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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종로 세운상가 5층 옥상에 올라 정면을 보니 숲에 둘러싸인 종묘가, 그 뒤로 북악산과 북한산이 차례로 병풍처럼 서 있다. 종묘와 주변의 아름다운 산세를 한눈에 담기에 이보다 좋은 곳은 없어 보인다.

고개를 오른쪽으로 돌리면 철거로 빈 땅이 된 세운4구역이 있다. 서울시가 지난 10월 말 건물 최고 높이를 71.9m에서 145m로 높이는 개발계획변경안을 고시하면서 종묘 경관 훼손 논란이 제기된 곳이다.

시는 건물 높이를 높여 발생하는 개발이익을 환수해 세운4지구 옆 세운상가 건물을 매입·철거하고 녹지를 만들 계획이다. 같은 방식으로 세운지구에서 청계천·을지로 방향으로 이어진 청계·대림·삼풍·PJ호텔·신성·진양 등 7개 상가군을 철거, 공원으로 만들어 종묘와 남산을 잇는 녹지 축을 만들려고 한다.

지난 15일 서울 종로구 세운상가 1층의 모습. 주영재 기자
지난 15일 서울 종로구 세운상가 1층의 모습. 주영재 기자


쇠락했지만 활력은 남아 있어···“개발해도 상권 죽을 우려”

세운지구 개발은 2006년 오세훈 시장 취임 이후 본격화됐지만 그 이전 김영삼·이명박 대통령 때 나온 이야기이기도 하다. 지난 15일 세운상가에서 만난 상인들은 피로감을 호소했다. 지금도 영업하는데 철거한다는 말이 20년째 반복되면서 손님만 끊겼다는 것이다.

안석탑 세운상가시장협의회 총회장은 “맨날 세운상가가 없어진다고 해서 그동안 상인들이 고생을 많이 했잖아요. 4구역을 철거하는데도 세운상가를 철거한다고 하고, 저쪽 5구역·3구역 철거하는데도 세운상가를 철거한다고 얘기를 해버리니 일반 사람들은 세운상가를 철거하는 줄 알지”라고 답답함을 호소했다.

이날 둘러본 세운상가는 바로 앞 대로를 지나는 유동인구에 비해 한적한 편이었다. 세운상가 안에서 공인중개사로 일하는 이능규씨(70)는 “장사가 안되니 3층 이상은 거의 창고로 쓰고 있다”고 말했다. 그래도 제품 상자를 부지런히 나르는 이들이 꽤 많이 보여 활력이 남아 있다고 느끼게 했다. 호기심에 들른 외국인 관광객도 간간이 보였고, 손에 물건을 사서 들고 가거나 가게 주인과 오랜 시간 동안 제품을 두고 이야기를 나누는 손님의 모습도 보였다.

일하는 사람도, 손님도 대체로 나이 든 분들이었다. 홍대 인근에서 사는 김유상씨(60)는 이날 휴대용 가스 난방기 부품을 사러 이곳에 들렀다. 세운상가를 허물고 녹지를 만든다는 시의 계획을 어떻게 생각하냐고 묻자 ‘노포’ 이야기를 꺼냈다. “이것도 하나의 전통이라고 하면 전통 아닌가요. 어디 순댓국집이 유명하다 그러면 백 년 된 집이라도 찾아가잖아요. 이익에 눈이 멀어서 사람들을 쫓아내는 건 아니라고 봐요.”

세운상가 옥상에서 종묘 방향으로 바라본 모습. 주영재 기자
세운상가 옥상에서 종묘 방향으로 바라본 모습. 주영재 기자


상인 사이에선 이미 상권이 죽어 개발이 불가피하다고 보는 쪽도 있고, 리모델링을 통해 활성화를 꾀할 수 있다는 의견도 있었다. 다만 재개발의 실현 가능성이나 이후 상권 활성화에는 회의감이 컸다. 테크노마트와 가든파이브 같은 대체 상가 이주가 실패한 트라우마가 깊고, 세운지구에서 먼저 개발된 지역의 상가를 보면 미분양이 많아 사업성에 의심이 간다는 것이다.

상가 1층에서 음향 가게를 하는 안달수씨(62)는 개발이 오히려 도심 상권을 죽였다고 봤다. “원래 그 자리는 공구상가가 있었잖아요. 거기 허물고 세운3구역 분양이 몇 프로나 됐습니까. 많이 빈 정도가 아니라 지하고 어디고 다 비었어요.”

온라인으로 물건을 사는 사람이 늘고, 코로나19로 모여 노는 문화가 바뀌면서 노래방 등 전자부품을 파는 상권이 전반적으로 약화한 것도 상인들을 옥죄고 있다. 노래방 기기를 판매하는 김기호씨(65)는 “그래도 예전엔 손님이 발품 팔아서 싸게 살려고 나왔잖아요. 그때는 깎아주기도 하고 더 붙이기도 하고 흥정이 있었는데 지금은 가격 비교 사이트를 보고 오천원, 만원만 비싸도 인터넷으로 사려고 한다”면서 “상가가 허름해서 안 오는 사람은 없을 거예요”라고 말했다.

안 회장은 옮기더라도 상가들이 한데 모여 있어야 손님이 찾아올 것이라고 봤다. “여기 왜 손님들이 그래도 오는 줄 아세요. 여기 오면 공구 다 구할 수 있죠. 을지로 가면 인쇄물 다 구할 수 있는 거예요. 지금도 그러니까 지방 사람들이 한 번 차 가지고 올라와 여기 한 바퀴 돌면서 필요한 거 사서 내려가는 거죠. 인터넷이 아무리 좋다 하더라도 싸지 않아요. 여기 와서 현물을 봐야 하고, 또 업자라고 하면 좀 싸게 해 주잖아요. 그러니까 모여 있어서 그런 거지, 장지동처럼 흩어놓으면 일절 안 돼요.”

청계천 방향에서 세운상가 입구를 바라본 모습. 주영재 기자
청계천 방향에서 세운상가 입구를 바라본 모습. 주영재 기자


시 “개발이익 환수 장치 마련···공공임대상가 마련해 권리 보장할 것”

장사가 그래도 잘 되는 편인 1층 상가의 월 임대료는 약 60~80만원 선이다. 사대문 안에서 여기보다 임대료가 싼 곳은 찾을 수 없다. 더 큰 벌이를 원하는 상가 주인들은 보상만 잘해주면 팔기를 원하는 게 중론이라고 한다. 상가 소유주로 전자제품 가게를 운영하는 한 상인은 “우리 같은 경우는 여기 가게가 내 거고, 아직 젊으니까 좀 더 하고 싶지만 보상만 넉넉히 해주면 나가고 싶다는 게 대체적인 소리지요”라고 말했다.

부부가 함께 일하는데, 철거된 4구역에서 이쪽으로 건너왔다. 녹지 계획을 두고는 “해놓으면 생각보다 좋을 수 있다”는 남편과 “종묘가 있는데 그렇게까지 높이 지어도 되나”라는 아내의 의견이 엇갈렸다. 아내 이현례씨(64)는 “(세운4구역 개발이) 어느 정도 선에서 해결됐다고 했잖아요. 근데 그게 지금 엎어져 버렸어요. 계획이 다 있었는데”라고 시의 계획 변경에 의문을 표했다.

서울시는 세운~진양상가 군을 철거해 녹지 축을 만들기 위한 비용을 민간개발로 발생하는 공공기여를 환수해 마련할 계획이다. 과거 세운상가 앞에 있던 현대상가 철거 비용이 968억이었다. 세운상가는 이보다 2~3배 더 들 것으로 예상된다.

세운상가 3층의 한 점포는 갤러리로 변했다. 이곳을 비롯해 몇 곳이 더 비슷한 예술·창작 공간으로 바꼈다. 시간이 흐르면서 업종이 자연스럽게 변모할 수 있다는 증거이다. 주영재 기자
세운상가 3층의 한 점포는 갤러리로 변했다. 이곳을 비롯해 몇 곳이 더 비슷한 예술·창작 공간으로 바꼈다. 시간이 흐르면서 업종이 자연스럽게 변모할 수 있다는 증거이다. 주영재 기자


시의 설명에 따르면 남은 7개 상가군을 모두 철거하는 데는 어림잡아 1조5000억원 이상이 들 것으로 추정된다. 시 관계자는 “공공기여가 어느 정도 확보되고 예산이 마련돼야 도시시설사업(공원)으로 구체화할 수 있는데 아직은 시기가 멀어서 상인들과 이주 계획을 논의하기는 이르다”고 말했다.

세운4구역에서 나오는 개발이익은 충분히 환수할 장치를 마련했다는 입장이다. 시 관계자는 “우선 세운상가 매입에 980억, 공공임대상가 160호 공급에 약 160억, 종묘의 위상을 높일 박물관 건립에 350~400억원을 투입한다”고 설명했다. 최근 개발 계획 변경에 따른 설계용역을 공모가 아닌 수의계약으로 진행해 불거진 논란에 대해선 “다른 재건축 사례처럼 조합·건축주 재량에 속한다”고 말했다.

세운상가의 상가주들은 대략 1000명 정도로 알려졌다. 상가 매입 예산은 공원화 예산이기도 한데, 현장에서 상인, 상가주인들이 예상하는 보상액과는 차이가 꽤 있어 보였다. 서울시 측은 “공공임대상가를 준비하고 있고, 상인들의 권리가 손상되지 않도록 최대한 방안을 마련하겠다”고 밝혔다.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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