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승부'에서 조훈현(이병헌)이 어린 이창호와 바둑을 두고 있다. 바이포엠스튜디오 제공
10세의 어린 이창호는 조훈현의 내제자로 들어갔다. 내제자는 스승의 집에서 기거하는 제자로, 수업료나 숙박비를 일절 내지 않고 친자식처럼 스승의 가족들과 함께 지낸다. 놀랍게도 그는 내제자 생활 5년째에 스승을 이기고 대회 타이틀을 따기 시작했다. 이것이야말로 스승에 대한 진정한 보은이라 여겼다. 고등학교에 갈 무렵, 7년간의 내제자 생활을 ‘일찍’ 마치고 독립했다. 내제자는 일본 바둑계에서는 보편적인 제도로, 대개는 성인이 되어야 독립을 할 수 있었다. 조훈현도 10세에 일본으로 건너가 스승의 집에서 9년간 내제자로 지냈다. 그의 스승 세고에 겐사쿠는 현대 일본 바둑을 태동시킨 영웅으로 추앙받는 인물로, 당시 74세였다.
세고에 겐사쿠와 조훈현의 교육 방법에는 하나의 공통점이 있다. 바둑을 많이 가르치려 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조훈현의 저서 '고수의 생각법'을 보면, 스승에게 바둑을 직접 배운 시간이 손에 꼽을 정도라고 회고했다. 아주 가끔 복기(두었던 바둑을 처음부터 다시 놓아보면서 성찰하는 행위)를 시키는 것 외에는 특별한 말도 없었다. 스승은 제자가 밖에서 바둑을 이기고 오든 지고 오든, 칭찬도 꾸중도 하지 않았다. 늘 마당을 쓸라느니 술상을 봐오라느니 하며 매일 같은 잡일을 시켰다. 마치 무협 영화 속 한 장면처럼 느껴진다. 그 대신 바둑을 대하는 태도와 삶의 자세가 천천히 스며들게 했다. 그저 매일 함께 밥을 먹고 생활하면서 스승은 말이 아닌 존재로서 가르쳤던 것이다.
이창호가 쓴 '부득탐승'에도 비슷한 기억이 나온다. 조훈현의 지도 방식 역시 일대일 대국보다는, 기원에서 둔 바둑을 복기하면서 스스로 발상의 전환을 끌어내 주는 것이었다. 스승과는 정반대로 느리고 둔탁한 바둑을 두는 데다 복기도 제대로 못 하는 제자였지만, 스승은 제자의 바둑을 억지로 바꾸려 하지 않았다. 제자가 가진 원형 그대로의 바둑 자아를 순순히 인정해 주고 지켜준 것이다. 스승은 제자를, 재능이 안으로 감춰진 ‘내적천재’라고 여겼다. 진정한 교육이란 제자 안에 묻혀있는 것을 밖으로 끌어내주는 것이다. 없는 것을 억지로 주입하는 것은 교육이 아니라 침입에 불과하다. 이창호는 바둑은 실수를 적게 하는 쪽이 이기는 게임이라는 사실을 그 어린 나이에 스스로 깨쳤고, 싸우지 않고 적을 굴복시키는 것이 최선이라는 철학을 세웠다.
조훈현의 말처럼, 바둑기사에게 자신만의 ‘류(流)’는 곧 자아다. 수천 년을 이어온 바둑이 아직도 건재한 이유는 단순한 게임이 아니라 그 안에 인간의 삶과 철학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설국'으로 유명한 소설가 가와바타 야스나리는 세고에 겐사쿠의 친구로 1951년 '명인'이라는 바둑 소설을 남겼다. 그 안에는 대합조개로 만든 흰 바둑알, 기예로서의 바둑의 품위와 멋, 그리고 승부를 초월한 인간 삶의 느긋한 아름다움이 펼쳐져 있다.
오흥권 분당서울대병원 대장암센터 교수·'의과대학 인문학 수업' '타임 아웃'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