서 음식이 되기 전 버려지는 현실에 반기를 든 선구적 셰프 중 한 명이다. 제철 식재료의 중요성과 공정 거래의 가치가 거의 언급조차 되지 않던 2000년대 초 그는 런던 교외의 한 농장 한편에 작은 식당을 열어 '슬로푸드'의 철학을 담은 음식을 선뵈기 시작했고 8년 뒤 "미슐랭 역사상 가장 허름한 식당" 셰프로서 미슐랭 스타를 획득했다. 미슐랭 가이드는 2020년 '미슐랭 그린 스타'라는 새로운 인증 분야를 만들었다. 런던 레스토랑 '스프링' 시절의 긴겔. springrestaurant.co.uk
2010년 9월 발간된 ‘2011년판 미슐랭 가이드 그레이트브리튼 앤 아일랜드’의 미슐랭 스타 식당(총 143곳) 가운데 3스타를 받은 곳들 못지않게 뜨거운 갈채와 관심을 받은 식당이 있었다. ‘텔레그래프’가 “미슐랭 역사상 가장 허름한(the most ramshackle) 미슐랭 스타 식당일 것”이라고 소개한 ‘피터샴 가든 카페(Petersham Nurseries Café)’였다.
한 사업가가 런던 남서부 리치먼드(Richmond)의 18세기 장원을 매입해 정원과 온실, 농장 등을 조성한 일종의 콘셉트 공간인 ‘피터샴 하우스’의 묘목장과 온실 일부를 개조해 2004년 문을 연 작은 식당. 이케아(IKEA) 식탁과 의자들은 고르지 않은 흙바닥 위에서 예사로 건들거리고, 정장 차림의 매니저나 서버(server)도 없고, 창고를 고쳐 만든 화장실에는 난방 시설도 안 돼 있는 곳이었다.
이채로운 건 메뉴였다. 자체 농장에서 무농약-유기농으로 재배한 제철 허브와 채소, 식용 꽃으로 만든 애피타이저와 디저트에 리소토나 간단한 해산물 요리를 메인으로 한 소박한 식단. 좋은 재료와 계절성, 단순하지만 우아한 테이블링을 표방한 그 식당이 화려하고 창의적인 미식에 길들여진 미슐랭 평가원들의 까다로운 입맛과 평가 기준을 충족시킨 거였다. “12월에도 고든 램지의 메뉴에 파인애플과 스트로베리, 아스파라거스가 버젓이 포함되던 시절”이었다.
당시 만 47세 호주 출신 요리사 스카이 긴겔(Skye Gyngell, 1963.9.6~ 2025.11.22)이 2004년 개업해 “그날그날 농장에서 영감을 얻어 당일 주요 식재료와 메뉴”를 정하던 식당이었다. 미슐랭 스타 선정 직후 인터뷰에서 그는 “(고객들이 마법이라 부르는 우리 요리의) 비밀은 좋은 재료를 함부로 다루지 않고, 재료 본연의 맛을 극대화하는 것뿐”이라고 말했다. 식당은 개업 8년 만에 비로소 흑자를 내기 시작했다.
1년여 뒤인 2012년, 긴겔은 그 식당을 떠났다. 오너셰프가 되려던 것도, 더 나은 조건으로 다른 데 스카우트된 것도 아니었다. ‘미슐랭 이후’의 변화 즉, 쇄도하는 고객들의 요구와 버거운 기대에 진저리가 난 거였다. 그는 미슐랭 스타를 일종의 ‘저주’였다고, “내가 다른 식당을 운영하게 되더라도 미슐랭 스타는 결코 받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그는 2014년 새로운 투자를 받아 런던 서머싯하우스에 이전과는 인테리어와 규모 등 모든 면에서 사뭇 딴판인 정통 고급 레스토랑 ‘스프링(Spring)’을 열었다. 거기서도 그는 파인다이닝 식당들이 채소 등을 손질하면서 버리는 ‘음식물 쓰레기’들을 활용한 ‘스크래치(Scratch)’란 코스 메뉴를 선뵀고, 2018년부터는 400에이커 규모의 농장을 갖춘 햄프셔의 ‘헥필드 플레이스(Heckfield Place)’ 내 레스토랑 두 곳(Marle, Hearth)의 총괄 셰프(culinary director)를 맡았다.
그는 2024년 악성 피부암으로 수술-화학치료를 받고 미각과 후각 대부분을 잃은 뒤에도 ‘슬로푸드(Slowfood)’로 통칭되는 자신의 요리 철학을 고수하며 영국과 유럽 파인다이닝 업계에 새로운 바람을 일으켰고 수많은 셰프로 하여금 음식-요리의 진정한 가치를 고민하게 했다. 셰프(chef)란 위계적 명칭보다 조리사(cook)라 불리길 원했던 자칭 “둔한 조리사(non-technical cook)” 긴겔이 별세했다. 향년 62세.
호주 유력 방송인 집안에서 태어난 긴겔은 10대 때부터 부모의 과도한 기대와 압박에 시달리며 방황했고, 19세 때 부모의 반대를 무릅쓰고 대학을 중퇴한 뒤 프랑스 파리 요리학교에 진학했다. 그는 가족과 불화하며 거의 연락조차 하지 않고 지내다가 2000년 아버지 사후에야 가족과 화해했다. 유년시절의 그와 아버지 브루스. 가족사진
호주 출신인 긴겔은 시드니대 법학과를 중퇴한 뒤 19세 때 프랑스 파리로 건너가 ‘에콜 드 퀴진 라 바렌(La Varenne)’에서 요리 공부를 시작, 파리와 런던 등지의 여러 미슐랭 레스토랑에서 10년가량 (보조) 셰프로 수련했다. 아버지(Bruce Gyngell)는 호주의 전설적인 방송(경영)인이었고, 어머니(Ann Barr) 역시 미모의 저명 인테리어 디자이너였다.
그가 요리를 익히던 80, 90년대는 이탈리아 출신 푸드 칼럼니스트 겸 사회운동가 카를로 페트리니(Carlo Petrini)의 ‘슬로푸드’ 운동이 새로운 화두로 부상하던 시기였다. 86년 로마 스페인 광장에 패스트푸드의 대명사 격인 ‘맥도날드’ 매장이 들어선 게 못마땅해 이탈리아 음식문화의 전통과 자존심을 지키자는 국수적 문화운동을 시작한 그는 80년대 말부터 “맛있고(Good), 신선하고(Fresh), 환경-윤리적으로 공정한(Fair) 식재료 생산-소비”를 기치 삼아 그 운동을 국제적인 풀뿌리 운동으로 확산시켰다.
시드니 시절부터 부모의 이른바 ‘매크로바이오틱 식단(Macrobiotic Diet)’ 즉 채소를 씨앗과 뿌리, 껍질 줄기, 잎까지 통째(一物全体)로 먹고, 유기농 제철 식재료를 찾아 먹는 건강 식단에 익숙했던 그에겐 식재료의 상당 부분을 깎고 도려내고 버리는 파인다이닝 요리-플레이팅(plating)이 점차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미슐랭 스타 셰프 휘하의 ‘브리게이드 드 퀴진(Brigade de Cuisine)’ 즉 군대식 주방 위계의 바닥에 있던 그에게 슬로푸드 철학은 아득한 이상일 뿐이었다.
80년대 말 파리의 3스타 레스토랑 ‘뤼카 카르통(Lucas Carton)’에 사표를 낸 그는 프리랜서로서 저명 요리 연구가 나이젤라 로슨(Nigella Lawson), 사치 갤러리 오너인 광고 재벌 찰스 사치(Charles Saatchi), 팝스타 마돈나 등의 개인 셰프로 일하며 패션 잡지 ‘보그(Vogue)’의 음식 에디터 겸 칼럼니스트(1994~2003)로 글을 썼다. 현장에서 시도하지 못한 슬로푸드 철학, 어쩌면 좌절감을 그는 그렇게 해소하고자 했다.
성장기 그의 삶은 썩 행복하지 못했다고 한다. 장녀의 세속적 성취를 중시했던 부모, 특히 방송-언론계 명사였던 아버지의 기대와 주문에 시달리며 그는 10대 때부터 술과 헤로인 등 약물에 손을 댔다. 미모의 어머니와 대비되는 주근깨투성이 얼굴도 낮은 자존감의 원인이었다고 한다. 대학을 중퇴하고 요리를 배우겠다던 딸을 못마땅해하던 부모는 긴겔이 식당마저 그만두자 거의 인연을 끊다시피 했고 그는 다시 알코올과 약물에 의존했다. 89년 결혼한 남편과 96년 이혼하면서 딸을 둔 싱글맘으로서 생활고도 겪어야 했다. 그는 2000년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뒤 가족과 화해하고 어렵사리 알코올과 약물을 끊었다. 지인이던 피터샴 하우스 주인 부부의 제안에 응해 ‘피터샴 가든 카페’를 연 게 그 무렵이었다.
정통 파인다이닝 레스토랑 '스프링'에서 선뵌 긴겔의 메뉴들. 가운데 사진은 그의 첫 레스토랑인 '피터샴 가든 카페' 의 최근 내부 모습. 아래 가운데 사진은 헥필드 하우스 총괄 셰프로서 스태프들과 농장 주변을 산책하는 모습, 2023년 3월 헥필드 하우스에서 열린 제철 농산물 '홈 팜 디너'를 주재하는 그(아래 오른쪽). 인스타그램 @skyegyngell, petershamnurseries.com
10명이 둘러앉을 수 있는 테이블 하나 달랑 두고 점심때만 문을 여는 식당. 가구와 식기, 커틀러리 등은 모두 헐한 이케아 제품이었고, 냄비와 팬 등 조리도구는 대부분 그가 집에서 쓰던 거였다. LPG 용기에 가스레인지를 연결한 간이 조리실에서 한 친구(Rachel)와 둘이서 주문받고 요리하고 테이블을 닦던 일상. 그는 몇 달 못 버틸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런던 교외, 지도에도 안 나오는 비포장길 끄트머리에 있는 레스토랑에 누가 올지, 식당이 있다는 걸 알아주기나 할지 스스로도 의문스러웠다.” 그들은 개업 첫날 72파운드 매상에 감격해했다.
하지만 그의 식당은 여러 매체의 긍정적인 리뷰와 손님들의 입소문을 타면서 조금씩 유명해졌다. 미슐랭 스타를 획득하던 무렵 식당은 창고를 헐어 만든 제대로 된 조리실에 10명의 셰프를 두고, 인근 온실 등으로 홀을 넓혀 최대 120명까지 동시 수용할 수 있는 어엿한 레스토랑이 돼 있었다. 여느 수석 셰프들처럼 재료 손질에서부터 소스 하나하나까지 까다롭게 따지던 그였지만, 와인 페어링만큼은 소믈리에에게 일임했다. 그는 2000년 이후 숨질 때까지 술은 일절 입에 대지 않았다.
미슐랭 스타를 받은 직후부터 예약 전화가 쇄도했다. 그와 스태프들은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졌고 식당은 개업 8년 만에 비로소 흑자를 냈다. 드레스 코드를 묻는 예약자도 있었다. 그는 “반바지를 입고 애완견을 데리고 와도 된다”고 말했다고 한다.
하지만 ‘미슐랭’다운 격식과 품위, 이색적인 미식을 기대하고 왔다가 창고나 다를 바 없는 인테리어와 화장실 설비 등에 실망해 낯을 붉히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그가 미슐랭 스타를 “저주(curse)였다”고 처음 말한 게 그 무렵인 2011년 7월 ‘시드니 모닝 헤럴드’ 인터뷰에서였다.
긴겔과 피터샴 카페의 인기는 ‘슬로푸드’ 운동의 확산과 더불어, 영국과 유럽 파인다이닝 업계의 새로운 유행, 즉 키친가든 운영과 메뉴판 원산지-농장 표기 붐으로 이어졌다. 그를 스타 셰프로 만들어주겠다며 방송 출연이나 고정 프로그램 편성 등을 제안하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아버지에 이어 호주 방송계 거물로 자리 잡은 남동생의 삶을 지켜본 그로서는 그게 어떤 유혹인지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나는 명성도 인기도 원치 않는다. 빌어먹을(bloody) 카메라 앞에서 몇 시간씩 같은 짓을 반복하는 것도 싫다.(…) 그 시간을 주방이나 농장에서 보내면 늘 많은 걸 배우게 된다”고 했고 “나는 가난이 뭔지도 안다. 고용 셰프로 오래 일했고, 싱글맘으로서 어린 딸과 방 한 칸짜리 집에서 동전 하나까지 헤아리며 구운 감자에 치즈를 얹어 끼니를 때운 적도 많다. 사실 그것도 무척 맛있다”고도 했고 “나는 더 바랄 게 없다. 사는 데 불만투성이인 내가 아는 몇몇은 모두 대단한 부자들”이라고도 했다. 그는 명성을 앞세워 조리도구나 소스 등을 파는 이름난 셰프들을 넌지시 비아냥대기도 했다.
그는 청소년 시절부터 피부암을 앓았다. 여기저기 받은 암세포 절제술에다 조리 도중 입은 부상 흔적까지 겹쳐 그의 팔다리와 몸통은 흉터투성이였다고 한다. 2011년 인터뷰도 눈 주변으로 번진 암세포 제거 수술을 받고 실밥조차 뽑기 전에 이뤄진 거였다. 자칭 일 중독자였던 그는 습도 높은 곳 근처에는 당분간 가지 말라는 의사 처방이 없었다면 인터뷰에도 응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10대 때부터 알코올과 약물에 의존했던 긴겔은 80년대 말 프리랜서 셰프 겸 음식 칼럼니스트로 일하며 다시 헤로인에 중독됐다가 2000년 무렵 그 수렁에서 벗어났다. 그에게 요리-음식은 생계나 자기실현의 방편이 아니라 더 근원적인 삶-생명의 힘이었다. 술과 약물을 끊던 무렵인 2020년 7월의 그. 인스타그램 @skyegyngell
2014년 런던 서머싯하우스 내 레스토랑 ‘스프링’은 긴겔의 새로운 도전이었다. 고풍스러운 옛 국세청 사옥을 리모델링해 문을 연 스프링은 최고급 인테리어에 26명의 셰프가 진토닉에 쓸 토닉까지 직접 만드는, 긴겔이 꿈꾸던 정통 레스토랑이었다. 그는 2년 뒤 뿌리채소의 잎과 과일 껍질, 버터 부산물인 버터밀크 등 대다수 레스토랑이 ‘음식물 쓰레기’로 분류하는 식재료들을 활용, 지금도 대표 메뉴 중 하나로 자리 잡은 ‘스크래치’란 코스 음식을 개발했고, 2019년엔 모든 일회용 플라스틱 제품 추방을 선언했다. 2018년부터 400에이커 면적의 농장을 갖춘 햄프셔의 5성급 숙박시설 헥필드 플레이스 내 두 곳의 레스토랑 총괄 셰프까지 맡아 함께 이끌었다. 한 일간지가 “스프링의 시골 사촌 버전”이라고 불렀던 두 곳 중 ‘마를(Marle)’은 2022년 ‘미슐랭 그린 스타’를 획득했다. 클로바 문양의 ‘그린 미슐랭’은 환경과 공정성 등에 기반해 ‘지속가능한 미식’을 성공적으로 실천한 레스토랑에 미슐랭 가이드가 2020년부터 부여해온 새로운 인증이다.
빈곤국에 제공한 구호물자가 현지 산업 기반을 와해시키는 등 선한 의도로 행한 일이 나쁜 결과를 낳는 현상을 일컫는 ‘선의의 역설(The Goodness Paradox)’은 슬로푸드 운동에도 적용될 수 있다. 슬로푸드의 ‘느림’이 여유로운 이들의 문화적 특권일 수 있기 때문이다. ‘착한 소비’의 심리적 만족감은 경제적 약자의 죄의식 위에서 번성하며 대개의 풀뿌리 운동은 선한 의도의 확산에 기여하는 한편 구조적-제도적 원인과 책임을 개인에게 전가하는 문제점도 지닌다. 자체 키친가든이 없던 ‘스프링’의 농산물 식재료는 해리퍼드셔 블랙마운틴의 '펀 베로(Fern Verrow)' 농장에서 전적으로 조달받았다. 농장 전체를 순환유기체로 보고 토양의 활력과 작물의 건강을 극대화하는 이른바 생물역동 농법(Biodynamic Farming)으로 유명한 그 농장의 채소와 허브, 과일 가격은 일반 유기농 농산물보다도 1.5~3배가량 비싼 것으로 알려져 있다.
긴겔과 그의 레스토랑들은 영국 노숙자 지원 프로젝트인 ‘스트리트 스마트(StreetSmart)’와 음식물 쓰레기 감축을 통한 음식 재분배 자선단체인 ‘펠릭스 프로젝트(The Felix Project)’의 원년 멤버였다.
긴겔은 2006년 자신의 요리 철학과 사계절 레시피 등을 담은 ‘내 부엌에서의 일 년(A Year in My Kitchen)’ 등 4권의 책을 썼다. 첫 책과 2011년 출간한 ‘나의 요리법(How I Cook)’은 영국의 권위 있는 식음료 관련 문학상인 ‘앙드레 시몬 어워드’를 수상했다. 그는 2006년부터 약 5년간 일요판 인디펜던트 푸드 칼럼니스트로도 활약했다.
2024년 4월 그는 무척 공격적인 희소 피부암인 메르켈 세포암(Merkel cell carcinoma) 진단을 받고, 9시간여 동안 침샘과 주변 림프절 수십 개를 절제하는 수술을 받았다. 미각과 후각을 영영 잃을 수도 있다는 수술 전 의사의 말에 그는 처음 울었다고, 2025년 5월 파이낸셜타임스 에세이(인터뷰 대필)에 썼다. “내 일에 지장을 받게 돼서 운 게 아니었다.(...) 나를 슬프게 한 건 다시는 음식을 즐길 수 없을지 모른다는 거였다. 잘 익은 여름 복숭아를 다시는 맛볼 수 없다는 사실… '미각을 잃는다면, 나는 누구인가?'”
“설탕 한 스푼을 넣은 차 맛이 설탕을 스무 스푼쯤 들이부운 것 같”던 그의 미각과 후각은 아예 사라졌다가 조금씩 서서히 회복되기 시작했다. 그는 ‘조언자’로서 주방에 복귀해 올해 ‘첼시 플라워쇼’ 미식 체험 행사를 이끌 계획을, 또 “얼마 전 먹은 화이트 트러플 파스타의 환상적인 맛”을 그 에세이에 자랑했다. “어쩌면 내 미각은 또 바뀌어 1년 뒤면 완전히 달라져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은 그저 예전 미각을 되찾았다는 사실만으로도 무척 행복하다.”
'지난 여름 날'이란 글과 함께 2025년 10월 9일 긴겔이 올린 인스타그램 마지막 사진. 악성 피부암 치료로 감각을 잃어가던 말년의 그(가운데)는 셰프로서의 그 어떤 가치나 철학보다 미각-맛 자체를 한사코 붙잡고자 했다. 인스타그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