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희원 저속노화연구소 대표가 서울시 건강총괄관으로 재직하던 지난 8월 경향신문과 인터뷰를 하고 있다. 문재원 기자
전 연구원 A씨에게 스토킹과 협박을 당했다며 고소한 정희원 저속노화연구소 대표가 이후 A씨에게 “(스토킹 신고를 한) 10월20일 일은 정말 후회하고 있다. 죄송하다”는 문자메시지를 보낸 것으로 나타났다. A씨 측은 “자신이 스토킹 피해자라는 주장과 실제 행동이 모순되는 것”이라며 “이 사안의 핵심은 위력에 의한 성적·인격적 착취로 정 대표는 가스라이팅(심리적 지배) 피해자가 아니라 가해자”라고 주장했다. 정 대표 측은 “스토킹 신고가 잘못됐다는 뜻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25일 연구원 A씨를 대리하는 박수진 변호사(법무법인 혜석)에 따르면 정 대표는 A씨 측이 “지위를 이용한 반복적 성적 요구가 있었다”는 입장문을 낸 다음날인 지난 19일 오후 A씨에게 “살려달라. 저도 저속노화도 선생님도 다시 일으켜 세우면 안 되겠느냐. 10월20일 일은 정말 후회하고 있다. 죄송하다”는 문자메시지를 보냈다. 10월20일은 정 대표가 저작권 침해 문제에 항의하기 위해 자택으로 찾아온 A씨를 스토킹으로 신고한 날이다.
정희원 저속노화연구소 대표가 지난 19일 전 연구원 A씨에게 보낸 문자메시지. 법무법인 혜석 제공
정 대표는 이 문자메시지를 보내기에 앞서 A씨의 아버지에게 전화해 10여분간 A씨를 비난했고, A씨에게 카카오톡 메시지를 보내기도 했다고 A씨 측은 밝혔다. 정 대표는 A씨가 문자메시지에 답변하지 않자 전화를 시도했지만 통화가 이뤄지지는 않았다.
박 변호사는 “정 대표의 주장대로 A씨가 스토킹과 공갈미수의 가해자라면 그런 상대에게 살려달라고 호소하거나 스토킹 신고를 후회하고 있다고 말할 이유가 없다”고 말했다. 박 변호사는 또 “정 대표는 고용관계 지속 당시에도 피해자가 성적 요구를 중단해달라는 의사를 표시하자 자살 가능성을 언급하며 의사결정 능력을 압도한 바 있다”며 “이번에도 ‘살려주세요’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은 위기 상황에서 자신의 생명을 담보로 상대방을 압박하거나 회유하는 행동 패턴이 나타난 것”이라고 말했다.
박 변호사는 “법률대리인의 연락 금지 요청을 무시한 채 피해자와 그 가족에게 반복적으로 일방적 연락을 시도한 정씨의 행위야말로 스토킹처벌법상 스토킹 행위에 해당한다”고 말했다. A씨는 정 대표를 저작권 침해와 명예훼손, 무고, 위력에 의한 강제추행, 스토킹 등의 혐의로 고소한 상태다.
“일대일 계약 교수-연구원 관계… 고용관계 기반 착취”
A씨 측은 정 대표 측이 “이 사건의 본질은 장기간에 걸친 가스라이팅과 그 후에 발생한 공갈협박”이라고 주장한 데 대해서도 반박했다. 두 사람의 관계는 정 대표 측의 표현처럼 ‘아산병원 연구원 동료’가 아닌 인사·업무·관계지속에 대한 실질적 결정권한을 가진 교수와 위촉연구원이었고, 불리한 고용관계 아래서 요구된 역할을 수행해야 했던 전형적인 구조라는 것이다.
정 대표는 서울아산병원에 재직했던 2024년과 2025년 두 차례에 걸쳐 A씨와 고용계약을 맺었다. 2023년 12월 정 대표가 A씨와 체결한 연구원 근무계약서를 보면, 이 계약서의 계약주체는 연구책임자인 정 대표와 연구원 A씨다. 계약서에는 A씨가 산업통상자원부로부터 연구비를 지원받은 지능형 의지보조 및 의료용 자동이동기기 관련 연구과제의 위촉연구원으로서 연구보조 업무를 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계약기간은 1년이다. 하지만 실제로 연구보조 업무는 전혀 하지 않고 정 대표의 개인적 대외활동만을 전담했다는 것이 A씨 측 주장이다.
정희원 저속노화연구소 대표와 연구원 A씨의 고용계약서. 법무법인 혜석 제공
박 변호사는 “고용의 유지·업무배분·평가에 관한 실질적 권한이 정 대표에게 있었고, 성적·정서적 요구의 방향 역시 정 대표로부터 시작됐다”며 “이런 구조에서 피용자인 A씨가 사용자인 정 대표의 현실 인식을 지배하거나 심리적으로 종속시켜 가스라이팅을 했다는 것은 성립 자체가 불가능한 주장”이라고 말했다.
A씨 측은 정 대표가 성적 영역과 업무 관계 전반에 걸쳐 자신을 피학적 위치에 두고 A씨에게 ‘지배적·가학적 여성상’을 연기하라고 지속적으로 요구해 왔다고도 밝혔다. 박 변호사는 “이런 요구에 따라 A씨는 때로 강한 여성, 관대한 엄마, 가학적인 마녀의 역할을 오가야 하는 자신의 위치에 엄청난 고통을 느꼈다”며 “A씨는 지칠 때마다 이 역할의 어려움을 내비쳤으나 정 대표는 멈추지 않았다”고 말했다.
또 “그럼에도 정 대표는 전후 맥락을 제거하고 이런 요구를 마치 피해자가 자발적으로 주도한 것처럼 하기 위해 가스라이팅이라고 주장하고 있다”면서 “하지만 이는 권력자가 자신의 성적·정서적 취향을 충족시키기 위해 피용자에게 특정 인격과 역할을 강요한 전형적인 구조”라고 말했다.
“여론전 대응 위해 피해 공개할 수밖에”…정 대표 측 “그런 요구 한 적 없다”
박 변호사는 “정 대표는 사실관계를 왜곡해 국면을 유리하게 끌고가고자 여론전을 폈고 A씨는 왜곡된 주장을 바로잡기 위해 성적 피해사실을 대중에 밝힐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며 “A씨는 카카오톡 메시지 외에 다양한 형태의 객관적 자료와 정황을 보유하고 있으며 법적 절차로 판단받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이번 사안은 논란이나 자극적 소비의 대상이 아니라 권력관계 속에서 발생한 성적·인격적 침해 문제”라며 “왜곡된 보도나 2차 가해에 대해서는 부득이한 경우 필요한 법적 대응을 검토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정 대표 측은 “스토킹 신고가 잘못됐다는 뜻은 아니다”라고 밝혔다. 정 대표를 대리하는 박기태 변호사(법무법인 한중)는 “언론에 얘기가 나오는 것이 너무 힘들어서 했던 문자메시지일 수는 있겠으나 스토킹 고소가 잘못됐다는 뜻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정 대표가 A씨에게 가학적 여성상을 연기하라고 요구했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그런 요구를 한 적이 없고 오히려 관계 초기부터 지속적인 요구와 협박을 당해왔다”며 “전체 메시지 등 증거를 가지고 있고 수사기관에 제출해 판단을 받을 것”이라고 말했다. 정 대표 측은 또 “상대 측에서도 단편적인 메시지 공개를 그만두고 수사기관을 통해 판단받길 바란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