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시내 한 대형 병원 응급실에 진료 지연 안내문이 놓여 있다. 사진=연합뉴스
윤석열 전 대통령이 탄핵된 지 두 달이 됐다. ‘의정 갈등’을 촉발했던 윤 정부의 ‘필수의료 패키지’(의료개혁 4대 과제)는 추진 동력을 잃은 지 오래다. 2024년 계획된 의대생 증원 계획은 2025학년도를 마지막으로 폐기될 예정이다.
그럼에도 갈등의 상흔은 여전하다. 1년 넘게 의료현장을 떠난 전공의의 빈자리는 제대로 채워지지 않고 있다. 의정 갈등 초기처럼 ‘마비’된 상태는 아니지만 의료공백 또한 여전한 것은 물론이다.
의료계 관계자들은 지금의 의료공백 현상이 앞으로 짧게는 3년 가까이 지속될 것으로 보고 있다. 전공의부터 수련의, 의대생까지 투쟁에 나서면서 전문의부터 도미노로 충원이 지연되고 있다. 당장 필요한 전공의 인력도 새 정부가 어떤 당근을 제시하느냐에 따라 돌아갈지 결정하겠지만 보건복지부 장관 임명조차 두 달 이상 걸릴 전망이다.
일각에서는 “다시는 전으로 돌아갈 수 없을 것”이라고 한다. 필수의료는 물론 수련과정 지원이 줄고 일반의가 늘고 있는 현상에 의대정원 확대가 기름을 부은 격이라는 것이다. 떨어진 의료 접근성, 피해는 중증환자에게
의정 갈등 초기 혼란스러웠던 의료현장은 전보다 다소 안정을 찾았다. 진료지원(PA) 간호사 시범사업이 시작되고 정부 지원금도 투입됐기 때문이다. 의료진도 환자도 어느 정도는 적응했다는 분위기다. 한 제약사 관계자는 “경증 환자들이 대부분 동네 병의원을 찾게 되면서 의정 갈등으로 인해 피해를 보지는 않았다”고 말했다.
그러나 절대적인 인력 부족으로 인한 의료공백은 어쩔 수 없다. 피해는 주로 중증환자에게 집중됐다. 국회 보건복지위원회 김윤(더불어민주당) 의원이 국민건강보험공단에서 받은 자료에 따르면 의료공백이 본격화한 지난해 주요 암 7종(위암·대장암·유방암·자궁경부암·폐암·췌장암·두경부암) 수술 건수가 전년 대비 7.3%(2022명) 줄었다. 암수술 대기 기간도 평균 37.9일에서 43.2일로 5.3일 늘었다. 이 기간 대기기간이 31일 이상 지연된 환자 비율은 40.7%에서 49.6%로 8.9%p 높아졌다.
특히 상급종합병원에서 암수술을 받은 환자 수는 20.3%(4271명) 급감했고 일명 ‘빅5’(삼성서울병원·서울대병원·서울성모병원·서울아산병원·세브란스병원)에선 절반이 넘는 51.4%(4242명)나 줄어 환자들이 선호하는 상급병원일수록 수술 지연기간이 길었다. 일부 종합병원에선 만성신부전증 등 중증질환 환자의 전원을 받지 않는 사례도 생겼다. 같은 상급종합병원 중에서도 전공의 인력 비중이 높은 곳이 더욱 어려움을 겪었다.
받을 수 있는 환자 수는 줄었지만 교수, 전임의, 간호사 등 사직 전공의들의 일손을 메워온 인력들의 피로는 가중되고 있다. 동맥혈 채취부터 초음파 검사, 수술보조, 당직, 환자관리까지 다양한 전공의 업무를 분담하고 있기 때문이다. 의정 갈등 전까지 상급종합병원 내 의사 중 30~40%를 전공의들이 차지했다. 하루 종일 환자 진료를 보고 수술까지 한 교수가 당직을 서며 직접 수술 환자 드레싱을 해야 하기도 한다.
요양급여비용(수가) 협상에 나선 유인상 대한병원협회 수가협상단장은 “의정 갈등 사태로 상급종합병원의 진료비 수입이 전년 대비 8.8% 감소했으며 현재도 진료 이송과 회송 체계가 아직 안정화되지 않은 상태”라며 “비상진료체계 유지를 위해 근무시간이 확대되면서 지급된 수당 등도 고려돼야 한다”고 말했다. 특례 줘도 ‘리턴’ 망설여
정부와 각 상급종합병원들은 전공의 복귀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의료계에 따르면 5월 27일까지까지 기한이던 ‘빅5’ 전공의 추가모집 접수에 신청률이 정원의 10% 정도로 나타났다. 각 병원들은 모집 기한을 일제히 연장했다.
이번 추가모집은 통상 상·하반기 진행하는 정기모집과 별도로 사직 전공의 복귀 목적에서 특례를 준 셈이다. 사실상 정부가 백기투항한 것이나 다름없다. 보건복지부에 따르면 올 1월 상반기 정기모집 지원자는 정원의 2.2%에 불과했다. 의료현장에 인력이 부족한 데다 대한수련병원협의회, 대한의학회 등 관련 단체들이 자체 여론조사를 벌인 결과 복귀를 희망하는 전공의 수요가 있었다는 판단에서다. 그러나 지원율은 예상보다 떨어졌다.
급기야 보건복지부는 5월 28일 전국 수련병원장에게 “6월 1일 자로 인턴 수련을 개시해 이듬해 2월 28일까지 인턴 수련을 완료하는 경우 인턴 이수를 인정한다”는 ‘2025년도 5월 추가모집 인턴 수련 기간 관련 안내’ 공문을 발송하기도 했다.
이번 조치는 추가모집에 지원한 인턴들이 내년 3월 레지던트 모집에 지원하는 데 차질이 없도록 해달라는 의료단체들의 건의를 받아들인 것이다. 기존 인턴 수련기간은 1년으로 이번 추가모집을 통해 6월 1일부터 수련을 시작하는 인턴들의 원래 수련 종료시점은 내년 5월 31일이었다. 레지던트 충원을 위해 수련 기간을 3개월 단축한 것이다.
정부가 병원에 공문을 발송하기 전부터 의료단체들의 건의가 받아들여질 것이란 예상이 나왔다. 군입대 기간이나 출산휴가 3개월을 수련기간으로 인정해주는 관례가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전공의 사직 및 의대생 단체휴학의 원인이던 의대생 증원 계획도 지난 3월 백지화됐다. 이미 모집을 완료한 2025학년도를 마지막으로 의대생 정원을 예년 수준으로 되돌리겠다는 것이었다. 기한 없는 회복
정부의 여러 조치에도 불구하고 전공의들이 선뜻 복귀하지 않는 원인은 여러 가지다. 우선 정부는 물론 현 의료제도 자체에 대한 불만이 해소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전공의들은 수련환경 개선부터 필수의료 수가개선과 응급의료과, 소아과 등에 대한 소송 위험 문제 해결 등을 요구해왔다. 의료계는 이 같은 구조적인 문제가 해소되지 않는 한 의대생 증원이나 공공의대 신설은 근본적인 해법이 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그런 상황에서 의대 정원만 되돌렸다고 해서 전공의들이 돌아올 충분한 명분이 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대한전공의협의회는 지난 3월 수련 시간(주 80시간, 36시간 연속 수련)을 단축하고 전공의 육성에 대한 행정적, 재정적 지원을 의무화하는 등의 ‘전공의의 수련환경 개선 및 지위 향상을 위한 법률’ 개정을 제안하기도 했다.
김교웅 대한의사협회 대의원회 의장(정형외과 전문의)은 “현장에서 의료진들이 체감하는 문제는 많은데 정부는 어떤 것도 개선하겠다는 약속을 하지 못하고 있다”며 “전공의들이 무엇을 믿고 돌아오겠나”라고 말했다. 김 의장은 “새 정부가 꾸려지고 전문위원회가 구성돼 대안을 내놓아야 의료 정상화가 가능하며 그때까지 2~3년은 걸릴 것”이라고 전망했다.
의정 갈등이 전공의 지원이 줄고 일반의가 늘던 최근의 흐름을 더 강화했다는 주장도 나온다. 실제로 보건의료데이터개방시스템에 따르면 2020년부터 매년 레지던트 인원이 줄고 일반의가 늘었다. 그러다가 전공의 사직이 본격화한 2024년 1분기부터 2025년 1분기 사이 이 같은 현상이 대폭 심화했다. 김선민 조국혁신당 의원이 보건복지부로부터 받은 자료에 따르면 임용을 포기하거나 사직한 레지던트 8791명 중 61.4%(5399명)가 일반의로 의료기관에 재취업했다.
이경원 대한응급의학회 공보이사(용인세브란스병원 응급의학과 교수)는 “미용시술이 유행하면서 일반의가 증가하는 현상은 국내뿐 아니라 세계적으로 발생하고 있었는데 의정 갈등으로 이런 현상이 급격히 심화했다”며 “수련과정을 떠난 전공의 중 상당수가 복귀하지 않을 가능성이 있다”고 설명했다.
이 교수는 “최종 무죄판결이 나왔던 이대목동병원 신생아 사망사고 발생 당시 담당 교수가 도주 우려가 있다는 이유로 구속됐다”며 “그 외에도 응급의료과, 소아청소년과 등 필수의료 인력들이 불가항력의 이유로 구속되거나 고소를 당했는데 누가 종합병원에 남으려고 하겠나”라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