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재 은폐 지시’ 김범석에 사죄 촉구 18일 서울 서대문구 전국택배노동조합 회의실에서 열린 쿠팡의 산재 은폐 사례 발표 기자회견에서 2020년 쿠팡 칠곡물류센터에서 과로로 숨진 장덕준씨의 어머니 박미숙씨가 눈을 감은 채 참석자의 발언을 듣고 있다. 김창길 기자
7단계 세분화 대응 지침 만들어
억대 합의금으로 유족 ‘입막음’
‘조직적 은폐’시도 사례 드러나
김범석 쿠팡Inc 이사회 의장이 물류센터 산재 사망 사건 은폐를 지시한 정황이 드러난 데 이어 쿠팡이 ‘산재 대응 매뉴얼’을 마련해 조직적 은폐를 시도한 사례가 더 있다는 주장이 나왔다.
택배노동자 과로사 대책위원회는 18일 서울 서대문구 택배노조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쿠팡의 산재 은폐 의혹 사례를 공개했다. 2020년 10월 숨진 쿠팡 칠곡물류센터 야간노동자 장덕준씨의 어머니 박미숙씨가 참석했다.
물류센터에서 야간 근무를 하던 장씨는 2020년 10월12일 오전 2시 퇴근한 지 1시간 반 만에 숨졌다. 이듬해 2월 근로복지공단이 산재를 인정했지만 쿠팡은 책임을 부인했다. 유족은 2023년 3월 소송을 냈고, 쿠팡은 국회 청문회를 앞둔 지난 1월 유족과 합의했다. 김범석 당시 쿠팡 한국법인 대표가 메신저로 “그가 열심히 일했다는 기록이 남지 않도록 확실히 하라”고 지시하고, CCTV 관련 장비를 서울 본사로 옮긴 정황이 공개됐다. 박씨는 “사고 직후 쿠팡은 근로계약서와 퇴직금 정산서, 12주분의 근무 일수 자료만 제공했고 CCTV 자료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했다. 3가지 자료만으로 산재를 신청할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이 사건은 이후 쿠팡이 중대재해 대응 전략을 만든 계기가 된 것으로 보인다. 정혜경 진보당 의원실을 통해 입수한 쿠팡의 ‘중대재해 발생 시 행동 지침’을 보면, 쿠팡은 중대재해 발생 시 대응을 7단계로 세분화했다. 2021년 1월 만들어진 이 매뉴얼은 유족의 산재 신청을 차단하고 언론 접촉을 통제하는 게 핵심이다. 사고 직후 유족 중 ‘우호적 소통 채널’을 확보하고, CCTV 등 영상 사용과 자료 공유를 금지하도록 했다. 장례식장에 대응팀을 배치해 외부 정보 유입도 관리하도록 했다. 또 노조·언론·집회 동향을 수시로 파악해 공유하도록 했다. GR(대관)팀을 중심으로 고용노동부의 작업중지 명령을 막고, 국회의원실의 관심도를 파악해 이슈 확산을 차단하도록 했다.
대책위가 공개한 사례들은 이 매뉴얼이 실제 작동했음을 보여준다. 지난 5월 심야배송 중 숨진 정슬기씨 유족이 제공한 녹취록에 따르면 쿠팡 대리점 대표는 합의금 1억5000만원을 제시하며 “저 같으면 산재 신청 안 한다. 기간도 오래 걸리고 보장이 없다”고 회유했다. 지난해 뇌출혈로 숨진 새벽배송 택배노동자 건에서도 병원에 상주하던 쿠팡 대리점 대표가 노조 방문 사실을 알고 사전에 제안한 위로금 액수를 억대로 추가해 유족과 잠정 합의가 이뤄지며 보도가 차단됐다.
김광창 민주노총 서비스연맹 위원장은 “김범석 의장의 행위는 산업안전보건법상 산재 은폐죄와 원인 조사 방해죄, 형법상 증거인멸교사에 해당한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