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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명, 정치 입문 20년 만에 대통령으로
인권운동 변호사 길 걸으며 정치 결심

2010년 성남시장 당선하며 선거 첫 승리
경기지사 거쳐 2017년 대선주자로 급부상
이재명 대통령과 김혜경 여사가 4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 로텐더홀에서 취임 선서를 마치고 나와 시민들을 향해 하트를 보이는 모습. / 국회사진기자단
“국민 앞에 약속드립니다. 깊고 큰 상처 위에 희망을 꽃피우라는 준엄한 명령과 완전히 새로운 나라를 만들라는 그 간절한 염원에 응답하겠습니다.”


경기도 성남의 낡은 공장에서 어린 나이에 사회생활을 시작한 소년. 가난 때문에, 먹고살기 위해 학교 대신 공장으로 향하던 14살짜리 이재명. 옷 살 돈이 없어 대학생활 내내 교련복을 입어야 했던 청년 이재명. 평생을 약자로 살아온 그가 대통령이 됐다. 최소한의 생존을 넘어 모두가 존엄하게 살아갈 수 있는 나라를 만들겠다는 게 그의 가장 큰 목표다.

‘더 나은 세상’에 대한 간절함은 그를 거리의 노동자에서 인권변호사로, 또 정치인으로 이끌었다. 그리고 2025년 6월 제21대 대한민국 대통령으로 첫걸음을 내디뎠다. 지금 존재하는 수많은 ‘이름 없는 고통’을 희망으로 바꾸는 여정의 시작이다.
◆ 13살 이재명, 학교 대신 선택한 공장
그 전에는 몰랐는데 사춘기가 되니까 지나가는 교복 입은 학생들이 참 부러웠어요. 나는 잿빛 공장 작업복을 입고 가는데 그 반대 방향으로 교복을 입고 학교를 가더라고요.” (2022년 KBS 예능프로그램 ‘옥탑방의 문제아들’)

이재명은 1963년 경북 안동군 예안면 도촌동 지통마을에서 5남4녀 중 다섯째로 태어났다. 1960년대 의무교육인 초등학교는 졸업했지만 가난 탓에 중학교 진학 대신 성남 상대원 공단의 공장에 취업했다. 이재명은 또래 친구들처럼 학교를 다니고 싶었지만 아버지의 반대로 학교를 다니지 못했다.

아침 일찍 어머니의 손을 잡고 집에서 나와 공장에 들어가 다음 날 새벽 4시에 집으로 돌아왔다. 일은 새벽 2시에 끝났지만 통금이 풀리는 시간까지 2시간을 더 공장에 있어야 했다. 그 시간을 이재명은 공장에 깔린 작업판에 누워 쪽잠을 자면서 버텼다. 어린 나이에 납땜, 용접, 철판 절단 등 할 수 있는 일은 모두 해봤다. 쉬지 않고 다니면 한 달 월급은 5만2900원.

취업이 안 되는 어린 나이부터 일을 시작한 탓에 형 이름을 빌려썼다. 당시 공장에서는 싼값에 직원을 부리기 위해 어린아이들도 주민등록 등본만 내면 다 받아주던 시기였고 그렇게 이재명은 소년공이 됐다. 정식으로 등록이 되지 않은 직원이었기에 산재 보상도 제대로 받지 못했다.

이 과정에서 평생에 남는 장애도 생겼다. 공장에서 사용하던 압착기에 손목 부분이 눌려 뼈가 골절됐고 성장판 일부가 손상됐다. 팔의 한 부분이 자라지 않게 되면서 팔꿈치 부분이 뒤틀려 굽었다. 이 사고로 이재명은 장애(6급) 판정을 받았다.

다친 곳은 손목뿐만 아니다. 초등학교 졸업 후 다니던 고무공장에서 일하다 동력 벨트에 손가락이 휘감기는 사고가 생겼고 왼쪽 손가락 아래에는 그때의 고무가루가 여전히 박혀 있다.

공장은 그에게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야구 글러브 만드는 공장에서 원하지 않는 ‘강제 격투기’까지 해야 했기 때문이다. 공장 고참들이 점심시간을 이용해 신참들을 모아놓고 권투 글러브를 주고 싸움을 시켰다. 무료한 시간을 달래자는 게 이유였다. 지는 사람은 아이스크림을 사야 했다. 싸움을 잘하지 못했던 이재명은 하루 일당을 다 써가면서 아이스크림을 돌렸다.

이재명은 그보다 2살 어린 12살짜리 소년공이 알려준 노래를 부르며 공장생활을 버텼다. 하남석의 ‘밤에 떠난 여인’이다.


하얀 손을 흔들며 입가에는 예쁜 미소 짓지만
커다란 검은 눈에 가득 고인 눈물 보았네
차창가에 힘없이 기대어 나의 손을 잡으며
안녕이란 말 한마디 다 못하고 돌아서 우네
언제 다시 만날 수 있나 기약도 할 수 없는 이별
그녀의 마지막 남긴 말 내 맘에 내 몸에 봄 오면
그녀 실은 막차는 멀리멀리 사라져 가버리고
찬바람만 소리내어 내 머리를 흩날리는데
네가 멀리 떠난 후 나는 처음 외로움을 알았네
눈물을 감추려고 먼 하늘만 바라보았네
그래픽=박명규 디자이너
◆ ‘작업반장’이 되기 위해 시작한 공부
공장을 탈출하고 싶었어요. 너무 환경이 나쁘니까. 제가 탈출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공부를 해서 인정받는 것이었어요. 오후 6시에 퇴근해서 7시부터 10시까지 공부하고 집에 오면 11시였지요. 다시 공부하러 독서실에 가서 새벽 2시까지 공부하곤 했어요.” (2022년 KBS 예능프로그램 ‘옥탑방의 문제아들’)

중학교와 고등학교는 검정고시로 합격했다. 공부 동기는 단순했다. 공장 작업반장이 고졸인 것을 알고 ‘나도 고졸이 되면 작업반장이 될 수 있나보다’ 싶은 생각에 공부를 시작했다.

중학교 검정고시는 일을 병행하면서 합격했고 고입 검정고시 역시 일을 끝낸 뒤 학원을 다니면서 3개월 만에 합격했다. 대입 검정고시는 1년 만에 합격했다.

쏟아지는 졸음을 견디기 위해 책상 둘레에 앞정을 뒀다. 조금만 졸거나 자세가 달라지면 압정에 찔려 깼다. 졸다가 찔리면 피를 보기도 했으며, 그의 참고서에는 항상 피가 묻어 있었다. 이재명은 이런 방법으로 새벽 시간을 버텼다.

이재명은 공장을 그만두고 낮에 공부를 하고 싶었지만 학원비를 마련할 수 없어 일을 계속했다. 당시 소년공 초임 월급이 1만5000원이었는데 학원비는 7000원에서 1만원에 달했다.

아버지는 이때도 공부를 반대했다. 이재명의 부친은 공장이 쉬는 날 공부하는 시간이 아깝다고 말하며 시장 청소를 시키는 일이 많았다. 밤에 공부할 때는 전기세가 아깝다고 일부러 불을 끄기도 했다. 주간대학을 다니면 돈을 벌 수 없으니 꼭 다니고 싶으면 야간대학을 가라고 강요했다.

등록금이 없던 이재명은 장학금을 가장 많이 주는 대학을 택했다. 중앙대 법학과였다. 법학과를 선택한 이유는 중앙대에서 가장 합격 커트라인이 높았기 때문이다. 이재명은 1982년 중앙대 장학생 선발전형에 합격해 6학기 장학금을 확정받고 입학했다. 학교에서 매월 20만원의 생활비도 받았다. 공장 월급이 7만원이던 시절에 3배 가까이 되는 생활비를 받자 그는 대학 입학을 ‘인생역전’이라고 생각했다.

삶의 원동력은 어머니였다. 이재명은 공장을 다니던 14살 시절부터 어머니가 반복한 ‘재명이는 크게 될 아이다’라는 말에서 힘을 얻었다. 자신의 한계가 공장이 아닐 것이라는 희망으로 10대 시절을 버텼고 공부를 포기하지 않은 것도 이런 어머니 때문이었다.
사진=연합뉴스
◆ 판검사 대신 인권운동 택한 변호사
판사나 검사를 하면 먹고사는 데 지장이 없어요. (변호사를 하고 싶은데) 바로 개업을 하려니 두려웠죠. 그런데 그때 노무현 대통령(당시 변호사)이 사법연수원에 강연을 왔습니다. 그분이 해준 말씀 중에 꽂힌 게 있어요. ‘변호사는 굶지 않는다’라는 말이었어요. 과감하게 하고 싶은 일을 하라 해서 그때 개업을 결심했지요.”(2025년 ‘김어준의 겸손은 힘들다 뉴스공장’)
저는 팔에 장애도 있고 냄새도 잘 못 맡아요. 그때 당시에는 보상도 못 받고 그러고 살았는데 대학을 가고 나서 보니까 이게 내가 못나거나 게을러서 그런 게 아니고 구조적인 문제가 있더라고요. 노력해도 안 되는 게 있었지요. 내가 좀 세상을 바꿔야겠다 생각했습니다. 세상에 도움이 돼야겠다라고…." (2022년 SBS 예능프로그램 ‘집사부일체’)

이재명은 대학 진학 전까지는 사법시험이 있는지도 몰랐다. 과 선배들이 사법고시의 이점을 설명하고 장애로 인해 취업이 어려운 상황에 새로운 돌파구가 될 수 있겠다는 생각에 준비를 시작했다.

법대 3학년 시절 고시에 도전했지만 상법에서 점수가 모자라 낙방했다. 학교 졸업 후 치른 28회 사법시험에 합격했다. 만 23세였다.

성적도 우수했다. 이재명의 연수원 성적은 297명 가운데 60위권이었다. 판사는 지방권, 검사는 수도권 임용도 가능했다. 그러나 이재명은 인권변호사가 되고 싶었다. 판검사 임용 대신 변호사 개업을 택했을 때 연수원장이 직접 면담을 할 만큼 연수원 내에서도 인정받았다.

이재명이 변호사 길을 택한 것은 노무현 당시 변호사의 강연을 들은 뒤다. 인권운동을 하고 싶었지만 당연히 판검사로 시작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특강을 하러 연수원을 찾은 노무현 변호사가
굶지는 않는다”라고 한 말을 듣고 변호사 사무실을 열게 됐다. 변호사 개업 때 ‘전태일 평전’을 집필한 조영래 변호사가 보증금 대출을 받을 수 있도록 보증을 서줬다.

일기 쓰는 게 습관이었던 이재명은 1987년 ‘수없이 많은 사람이 나의 지식과 자격을 필요로 한다. 역사가, 민족이, 노동자가, 핍박받고 가난한 민중이 나를 필요로 하고 있지 아니한가’라는 심경을 남기기도 했다.

이후 이재명은 다양한 시민운동을 시작했다. 2000년 분당 백궁·정자지구 용도변경 특혜의혹을 제기했고 2002년 파크뷰 특혜분양 사건 때 당시 성남시장과의 전화통화 녹취록을 공개하기도 했다.

그중에서도 대표적인 일화는 2002년 성남시립병원설립추진위원회 공동대표를 맡으며 시작한 ‘성남시 공공의료원 설립’이다. 시민들은 병원이 필요한데 장사가 안 되니 병원이 문을 닫았다. 유동인구 50만 명 규모의 지역에서 ‘의료공백 사태’가 발생한 것. 병원이 사라지자 세금으로 시민들이 다닐 수 있는 병원을 만들자는 움직임이 시작됐다. 세금을 내는 이유가 시민의 편의를 위한 것이라면 병원 건립을 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는 게 이재명의 생각이었다.

그러나 시의 입장은 달랐다. 운동장도 만들고 헬스장도 만들 수 있지만 병원은 안 된다고 거절했다. ‘의사들의 영업 영역’을 침해할 수 없다는 게 이유였다.

이재명은 시민들의 의견이 모아지면 시를 설득시킬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2003년 12월 한겨울에 1만8595명의 서명을 모아 시의회에 조례안을 제출했다. 2004년 3월 24일 ‘성남의료원 설립 및 운영조례안’이 성남시의회에 상정됐지만 단 47초 만에 ‘심의 보류’가 떴다. 사실상 부결이었다.

시민들과 함께 1년을 공들인 조례안이 수초 만에 부결되자 의원석을 점거하는 등 농성에 돌입했다. 이 일로 이재명은 특수공무집행방해죄 혐의를 받아 수배 생활을 시작했다.
내가 직접 바꾸겠다” 변호사에서 정치인으로
정치는 전혀 생각이 없었죠. 과거에는 선거제도가 당수에게 충성을 맹세해야 낙점을 받고 또 선거 비용도 엄청 들었거든요. 당선되면 본전 찾고 떨어지면 패가망신입니다. 근데 노무현 대통령이 선거제도와 정치제도를 완전히 바꿨습니다. 당수에 충성 안 해도 되고 돈도 안 들여도 되는 거죠. 뜻대로 할 수 있는 세상이 열린 겁니다. 그래서 인생항로를 바꿨습니다. 나는 노무현 대통령이 열어준 길을 따라왔습니다.” (2025년 ‘김어준의 겸손은 힘들다 뉴스공장’)

변호사 길을 걷던 이재명이 정치를 결심하게 된 것은 성남시 의료원 건립이 난항을 겪으면서다.

수배생활을 하던 2004년 3월 28일 이재명은 경찰의 눈을 피해 경기도 성남시 태평동 주민교회 지하 기도실에 숨어 있었다. 인하병원 노조 부위원장이던 정해선(전 보건의료노조 수석 부위원장)이 먹을 것을 들고 찾아왔다. 한나라당 소속 시의원들이 버티고 있어 시의회에서 조례 통과 가능성은 없었다. 어떻게 하면 좋을지 생각하던 중 ‘직접 정치를 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2004년 3월 28일 오후 5시였다.

2005년 8월 23일 이재명은 만 41세의 나이로 당시 여당이었던 열린우리당에 입당했다. 그는 처음부터 ‘성남시 의료원 설립’이 정치를 시작하는 이유라고 밝혔다. 이재명은
내년 지방선거 성남시장 후보 출마를 염두에 두고 열린우리당에 입당했다”며 “무능하고 무책임한 지역권력을 책임 있고 최선을 다하는 시민의 권력으로 바꿔야 하며 그 역할의 중심에 있어야 한다는 시대적 의무감을 느껴 이 길을 선택했다”고 밝혔다.

정치판에서도 ‘무수저’였던 이재명은 두 번의 낙선을 겪었다. 2006년 지방선거에서 단수 공천으로 성남시장 후보로 출마했지만 현직 시장이던 한나라당 이대엽 후보에게 밀려 낙선했다. 당시 성남시는 보수 텃밭으로 불렸다.

2008년 제1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통합민주당 후보로 성남시 중원구 선거구에 공천을 신청했지만 경선에서 조성준 후보에게 밀려 공천 탈락했다. 성남시 분당구갑 선거구에 전략공천을 받아 출마했지만 한나라당 고흥길에게 밀려 낙선했다.

성남시장이 된 것은 정치 입문 5년 만인 2010년이다. 제5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민주당 소속으로 출마해 51.2%의 득표율을 얻어 당선됐다. 한나라당의 황준기(43.14%)를 3만1537표 차이로 이겼다. 이재명이 처음 승리한 선거다.

2014년 지방선거에서도 55.1%의 득표율을 얻어 재선에 성공했다. 성남시장 재임 시 △기초지자체 최초 벤처기업 1000개 돌파 △멀쩡한 보도블록 유지와 폐보도블록 재활용 △전국 최초의 청년배당 △전국 최초의 무상교복·급식 확충 △3년 6개월 만에 성남시 모든 부채 청산 등의 성과를 낸 결과였다. 세금을 올바른 곳에 써야 한다는 이재명의 철학이 담긴 정책이었다.

성남시 성과로 2018년에는 경기지사에 당선됐다. 2021년까지 3년간 청년기본소득을 경기도 전역으로 확대하고 계곡 불법 영업을 정비했다. 또 공공건설 원가를 공개하고 시장표준 건설단가 도입 등 건설비리를 방지하는 일에도 앞장섰다. 군복무 청년 무료 상해보험 가입을 지원하고 소방관 포상을 확대하는 등 복지에도 신경 썼다.
이재명 대통령이 4일 오전 국회 사랑재에서 우원식 국회의장 등 여야 대표들과 함께 오찬을 하기위해 이동하고 있다. /국회사진기자단
◆ 2025년 제21대 대통령의 탄생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회복도 성장도 결국은 이 땅의 주인인 국민의 행복을 위한 것입니다. 모든 국가역량이 국민을 위해 온전히 쓰여지는 진정한 민주공화국을 만듭시다. 작은 차이를 넘어 서로를 인정하고 존중하며 국민이 주인인 나라, 국민이 행복한 나라, 진짜 대한민국을 향해 함께 나아갑시다.”(2025년 대통령 취임사)

이재명이 전국구 정치인으로 주목을 받은 시점은 2016년이다. 정치인으로는 유일하게 최순실 게이트 사태 초반부터 박근혜 대통령 탄핵을 강력하게 요구한 게 국민들의 공감을 얻었다. 당시 정치권에서는 돌풍급의 ‘이재명 바람’이 일시적인 것인지, 차기 대선주자로 올라설 수 있을지 등을 따질 정도였다.

특히 2016년 10월 29일 청계광장 촛불집회 발언은 현재까지도 명연설로 평가받는다. 단상 위에 올라선 이재명은 본인을
저 멀리 변방 성남시에서 온 이재명”이라고 칭했다. 그러면서
박근혜는 우리가 고용한 머슴이어서 언제든지 해고할 수 있다”며
일각에서 하야하면 혼란이 온다고 한다. 탄핵하면 안 된다고 한다. 저는 그렇지 않다고 확신한다. 전쟁의 위기를 겪고 수백 명의 국민이 죽어가는 현장을 떠나버린 대통령이 통치하는 지금보다 더 나빠질 수 있겠나”라고 지적했다.

이어 그는
공평한 기회가 보장되는 평등한 나라를 위해, 공정한 경쟁이 보장되는 진정한 자유로운 나라를 위해, 전쟁의 위험이 없는 평화로운 나라를 위해, 생명의 침해가 걱정이 없는 평화로운 나라를 위해 박근혜를 내몰아야 한다”고 덧붙였다.

이 발언 이후 이재명은 정치인으로서 체급을 올렸다는 평가를 받는다. 실제 여론조사전문기관인 리얼미터가 2016년 10월 31일부터 11월 2일까지 3일 동안 전국 19세 이상 유권자 1518명을 대상으로 지지율을 조사한 결과 이재명 당시 시장은 9.7%의 지지율을 얻으며 3위인 안철수(10.3%)에 가까이 갔다.

촛불집회 당시 더불어민주당 당대표 추미애, 차기 대선주자 문재인 옆에 앉아 탄핵 시위를 한 것도 이재명의 달라진 정치 체급을 알려주는 일화다. 기초자치단체장인 성남시장이 대선주자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것은 흔치 않은 일이기 때문이다.

2017년 대선 레이스가 시작됐고 이재명도 민주당의 차기 대선후보에 올랐다. 계파가 없던 이재명이 대선주자로 올라선 것은 말 그대로 ‘개천에서 용 나는 일’이었다. 당시에는 문재인과 안희정에게 밀려 탈락했다.

2022년 제20대 대선에서는 이낙연을 제치고 50.29%의 득표율로 민주당의 대선 주자가 됐지만 윤석열에게 0.73%p 져 낙선했다.

그러나 3년이 지난 2025년 결과는 달랐다. 대선 투표율은 79.4%로 김대중 대통령이 당선된 1997년 대선 이후 28년 만에 가장 높은 수치를 기록했고, 이재명은 1728만 표(49.42%)를 얻어 대통령으로 당선됐다. 역대 최다 득표 수다.

이재명이 그리는 미래는 명확하다. 불평등한 사회를 화합의 장으로 만들고 남녀를 가르는 극단주의를 없애고 누구에게나 성장의 기회가 제공될 수 있는 사회다. 이재명은 6월 4일 국회 본청 로텐더홀에서 한 취임선서에서
통합은 유능의 지표이며 분열은 무능의 결과”라며
분열의 정치를 끝낸 대통령이 되겠다. 국민통합을 동력으로 삼아 위기를 극복하겠다. 민생, 경제, 안보, 평화, 민주주의 등 내란으로 무너지고 잃어버린 것들을 회복하고 지속적으로 성장 발전하는 사회를 만들겠다”고 약속했다.

한경비즈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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