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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왜 삼성을 떠났나] ①‘엉뚱한 섬’에 떨어진 엔지니어들
석·박사급 인재 전문성 간과한 탁상인사 행정
美 스탠퍼드대 박사 “삼성 반도체서 할 수 있는 업무 없었다”
특허 내고 성과 냈지만 경영진 무관심에 이직 택해
“인재 많지만 적재적소에 배치 권한 무너져… 삼무원 경영진이 문제 외면”

한국 반도체 산업을 이끌었던 삼성전자가 인공지능(AI) 열풍으로 급변하는 반도체 시장에서 쇠락하고 있다. 올 2분기 고대역폭메모리(HBM) 사업 부진과 함께 파운드리 사업에서도 대규모 적자를 내며 ‘실적 쇼크’를 기록했다. 조선비즈는 삼성전자 반도체(DS)부문에서 근무했던 석·박사급 엔지니어들을 만나 삼성 반도체의 구조적인 문제를 짚어봤다.[편집자주]

그래픽=손민균

미국 스탠퍼드대에서 반도체 발열 제어로 석·박사 학위를 받은 A(38)씨는 2020년, 실리콘밸리 기업들의 러브콜을 뒤로 하고 삼성전자에 입사했다. ‘반도체의 적’이라고 불리는 열을 잡는 최고의 전문가라는 자부심이 있었다. 하지만 삼성전자 입사 후 3년간 그의 전문성은 단 한 번도 펼쳐볼 수 없었다. 그의 이력과는 무관한 직무에 배치됐기 때문이다. 발열 데이터를 분석하는 직무는 발령이 난 사업부에 존재하지 않았고, 수차례 부서 이동을 호소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결국 그는 반도체 칩 설계에 필수적인 시뮬레이션 소프트웨어를 개발하는 세계적인 반도체설계자동화(EDA) 기업으로 이직했다.


첨단 패키징 기술 전문가인 B(40)씨는 미국 유명대에서 학위를 받고 연구원 생활을 하다 삼성전자 파운드리 사업부에 합류했다. B씨를 맞이한 팀장은 ‘인텔 패키징 사업부 출신’이라는 화려한 이력을 가진 걸로 돼 있었다. 하지만 실상을 알고 보니 인텔에 인수된 소프트웨어 회사 출신이었다. B씨의 팀장은 차세대 패키징 프로젝트에 대한 이해도가 전무했고, 팀에 할당된 프로젝트도 제대로 돌아가지 않았다. 인사 담당 조직이 ‘인텔’이라는 이름만 믿고 검증 없이 채용한 결과였다. B씨는 기술적 논의가 불가능한 리더 밑에서 일해야 하는 난감한 현실을 마주해야 했다.


한국 반도체 산업을 대표하는 삼성전자를 떠나는 핵심 엔지니어들의 행렬이 이어지고 있다. 삼성전자 전체 직원을 기준으로 퇴사자 숫자는 2022년 6189명에서 지난해 6459명으로 늘었다. 특히 반도체(DS)부문 석·박사급 인재들의 이탈에 위기감이 커지고 있다는 게 삼성전자 안팎의 전언이다.

10일 조선비즈 취재를 종합하면 다수의 전직 삼성전자 엔지니어들은 개개인의 전문성을 고려하지 않은 인사와 보수적이고 현장 상황에 무지한 경영진의 탁상행정을 문제로 꼽았다. 조선비즈가 만난 전직 삼성 반도체 엔지니어들은 대부분 2017년 이후 회사를 떠났다. 권오현 전 회장 퇴임 이후 사업지원TF가 반도체 부문에 대한 인사, 재무 등의 권한을 완전히 장악하면서 오랜 기간 삼성 반도체가 지켜온 독립성과 전문성을 잃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연구개발(R&D)이나 설비투자마저도 일일이 점검받아야 하는 체제로 바뀌면서 반도체 경영이 위기에 봉착했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소수의 천재가 항공모함을 움직인다’는 시스템 반도체 사업에서 핵심 인재 유출은 미래 경쟁력 상실의 적신호가 될 수 있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메모리 사업부에 비해 처우나 근무 환경이 열악한 시스템LSI, 파운드리 사업부의 존립을 걱정하는 목소리가 많았다. 두 사업부는 지난 수년간 실적 부진과 회사 안팎의 비판으로 내부 사기마저도 크게 저하된 상황이다.

그래픽=손민균

“팀장이 프로젝트를 모른다”… R&D 지속성 무너져
지난해 SK하이닉스로 이직한 C(38)씨는 카이스트에서 재료공학을 전공하고 삼성전자 파운드리 사업부에서 핀펫(FinFET) 등 첨단 공정을 담당했었다. 그는 “과거에는 메모리 사업부에서 좌천되듯 넘어온 임원들의 파운드리 사업에 대한 몰이해가 문제였다면, 최근엔 외부에서 온 리더들이 담당 공정 외에 전체 프로세스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더 큰 문제”라고 했다.

C씨는 “파운드리 공정은 수많은 공정 간의 호흡이 중요한데, 리더가 전체를 보지 못하면 문제 해결과 공정 고도화 전략 수립이 지연된다”며 “결국 부담은 기존 인력의 몫이 되고 만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전문성을 발휘하기 어려운 환경에, 메모리 사업부 대비 고질적인 처우 격차와 승진 기회 부족이라는 박탈감까지 더해져 이직 외에는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고 토로했다.

리더십 문제는 삼성 반도체의 오랜 병폐라는 지적이 나온다. 삼성전자 책임연구원 출신으로 서울 사립대에서 교수로 재직 중인 D씨는 “15년 전과 지금의 조직문화가 달라진 게 없다”고 했다. 그는 “메모리 사업부에서 온 임원이 사업을 이해하는 데 1년, 공동 프로젝트에 착수하는 데 2년이 걸린다. 3년 차가 되면 다른 사업부로 좌천되거나, 회사를 떠나는 사이클이 10년 넘게 반복되고 있다”며 “R&D의 핵심인 ‘지속성’이 완전히 무너진 상태”라고 했다. 그러면서 “과거에도 도전적인 R&D는커녕, ‘사고만 치지말라’는 문화가 팽배했는데 이런 문화가 아직까지 변화되지 않고 있어 답답한 심정”이라고 했다.

삼성 반도체의 채용과 내부 조직을 경험한 한 전직 엔지니어는 총체적인 인사 시스템의 문제를 지적했다. 서울대에서 기계공학 석·박사 학위를 받은 뒤 삼성전자 패키징 관련 부서 등을 거쳐 현재 글로벌 EDA 기업에서 근무 중인 한 반도체 전문가는 “능력 없는 팀장들이 자신들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 유능한 인재를 제대로 평가하지 않는다”며 “인사 조직은 어떤 인재가 필요한지에 대한 깊이 있는 고민 없이, ‘어디 출신을 뽑아야 한다’는 KPI(핵심성과지표)에만 혈안이 되어 있다”고 했다.

“‘높은 분’을 이해시켜라”… 보고서 문화에 좌절하는 엔지니어들
서울 삼성전자 서초사옥. /연합뉴스

엔지니어 개인의 전문성과 성과를 존중하지 않는 문화가 조직 전체의 혁신 동력까지 잠식하고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AI 시대의 핵심인 ‘속도’와 ‘유연성’을 잃어버렸다는 것이 전직 엔지니어들의 공통된 진단이다.

미국에서 전자공학 석·박사를 마치고 삼성전자 시스템 반도체 엔지니어로 근무하다 스타트업을 창업한 E씨는 “AI 시대에 적합한 제품을 만들기 위해서는 스피드와 집중력이 생명인데, 삼성 같은 대기업의 톱다운 방식 의사결정 구조로는 혁신이 불가능하다”고 했다. 그는 “새로운 아키텍처를 시도하는 프로젝트가 복잡한 보고 라인과 재무적 관점의 검토 과정에서 지연되거나 반려되는 일이 부지기수”라며 “삼성이 제조에 강점이 있지만, 그 성공 방식이 AI 시대에는 통하지 않는다”고 했다.

‘안정’만을 추구하는 보수적인 선택이 성장의 발목을 잡았다는 비판도 나왔다. 삼성전자 시스템LSI 사업부에서 20년 가까이 근무하며 설계자산(IP)을 개발하던 AI 반도체 기업 임원은 “퀄컴이 모바일 애플리케이션 프로세서(AP)에서 축적된 역량으로 자동차, 사물인터넷(IoT) 등으로 사업을 확장할 때, 삼성은 시스템LSI를 모바일 AP만 만드는 회사로 스스로 격하시켰다”고 말했다. 그는 “자체 모뎀칩 기술 등 충분한 역량이 있었음에도, 리더십 부재와 보수적인 사업 운영으로 다양한 분야로 확장할 기회를 놓쳤다”고 했다.

그는 “반도체 IP는 회사의 창의력과 개발 능력을 통해 반도체 시장의 4~5년 뒤까지 내다보는 최첨단 프로젝트”라며 “자체 IP 개발을 통해 중장기적으로 삼성의 시스템 반도체 사업 역량을 키우고자 하는 엔지니어들이 많았다. 상당한 실력을 갖춘 엔지니어들이 다양한 프로젝트를 제안하고 특허까지 출원해 등록할 정도의 성과를 냈지만, 경영진은 ‘우리가 알아들을 수 있는 보고서를 제출하라’는 얘기뿐이었다”고 말했다. 이어 “고답적인 보고서 문화와 글로벌 반도체 산업에 대한 이해도 부족이 많은 인재들이 회사를 떠나게 했고 그들 중 일부는 ARM이나 브로드컴 등에서 높은 보수를 받으며 근무하고 있다. 이런 성공 사례를 본 엔지니어들이 지금 회사에 남아있고 싶겠는가”라고 말했다.

김기찬 가톨릭대 경영학부 명예교수는 “삼성전자 내부에 인재가 많지만, 그들이 적재적소에 쓰일 수 있는 권한 부여 체계가 무너졌다”며 “(삼성 반도체의 전성기였던) 권오현 전 회장 체제에서는 ‘성과는 돈으로 보상하고, 능력은 승진으로 보상하라’는 확고한 기조가 작동했지만, 지금은 흔적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망가졌다. 총체적인 점검의 계기가 필요하지만 내부적으로 완전히 관료화된 ‘삼무원(삼성공무원)’ 경영진이 이 문제를 외면하고 있다”고 했다.

조선비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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