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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저스, 청문회서 국내 CEO와 다른 공세적 태도
사건 발생 시 위기관리 우선순위 국내 아닌 ‘미국’
미 SEC, 보안사고 시 자체 공시토록 규정
한국 정부와 척 지더라도 자체 조사 발표 강행한 듯
전면전 장기화 땐 미국과 통상 문제 비화 가능성
지난해 12월 30일 국회에서 열린 쿠팡 청문회에서 해롤드 로저스 쿠팡 대표이사가 최민희 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위원회 위원장의 동시통역기 착용 요구에 답변하고 있다. 연합뉴스
지난해 12월 30일 국회에서 열린 쿠팡 청문회에서 해롤드 로저스 쿠팡 대표이사가 최민희 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위원회 위원장의 동시통역기 착용 요구에 답변하고 있다. 연합뉴스


[주간경향] “그만합시다(Enough).”

“고객들이 허위 정보를 받고 있는 만큼 출국 금지와 위증이라는 말이 나오는 것에 대해 절대 인정할 수 없다.”

지난해 12월 30일부터 이틀간 국회에서 열린 쿠팡 개인정보 침해 사고 관련 연석 청문회. 한국 쿠팡을 대표해 증인으로 출석한 해롤드 로저스 대표는 전과는 완전히 다른 태도를 보였다. 앞선 국회 청문회에서 보여준 동문서답으로 시간을 끄는 지연전술 대신 때때로 언성을 높이고 책상을 두드리는 등 보다 공세적인 태도였다. 나아가 한국 정부가 개인정보 침해 사고와 관련해 정보를 은폐하거나 허위 정보를 근거로 쿠팡을 몰아세운다는 취지의 주장도 폈다.

전례를 찾아보기 힘든 기업과 정부의 전면전 양상이다. 그간 한국 기업은 중대한 문제가 발생했을 때 당국의 비호를 받은 적은 있을지언정 정부나 국회와 대놓고 척을 지는 일은 피해왔다. 그런데 쿠팡은 압박의 강도가 강해지면 강해질수록 자신들도 강수를 두며 정부·국회와의 긴장을 고조시키고 있다. “몽둥이가 모자라다”(김영배 의원), “까면 깔수록 밝히면 밝힐수록 쿠팡의 문제는 커지기만 한다”(정일영 의원)와 같은 반응이 여당인 더불어민주당에서 나오는 이유다.

쿠팡만의 독특한 위기관리법이 작동하는 배경을 살펴봤다. 쿠팡이라는 기업이 국내 기업과 달리 해외에서 투자를 받아 성장해왔다는 점, 쿠팡이 상장한 미국의 규제 당국 대응에 위기관리의 우선순위가 맞춰져 있다는 점, 국내에 달리 대체재가 없는 시장지배적 사업자라는 입지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는 분석이 나온다. 그러나 이 배경을 감안하더라도 “현재 쿠팡이 위험한 상황으로 치닫고 있다”는 데 이견은 없었다.

한국 정부 패싱?

정부와의 전면전으로 국면이 전환된 계기는 쿠팡의 자체 조사 결과 발표다. 지난해 12월 25일 대통령실이 ‘플랫폼 기업 개인정보 유출’ 관련 관계부처 회의 개최를 30분 앞둔 시점에서, 쿠팡은 보도자료를 냈다. 개인정보를 유출한 전 직원을 특정했고, 개인정보를 빼내는 데 사용된 장비를 모두 회수했으며, 유출자가 저장한 정보는 3000개 수준으로 모두 삭제됐다는 내용이었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는 “일방적 발표”라며 쿠팡 측에 강력히 항의했다. 이에 쿠팡은 “정부와 긴밀히 협력하며 진행한 조사였다”며 정부와의 진실 공방으로 상황을 끌고 가고 있다. 급기야 쿠팡이 협력한 정보기관으로 지목된 국가정보원이 해롤드 로저스 대표를 위증 혐의로 고발해달라고 국회에 요청하는 상황까지 치달았다.

고객정보 침해 사고로 정부 조사를 받은 한 기업의 관계자는 “쿠팡이 셀프 조사를 발표했을 때 전례 없는 행보라 놀랐다. 이런 일이 발생하면 정부 조사에 최대한 협조하고 가용 범위 내에서 최대치의 보상안을 제시하면서 정부 눈치를 보는 게 일반적인 방식이었다. 정부로부터 처벌받을 수 있다는 불안감, 잘못 대처하면 고객들이 떠날 수 있다는 위기감이 반영된 행보였다. 그런데 쿠팡은 완전히 반대로 간다”고 했다.

민관합동조사단의 조사대상인 기업이 자체 조사 결과를 발표하는 상황 자체가 상식과는 거리가 멀다. 쿠팡의 조사 결과가 모두 사실이라 하더라도 적법 절차에 따라 조사를 수행한 공적 기관이 발표하지 않는 한 신뢰성에 흠결이 생길 수밖에 없다. 개인정보보호위원장을 지낸 고학수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유출자로 지목된 전 직원이 갖고 있던 장비를 쿠팡이 먼저 확보한 다음에 포렌식 작업을 거친 것이기에 법적 절차를 밟을 때 증거 능력이 제대로 인정될 것인지, 증거의 원본성이 인정되지 않을 여지도 있다”고 했다. 쿠팡이 정부의 지시 아래 자체 조사 결과를 발표했다고 주장하는 것과 관련해서도 고 교수는 “앞으로는 민관합동조사단이 됐건, 정부 조직 어디가 됐건 쿠팡과 소통할 때 훨씬 더 조심스러워질 수밖에 없다”고 했다.

왜 이런 무리수를 뒀을까. 위기관리의 우선순위가 달랐기 때문이라고 보는 시각이 많다. 한국 규제 당국에 대한 대응보다 미국에서의 대응에 중점을 뒀다는 얘기다. 미국 증권거래위원회(SEC)는 기업이 사이버 보안 사고로 중대한 영향을 받을 수 있음을 확인했을 때 4일 이내에 이를 공시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공시가 제때 이뤄지지 않으면 주주 집단소송의 빌미가 될 수 있다. 실제 쿠팡 주주들은 미국에서 쿠팡이 공시 의무를 위반했다며 집단소송을 제기했다. 이에 한국 정부와 척을 지더라도 쿠팡이 자체 조사 결과와 보상안을 발표하는 길을 택했다는 것이다. 민관합동조사단의 결과가 언제 나올지 모르는 데다, 쿠팡의 미진한 대응으로 국회 청문회·국정조사 요구가 이어지는 등 사태가 장기화할 조짐을 보인다는 점도 영향을 미쳤을 수 있다. 쿠팡은 보상안 발표 직후 SEC에 자체 조사 결과 등을 공시해 사태가 사실상 수습국면에 접어들었다고 일방 선언했다.

기존 국내 기업들과는 다른 쿠팡의 물적 토대가 이 같은 위기관리를 가능하게 한 셈이다. 조귀동 정치컨설팅 민 전략실장은 “국내 재벌기업들은 국가의 혜택을 받으며 성장했기에 사회 구성원으로 책임을 져야 한다는 인식이 강했다. 그런데 쿠팡은 사업 대상은 한국에 많이 있지만, 한국에서 자본 조달을 거의 안 했다. 외국인 투자자들이 주된 이해관계자들이다. 문제는 한국의 유통을 장악한 대기업이 대형 사고를 쳤는데 거의 책임지지 않는다고 했을 때, 이 독점적인 지위를 내버려 둘 수 있느냐에 있다”고 했다.

전면전 장기화

쿠팡과 정부의 전면전은 장기화할 것으로 보인다. 민주당은 지난해 12월 31일 쿠팡 국정조사 요구서를 국회에 제출했다. 과기부, 고용노동부, 법무부 등 12개 정부 기관은 국회 청문회가 마무리된 직후 쿠팡에 대해 “국민 편에서 끝까지 책임 묻겠다”는 보도자료를 냈다. 개인정보 침해 사고는 물론, 산재 은폐 등 노동권 문제, 시장지배적 지위 남용 등 불공정 행위 등도 조사해 나가기로 했다. 이미 국세청은 특별세무조사에 착수했고, 공정거래위원회는 와우 멤버십 끼워팔기 등을 심의하고 있다.

쿠팡의 위기는 심화될 가능성이 크다. 고학수 교수는 “당국과 척을 지고, 여론은 계속 악화된다. 이 건을 떠나서 기업 입장에서는 두고두고 피곤한 구도를 만드는 것”이라고 했다. 조귀동 실장은 “쿠팡이 많이 위험해지는 건 사실”이라며 “이 문제의 진짜 핵심은 과연 국내 유통 기업이 쿠팡을 대체할 수 있느냐가 될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장기전은 정부에도 부담이 될 수 있다. 한국 규제 당국이 쿠팡에 차별적 대우를 하고 있다는 쿠팡의 스탠스를 강화할 여지가 있기 때문이다. 미국 정가에서도 쿠팡과 정부의 전면전을 일종의 통상문제로 치부하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임종인 고려대 정보보호대학원 교수는 “쿠팡도 정부와 협조하는 태도를 취하고, 정부도 차분히 할 수 있는 일부터 대응할 필요가 있다. 쿠팡이 민간 사이버 보안 업체 3곳에 의뢰해 조사 결과를 발표했는데, 쿠팡의 의도를 믿을 수 없다면 해당 보안 업체 관계자들을 불러서 조사 결과를 검증하는 일이 필요하다”고 했다.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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