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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ver Story
숲과나눔 글로벌 프로젝트 ‘국제 풀씨’

그래픽=문유비
“신생 단체도 신청할 수 있나요?” “분쟁 지역인데 지원해도 괜찮나요?” “작은 섬나라도 자격이 될까요?”

매년 3월 숲과나눔의 ‘국제 풀씨(Global Seed Grant·이하 GSG)’ 공고가 뜨면 재단 메일함은 금세 꽉 차버린다. 나이지리아·케냐·필리핀 등 익숙한 나라뿐 아니라 베냉·모리타니아·마다가스카르 등 생소한 국가에서도 높은 관심이 쏟아진다.

GSG는 재단법인 숲과나눔이 2020년부터 운영하는 글로벌 시민 아이디어 지원 프로그램이다. 작은 단체들 사이에서 GSG는 빠르게 입소문을 탔다. 지난 3월 숲과나눔이 페이스북에 올린 6기 모집 게시글에는 전 세계 3만 명이 ‘좋아요’를 눌렀다.

장재연 숲과나눔 이사장은 “지금까지 ‘국내 풀씨’ 프로그램을 통해 477건에 달하는 환경·안전·보건 분야 시민 아이디어를 발굴했다”면서 “이 사업의 성과와 노하우를 세계 무대로 확장하기 위해 국제 풀씨 ‘GSG’를 시작했다”고 말했다.



지원금 3000달러가 만든 기적
GSG 선정 팀에겐 6개월간의 활동비 최대 3000달러(약 410만원)를 지원한다. 인터넷 환경조차 갖춰지지 않은 작은 단체들의 상황에 맞춰 지원 서류도 간소화했다. 복잡한 회계 보고서나 숫자로 가득 찬 과거 프로젝트 실적 서류는 필요하지 않다. 지역문제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 솔루션, 실현 가능성 등을 설명한 A4용지 5장 분량 신청서면 충분하다.

지원 장벽을 낮추자 그동안 드러나지 않았던 참신한 솔루션을 담은 제안들이 쏟아졌다. 식량안보, 자원순환, 여성의 권리 등 제3세계의 지속가능한 발전을 위해 지역사회의 주민들이 내놓은 아이디어들이다.

네팔 대학원생 11명이 모여 설립한 ‘칼파바티카 소사이어티 네팔’은 쓰레기 노동자들의 ‘발’에 주목했다. 네팔 최대 인구 밀집 지역인 카트만두시 인근의 시스돌 쓰레기 매립지에는 매일 1200t의 쓰레기가 쌓여 산을 이룬다. 이곳에서 쓰레기 더미를 치우고, 필요한 자원을 수집해 생계를 이어가는 노동자들은 맨발로 작업하는 것이 일상이었다. 손과 발에는 날카로운 쓰레기에 베인 상처와 부상이 끊이지 않았다. 대학원생들은 GSG의 보조금으로 노동자 전원에게 안전 부츠를 지급하고, 개인보호장비의 중요성을 알리는 교육을 실시했다.

에티오피아 오지마을 아디스암바에서는 청년들이 산모와 영유아의 건강을 위해 나섰다. 2021년 당시 에티오피아의 산모 사망률은 출생아 10만 명당 412명으로, OECD 평균(6명)의 69배에 달했다. 영아사망률(출생아 1000명당 32.5명)도 OECD 평균(3.9명)의 8배였다. 산모들이 길 위에서 아이를 낳다가 숨지는 사고가 연달아 일어났다. 육아 지식이 부족한 부모들은 신생아에게 모유 대신 일반식을 먹이기도 했다. 마을 청년 두 명은 비영리단체 ‘센티넬 에티오피아’를 설립한 이듬해 GSG 3기에 선정됐다. 임산부 47명을 대상으로 산전·산후 교육을 열었고, 마을 한가운데에는 모자보건 정보를 전달하는 안내판도 설치했다. 그해 이 마을에서 14명의 아이가 무사히 태어났다.

GSG는 최대 3번까지 지원을 받을 수 있다. 아프리카 섬나라 마다가스카르의 비영리단체 ‘하이브우먼’은 2020년부터 3년 연속 지원을 받아 마난드리아나 마을 여성 청소년 1000여 명의 삶을 개선했다. 마을주민 10여 명이 모여 만든 이 단체에서 해결하고자 한 문제는 여학생들의 성 건강이었다. 여학생의 90%가 제대로 된 생리대를 살 여유가 없었고, 대다수가 성병을 안고 살았다.

마난드리아나 마을에서는 3000달러로 할 수 있는 일이 많았다. 첫해에는 여학생을 대상으로 면 생리대 만들기 수업을 열었다. 여아 90명이 사용할 깨끗한 천과 바느질 재료를 구매했다. 전문 강사의 성교육도 처음으로 진행했다. 강사비와 빔프로텍터 등 장비 렌털비를 지급하고, 약간의 간식도 구매할 수 있었다. 2년 차에는 700여 명의 인원을 수용할 수 있는 2층짜리 센터를 지었다. 3년 차에는 마을 주민 누구나 이용할 수 있는 깨끗한 화장실을 설치하고, 인근 학교 교직원들에게 여학생을 위한 위생 시설의 중요성을 알리는 인식 개선 활동을 펼쳤다.

지난해까지 전 세계 61개국에서 총 1858개 아이디어가 접수됐다. 숲과나눔은 이 중 42개국, 136개 아이디어에 40만2258달러(약 5억5000만원)를 지원했다. 김혜승 숲과나눔 캠페이너는 “처음 도전한 프로젝트라고 보기 어려울 정도로 뛰어난 팀들이 많다”면서 “담당자로서 이들의 잠재력이 실제 성과로 이어지도록 도우면서 큰 보람을 느낀다”고 말했다.



관행을 부수고 새로운 연결을 만들다
“GSG처럼 지역의 작은 조직을 지원하는 프로그램은 드물어요. 2017년에 단체를 설립하고 보조금 사업을 찾아봤지만 대부분 우리 같은 단체는 ‘자격 미달’이더라고요. 페이스북에서 처음 GSG 프로그램을 봤을 땐 ‘정말 우리가 지원을 받을 수 있는 건가?’ 믿기지 않았어요. 혹시 사기는 아닌지 알아볼 정도였죠.” (애닌추아 하이브우먼 활동가)

지역의 소규모 조직에 대한 지원의 공백 속에서 GSG 인기는 매년 높아지고 있다. 사업 첫해에는 19팀을 모집하는 데 56팀이 지원해 3대 1의 경쟁률을 기록했다. 지난해 5기 모집에는 첫해의 10배가 넘는 617팀이 지원해 20대 1의 경쟁률을 웃돌았다. 숲과나눔은 선발 규모를 30팀으로 늘렸지만, 잠재력 있는 상당수의 아이디어가 기회를 얻을 수 없었다.

GSG 심사위원단은 내실 있는 단체들을 선별하기 위해 과거 실적, 조직 규모 등을 따지는 관행에서 벗어나 새로운 기준을 만들었다. ▶기존 지원이 닿지 않던 새로운 지역 발굴 ▶지역 맥락에 근거한 실질적 솔루션 ▶문제 해결의 시급성 ▶솔루션의 혁신성과 창의성 ▶확산과 지속이 가능한 모델로서의 가능성 등이다.

이미 지원을 많이 받은 지역은 가급적 제외하고, 현지 맥락에서 해결이 시급한 문제인지도 면밀히 따진다. 시설을 짓거나 물품을 구매하는 데 그치는 사업보다는 주민 스스로 솔루션을 실험하고 이를 다른 마을로 확산할 수 있는 콘텐츠형 프로젝트를 우선한다. 이지현 사무처장은 “서류 작업을 할 컴퓨터조차 없는 열악한 환경이지만 지역 문제를 가장 잘 아는 현지 전문가들이 분명히 존재한다”며 “이런 팀들을 발굴하려면 기존과는 다른 시각과 평가 기준이 필요했다”고 설명했다.

선발의 기준을 달리하자, 한국 ODA와는 접점이 없던 국가들과 새로운 교류가 생겼다. 서아프리카 기니만의 국가 베냉의 활동가들은 GSG 지원금으로 멸종위기 바다소 ‘매너티’ 보호하기 위한 시민운동을 펼쳤다. 카리브해의 아이티에서는 저소득 지역 청소년을 대상으로 환경교육을 실시했다. 지난해에는 우크라이나에서만 15팀이 지원서를 제출했고, 솔로몬제도, 자메이카에서도 GSG 프로그램 출범 이후 처음으로 지원서가 도착했다.

이지현 사무처장은 “우리나라 ODA는 대규모 인프라 중심의 사업이 많고 파트너 선정에도 신뢰성과 투명성을 입증할 수 있는 현지 정부나 대형 NGO와의 협력에 무게를 두는 경향이 있다”면서 “이런 이유로 이제 막 출범한 소규모 팀과 지역사회를 중심으로 접점을 만들기에는 어려움이 있다”고 말했다. 이어 “늘 같은 방식으로 현지 단체를 발굴하면 매번 비슷한 지역의 비슷한 문제만 반복적으로 지원하게 된다”면서 “GSG는 이런 공백을 메우는 역할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풀뿌리 단체에 주목하는 글로벌 그랜트
GSG 선발팀들의 활동이 항상 순탄하지는 않다. 실행 단계에서는 또 다른 난관이 기다린다. 첫째는 송금이다. 현지 금융망이 불안정한 지역에서는 재단이 보낸 지원금이 곧장 도달하지 않는다. 결국 제3국 은행 계좌를 몇 차례 우회하거나, 가까운 선교사나 NGO 관계자에게 현금을 전달해 달라고 부탁하는 식으로 송금을 시도해야 한다. 보고 과정도 만만치 않다. 인터넷 연결이 불안정한 지역에서는 밤낮으로 온라인 미팅 접속을 시도하다가, 모두 잠든 새벽에 와이파이가 제대로 잡혀 그때야 온라인 중간 보고회를 하기도 한다.

GSG로 첫걸음을 뗀 단체들은 외부 기관의 펀딩을 추가로 받으며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 쓰레기 산에서 ‘안전 부츠’ 프로젝트를 펼친 칼파바티카 소사이어티 네팔 팀은 국제 비영리단체 MYCP의 차기 보조금 사업에 선정됐다. 케냐 수도 나이로비의 저소득층 주거지역에서 도시 빈민 영농교육을 실시한 후루마청년그룹은 도시농업 실험을 발판 삼아 영국의 플랜인터내셔널로부터 5000달러 추가 지원을 확보했다. 몽골국립의과대학 의료진은 GSG 지원으로 바양홍고르 지역 광산 노동자들의 호흡기 건강 문제를 공론화했고, 국내 가톨릭대학교와 협력해 이를 주제로 국제 세미나를 개최하기도 했다.

해외에서도 지역의 작은 단체를 대상으로 하는 소규모 그랜트 사업의 규모는 점점 확대되는 추세다. 글로벌그린그랜트펀드, 폴리네이션 프로젝트 등 소규모 그랜트를 전문으로 하는 단체들이 잇따라 등장하고 있고, 플랜인터내셔널·유엔해비타트 등 기존의 국제 NGO들도 최근 CBO을 대상으로 하는 소규모 지원에 발을 들이고 있다. 아프리카 전문가인 손휘주 연구원(전 숲과나눔특정주제 연구자)은 “마을 사정을 가장 잘 아는 지역 주민들은 최소한의 비용으로, 가장 빠르게 현지에 필요한 솔루션을 만들 수 있다”면서 “지역기반조직(Community Based Organization·CBO)의 효율성과 잠재력에 주목하는 기관들의 지원이 늘고 있다”고 말했다.

숲과나눔은 글로벌 지역사회의 더 많은 단체가 GSG의 문을 두드릴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나간다는 계획이다. 장재연 숲과나눔 이사장은 “예상보다 훨씬 의미 있는 사례와 역량 있는 청년 인재들이 발굴되고 있다”며 “이들을 후속 지원하고 더 큰 커뮤니티와 연결한다면 언젠가 코이카를 비롯한 주요 국제개발 기관과 협력할 수 있는 파트너로 성장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이어 “기업과 공공이 힘을 합친다면 그 가능성은 훨씬 커질 수 있다”고 말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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