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애리 연탄은행 홍보대사
배우 정애리(66)에게는 두 개의 이름이 있다. 드라마 속에서는 타인의 삶을 연기하는 배우지만 카메라 밖에서는 22년째 검은 연탄재가 날리는 가파른 언덕길을 오르는 밥상공동체·연탄은행 홍보대사다. 그는 최근 서울 여의도의 한 카페에서 국민일보와 만나 20년 넘게 나눔을 이어가는 원동력으로 ‘가족’을 언급했다.
정 대사는 가족의 울타리를 혈연에만 가두지 않았다. 과거 직접 집을 얻어 오갈 데 없는 이들과 함께 사는 ‘그룹홈’을 운영하기도 했다. 정 대사는 “내 울타리 안 사람만 챙기는 것이 아니라 같이 살아가는 세상이 다 가족”이라며 “하나님 안에서 우리가 모두 한 지체인데, 추위에 떠는 또 다른 가족을 외면할 수는 없다”고 말했다.
정 대사는 인터뷰 내내 ‘돕는다’는 표현을 경계했다. 그는 “돕는다는 건 내가 남보다 위에 있을 때나 쓰는 말인데, 그런 위치에 있는 분은 하나님뿐”이라며 “하나님은 제게 특별히 긍휼의 마음과 더불어 생각보다 몸이 먼저 움직이는 성실함을 달란트로 주셨다. 그저 그 재능을 사용해 내가 가진 것을 나눌 수 있었다”고 말했다.
그는 과거 난소암 투병으로 생사의 고비를 넘나들었고, 2019년 드라마 ‘사랑의 불시착’ 촬영 당시에는 대형 교통사고로 갈비뼈 6대가 부러지는 중상을 입었다. 정 대사는 “내가 아파보니 몸 약한 사람들이 얼마나 서러운지 뼛속 깊이 알게 됐다”며 “나의 이 아픔조차 타인의 고통을 머리가 아닌 몸으로 이해하게 하는, 하나님이 주신 또 다른 달란트라고 생각한다”고 고백했다.
그는 1978년 무용을 전공하다 잠시 쉬던 중 셋째 오빠가 재미 삼아 방송국에 낸 원서가 덜컥 당선되면서 연예계에 발을 들였다. 촬영장은 즐거웠지만 기쁘지는 않았다. 밤새 촬영하고 웃고 떠들었지만 문득 ‘도대체 이게 무슨 의미가 있지, 사는 게 뭐지’라는 질문이 떠나지 않았다. 그렇게 스스로 교회를 찾았고 말씀을 들으며 평안을 얻었다.
신앙이 깊어지면서 봉사는 삶의 일부가 됐다. 89년 드라마 촬영차 우연히 방문했던 보육원 ‘성로원’을 잊지 않고 다시 찾은 것이 시작이었다. 처음엔 자신이 하는 봉사가 ‘연예인의 생색내기’로 비칠까 두려워 8년 동안이나 아무도 모르게 숨어서 아이들을 찾았다. 하지만 그는 곧 유명세에 담긴 하나님의 뜻을 깨달았다.
정 대사는 “하나님이 저를 대중 앞에 세우신 건 유명세를 도구 삼아 세상 그늘진 곳을 비추라는 뜻”이라며 “이것이 제가 감당해야 할 사랑의 수고”라고 말했다. 이어 “사실 거창한 의무감보다 저는 그냥 그 나눔의 현장 자체가 좋다. 아이들과 뒹굴고 연탄을 나르는 그 시간 자체가 제게는 기쁨”이라며 웃었다.
그는 큰 구호 단체의 손길이 닿지 않는 사각지대를 메우려 사단법인 ‘더 투게더’를 직접 설립하기도 했다. 정 대사는 “연탄은행이나 월드비전 같은 큰 단체가 우리 사회 동맥이라면 우리 조직은 아주 작은 곳까지 피를 돌게 하는 모세혈관 역할”이라며 “누군가는 해야 하지만 아무도 하지 않는 빈틈을 찾아 메우는 것이 내 역할”이라고 강조했다.
정애리 연탄은행 홍보대사가 2010년대 초반 서울 노원구 백사마을에서 연탄 리어카를 끌고 있다. 연탄은행 제공
22년 연탄봉사 세월은 그에게 기쁨인 동시에 아픔이다. 처음에 만났던 달동네 어르신들은 해가 갈수록 쇠약해지고, 재개발로 마을이 사라지며 남겨진 이들 삶은 더욱 고립됐다. 그는 “어르신들 댁에 가면 그 없는 살림에도 꼬깃꼬깃 아껴둔 사탕 하나, 요구르트 하나를 제 손에 쥐여주신다”며 “뭐라도 나누려고 하면 제가 더 많이 받고 돌아온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정 대사는 올해 연탄은행 후원금이 예년 절반 수준으로 급감한 현실을 깊이 우려했다. 그는 “궁극적으로는 연탄은행도 월드비전도 필요 없는 세상이 왔으면 좋겠다. 모두가 잘 살아서 우리가 필요 없어지는 날이 오는 게 꿈”이라며 소망을 내비쳤다. 그러면서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기에 어쩔 수 없이 해야 한다면 ‘잘’ 해야 한다. 하나님이 ‘그만해’ 하실 때까지, 저는 이 빈틈을 메우는 가족으로 살 것”이라고 다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