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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성에 무너진 잠, 지옥 같았던 밤
확성기 꺼지자 다시 열린 창문
'평화는 아이가 곤히 잠들 수 있는 밤'
지난 2024년 11월 20일, 안효철 당산리 이장이 찡그린 얼굴로 소음 측정기를 손에 쥐고 있다(왼쪽 사진). 당시 북측이 쏟아내던 대남 소음 방송의 크기는 70데시벨(dB)을 넘나들었다. 이는 가까이 있는 청소기 소리에 버금가는 수준이다. 그로부터 7개월 뒤 안 이장이 다시 카메라 앞에 섰다. 그사이 대남 방송은 멎었고, 그의 손에는 소음계 대신 들깨 모종이 들렸다. 강화=하상윤 기자


지난 1년, 인천 강화군 송해면 당산리 마을의 밤은 잠들지 못하는 시간이었다. 24시간 내내 북한에서 들려오는 대남 소음 방송은 귀를 파고드는 고주파와 정체 모를 괴성으로 가득했다. 아이들은 밤마다 이불을 뒤집어썼고, 어른들은 탄식하며 파란색 수면제를 삼켰다. ‘소리 고문’이라는 표현이 과하지 않았던 그 시간, 주민들은 하루하루를 전쟁 치르듯 버텼다. 약 1년 만에 이곳에 고요가 돌아왔다. 지난 6월 11일 오후 2시, 대통령 지시로 우리 군이 전방 대북 확성기 방송을 중단했고, 같은 날 북한도 이에 호응하며 대남 방송을 멈춘 것이다. 광대 웃음도, 늑대 울음도, 귀신 비명도, 쇳소리도 일시에 멎었다. 7개월 만에 다시 찾은 당산리 마을에서, 회귀한 일상의 모습을 기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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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0데시벨의 공습··· 밤마다 전쟁 중인 접경지 [하상윤의 멈칫]
(www.hankookilbo.com/News/Read/A2024112115450000928)

이재명 대통령이 당 대표 시절이던 지난 2024년 10월 31일 인천 강화군 송해면 당산리 마을회관을 찾아 안효철(왼쪽 첫 번째) 이장을 비롯한 대남 소음 방송 피해주민들과 간담회를 하고 있다. 안 이장은 당시를 회상하며 "이 대통령이 우리 요구 사항을 잊지 않고 있다가, 취임 일주일 만에 실행에 옮긴 거죠"라고 설명했다. 강화=하상윤 기자


강화군 송해면 주민 안금자(왼쪽)·이용호씨 부부가 철책 아래 들녘에서 서리태 모종을 심던 중 사진 촬영에 응했다. 한해 전 귀농한 막내 아들네와 함께 농사를 짓고 있는 안씨는 "강아지(콩이) 데리고 나와서 새소리 들으며 흙 밟고 있는 지금 이 시간이 평화롭게 느껴진다"라며 "계속 오늘만 같았으면 좋겠다"라고 말했다.


“그 진저리 나는 소리가 일 년 만에 멈췄어요. 이제 정말로 살맛이 납니다. 모처럼 시름없이 밭에 나와 일하고 있네요.”


지난 6월 25일 당산리 마을에서 만난 안효철(67) 이장은 들깨 모종을 손에 든 채 ‘살맛 난다’라는 말을 반복했다. “작년 이재명 대통령이 당대표 시절 마을회관에 왔을 때, 우리가 입을 모아 토로했던 것은 단 한 가지였습니다. 대북 방송을 먼저 꺼달라는 것 그거 하나.” 안 이장은 당시를 회상하며 “이 대통령이 우리 요구 사항을 잊지 않고 있다가, 취임 일주일 만에 실행에 옮긴 거죠”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그는 “우리도 그렇게 괴로웠는데, 저들도 마찬가지 아니었겠나”라며 “이 땅에도 저 땅에도 모처럼 찾아온 평화를 지켜달라”고 말했다.

소리에 짓눌려 있던 일상이 회복되며 주민들이 각자의 삶터로 돌아왔다. 당산리 주민 안순섭씨가 소음 방송이 극에 달하던 지난해 11월(왼쪽 사진) 이후 7개월 만에 다시 카메라 앞에 섰다. 그는 "통일을 하자는 게 아니라, 최소한의 평화를 지켜달라는 것"이라며 "정치와 일상의 평화가 밀접하게 연결돼 있음을 실감한다"라고 밝혔다. 강화=하상윤 기자


“막상 지나고 보니 허무하죠. 서로 한발만 양보하면 됐을 일을 고집만 내세우고 정치를 소홀히 해 그렇게까지 키웠던 게 아닌가 싶어요.”


5대째 당산리에 살고 있는 안순섭(70)씨는 지난 1년간 농장을 덮쳤던 소음을 떠올리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의 농장에서는 어린 사슴들이 이상행동을 보이다 죽는 일이 이어졌고, 염소의 사산도 빈번했다. 이들 동물은 사람보다 월등히 넓은 가청 주파수 범위를 갖고 있기 때문에 소리에 훨씬 예민하다. 안씨는 “작은 빗방울 소리에도 반응하는 이 동물들이 그간 받았을 스트레스를 다 헤아릴 수 없습니다”라면서 “사람이나 짐승이나 시끄러운 세상에선 숨을 쉴 수 없어요”라고 말했다.

당산리 주민 조경자씨는 7개월 만에 다시 만난 기자에게 직접 농사 지은 오이와 감자를 내밀었다. 조씨는 "요즘은 검은콩, 메주콩, 파란콩, 들깨 심느라 바쁜 철이다"라며 "요란했던 세월을 생각하면 가끔 머리가 지끈거리지만, 그래도 지금은 아주 살만하다"라고 말했다. 강화=하상윤 기자


“약 없이는 단 하루도 잠에 들 수 없었어요. 매일 밤이 지옥 같았죠. 1년 가까이 수면제를 먹다 잠이 다 망가져 버렸어요. 어제도 꼬박 날밤을 새웠네요.”


대남 방송 탓에 수면 장애가 생긴 조경자(79)씨는 보름 전부터는 수면제 복용을 끊었다. 그의 집은 북한 황해북도 개풍군 대성면 해창리 인근 대남 방송 확성기로부터 약 1.8㎞ 떨어져 있다. 맑은 날엔 맨눈으로 북한군 초소와 확성기가 또렷하게 보일 정도로 가까운 거리다. 시·군청의 도움으로 방음 창호를 설치하며 실내 소음 수준은 소폭 개선됐지만, 이런 조치가 그에게 단잠을 가져다주진 못했다. 그는 “평화가 일상을 이렇게나 들었다 놨다 할 수 있다는 걸 알았으면 좋겠어요”라며 “아이들이 마음 놓고 밖에서 뛰어노는 모습을 앞으로도 계속 보고 싶습니다”라고 말했다.

약 반년 만에 다시 만난 당산리 주민 김옥순씨는 한 뼘쯤 자라난 서리태 모종을 들고 서서 "바람 소리, 새 소리, 라디오 소리 들으며 들에 나와 있는 이 시간이 너무너무 감사하고 행복하다"라고 말했다. 강화=하상윤 기자


“(대남) 방송이 안 나오니 날아갈 것 같아요. 저녁마다 손주들과 손잡고 동네 한 바퀴 걸을 때면 행복을 느낍니다.”


집 앞 뜰에서 서리태 모종을 심고 있던 김옥순(66)씨는 바람 소리와 새 소리가 교차하는 고요 속에서 여러 번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발 딛고 선 콩밭 뒤로 북한 대성면 전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김씨는 “대통령이 약속을 지켜주어 감사합니다”라며 “평화는 거창한 게 아니라, 아이들이 곤히 잠들 수 있는 밤이 아닐까 생각해요”라고 말했다. 그는 지난해 10월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한 달이라도, 그게 어렵다면 단 일주일만이라도 우리 군이 먼저 대북 방송을 멈추는 걸 고려해달라”고 언급한 바 있다. 김씨와 함께 사는 손녀 문서영(9)양은 지난달 이재명 대통령에게 보낸 그림 편지에서 이렇게 썼다. “대남 방송 안 틀어서 행복, 평화가 찾아왔다. 아파하고 힘들어하는 사람 없는 대한민국을 만들어주세요.”

당산리 주민 김옥순씨 손녀 문서영(9)양이 지난 6월 14일에 이재명 대통령에게 보낸 그림 편지. 안미희씨 제공


편집자주

인디언에겐 말을 타고 달리다 '멈칫' 말을 세우고 내려 뒤를 돌아보는 오래된 의식이 있었습니다. 발걸음이 느린 영혼을 기다리는 시간이라고 합니다. [하상윤의 멈칫]은 치열한 속보 경쟁 속에서 생략되거나 소외된 것들을 잠시 되돌아보는 멈춤의 시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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