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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상 논설주간
5년짜리 단임 대통령의 숙명은 전임자와의 대결이다. 새 대통령은 전임자 부정으로 임기를 시작한다. 정권 교체든, 아니든 다를 바 없다. 망상적인 계엄 사태로 집권한 이재명 대통령의 윤석열 정권 청산은 말할 것도 없다. 우리나라 전체 검사 인력의 6%(120명)가 동원돼 동시에 굴러가는 3개의 특검이 웅변한다.

전임자 극복이란 면에선 이 대통령은 역대 어느 정권보다 유리하다. 상대의 수준이 워낙 낮기 때문이다. 법적 심판이 남긴 했지만, 윤 전 대통령에 대한 여론의 심판은 이미 끝난 상태다. 특검에서 ‘법불아귀(法不阿貴, 법은 귀한 자에게 굽신대지 않는다)’라는 단어로 수사의 출사표를 던졌는데, 그런 비장한 용어가 필요할까 싶을 정도다.

비상식 윤석열은 너무 쉬운 적수
전 정권 극복에 자족해서는 곤란
새 국정 철학으로 내건 실용주의
끊임없는 현실의 시험 이겨내야

윤 전 대통령의 비극은 검찰 수사팀장 정도에 딱 어울리는 리더십을 지닌 채 국정 최고책임자로 직행했다는 점이다. 단 한 번의 선출직 경험도 없이 대선에서 이긴 그는 대통령이란 자리를 우습게 봤다. 정치를 배울 기회도, 필요도, 의지도 없었다. 반면에 이 대통령은 시장·도지사·국회의원·대통령까지 여섯 번의 선거에서 승리했다. 간난신고(艱難辛苦)에도 살아남은 그의 정치적 감각은 동물적이다. 이런 감각으로 대선에서 ‘우클릭’으로 비어 있는 중간지대를 장악했고, 집권 후에는 ‘실용’으로 중도층에 어필하고 있다. 취임사에서 뜬금없다 싶을 만큼 ‘자유’를 35번이나 외치며 자신의 입지를 극우의 틀 안에 가둔 전임자와 대비된다.

정권 초반 분위기는 나쁘지 않다. 총리 후보자를 둘러싼 잡음이 있지만, 심각한 위기로 발전할 가능성은 작아 보인다. 비교적 참신한 장관 인선, 야당과의 협치 의지, 무난히 치른 외교 데뷔전 등이 나름의 호평을 받았다. 그러나 이런 평가가 상당 부분 전임자와의 비교에서 오는 ‘기저 효과’때문임을 잊어선 곤란하다. 이 대통령의 행보는 사실 상식 수준일 뿐이다. 이상한 정치를 워낙 많이 본 탓에 이런 상식마저 신선하게 와닿는 것이다. 이 정도를 ‘성과’로 자찬하며 자족한다면 민망한 일이다. 이 대통령의 상대는 윤석열이 아니다. 진짜 상대는 ‘5년 후 이재명’이다.

이 대통령은 지난주 캐나다 G7 정상회의로 가는 전용기 안에서 “임기를 마칠 때 지지율이 더 높았으면 한다”고 말했다. 정말 그렇게 된다면 한국 정치의 새 역사를 쓰게 된다. 단 한 번의 예외 없이 대통령의 실패를 봐왔던 터라, 그에 대한 지지 여부를 떠나 이 희망이 이루어지길 바란다. 그러나 대통령의 지지율이 시간이 갈수록 하락하는 것은 법칙에 가깝다. 이를 설명하는 여러 이론이 있지만, 대체로 ‘가치’와 ‘현실’ 사이의 괴리를 주목한다. 후보나 정당이 더 많은 표를 얻기 위해 가공·생산한 가치가 현실에 적용되는 과정에서 그 실상을 드러내면서 대중의 기대가 실망 혹은 환멸로 바뀐다는 것이다(문우진 아주대 교수 2012년 논문).

이 대통령으로선 실용주의가 ‘표를 얻기 위해 가공·생산한 가치’인 셈이다. 관건은 이 가치가 현실과 부닥치는 과정에서 실망이나 환멸로 바뀌지 않게 하는 것이다. 당장 닥친 시험대는 ‘노란봉투법’이나 양곡법, 상법 개정안 같은 경제 관련 법안들이다. 야당으로 투쟁할 때는 선명성만 내세우면 그만이지만, 국정 운영자가 된 이상 정책의 명암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독소조항을 무시하고 그냥 통과시키면 ‘실용주의’에 의문점이 찍히고, 미적거리면 표를 준 지지층의 압박에 시달리게 된다. 현실적으로는 부작용을 최소화한 절충안을 마련해 이해당사자들을 설득해야 하는데, 쉽지 않은 작업이다. 전임 정부에서 양곡법에 반대했던 송미령 농림장관을 유임시킨 것도 여당 인사로는 추진하기 힘든 대안을 마련해 보라는 심산이었을 터. 하지만 당 내외에서는 “농민을 기만했다”는 반발이 터져나왔다.

실용주의 깃발을 내릴 생각이 아니라면 이재명 정부는 임기 내내 이런 시험에 들 수밖에 없다. 실용주의는 정치적으로 유리한 점보다는 불리한 점이 많다. 시간이 갈수록 안팎으로부터 호응보다는 공격을 받을 가능성이 크다. 자칫 집토끼도 놓치고 산토끼도 놓친다. 하지만 이 어려운 길을 가기로 한 이상, 실용주의 철학의 핵심을 다질 필요가 있다. 진리는 절대적이지 않다는 개방성과 겸허함이다.

실용주의가 무원칙이나 임기응변 정도로 전락하지 않으려면 일관성은 물론 자기성찰이 필요하다. 거대 여당 민주당에는 부족한 체질이다. 정치인이 정치적 에너지원인 지지층을 외면할 수는 없다. 하지만 ‘모두의 대통령’이라면 지지층을 향한 ‘응집’과 비지지층을 향한 ‘확장’ 사이의 균형점을 찾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야 한다. 중도층의 비호감 대상이 돼버린 당내 강경파들부터 제어해야 한다. 과거의 정치로 돌아가는 잔도(棧道)를 끊겠다는 용기가 필요하다. 이 대통령이 약속한 개헌이 그 길이 될 수 있다. 이 대통령이 ‘5년 후 이재명’과의 대결에서 승리하기를 기원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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