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스피싱 이미지. 그래픽 김주원
“송진호(34·가명)씨 되시나요? 법원 등기 관련해서 연락드렸습니다.”
악몽은 지난달 26일 오후 3시25분 한 남성에게서 걸려온 전화에서 시작됐다. 자신을 법원 직원이라고 소개한 남성은 ‘010’으로 시작하는 번호에 친절한 서울 말투를 썼다. 그는 등기 자택 수령과 인터넷 열람이라는 두 가지 선택지를 제시했다. 송씨는 당연히 간편한 인터넷 열람을 택했다. 그러자 남성은 인터넷 주소창에 ‘법원등기열람24.kr’을 검색하라고 안내했다.
여느 법원 홈페이지처럼 생긴 사이트였다. 남성이 불러준 사건번호를 기입하니 송씨의 이름, 주민등록번호 앞자리가 적힌 공문서가 나왔다. 심우정 검찰총장을 사칭한 직인이 찍힌 ‘특급 안건’ 문서에는 “김○○의 1심 형사사건을 조사하던 중 대포통장과 불법자금을 세탁한 사기 사건에 관련성이 있다는 정황을 확인했다”며 “금융거래 추적 수사·범죄수익환수 수사를 받음과 동시에 계좌양도나 명의도용 피해자라는 것을 본인 스스로 해명해야 한다”고 적혀 있었다.
송진호(34·가명)씨는 지난달 26일 검찰을 사칭한 보이스피싱 일당 조직에 속아 1억6250만 원을 뜯겼다. 사진은 일당이 사용한 위조 공문서. 사진 송씨 제공
송씨는 “지금 보면 위조 문서지만 당시엔 남성의 말을 믿게 된 결정적 계기였다”고 말했다. 남성은 “송씨 계좌가 범죄에 연루돼 180명의 피해자와 4200만 원의 피해가 발생해 수사가 불가피하다”면서 담당 검사를 연결했다. 10초도 지나지 않아 사이버수사팀장을 맡고 있다는 김민수 검사라는 남성이 전화를 받았다. 김 검사는 사건에 ‘엠바고’가 걸려 있기 때문에 주변에 말하면 영장을 청구해 서울구치소로 보내거나 가족과 직장에도 불이익을 줄 수 있다고 으름장을 놨다.
그러면서 김 검사는 “피해자 입증이 되면 약식조사를 받는 선에서 마무리될 수 있다”고 송씨를 달랬다. 그는 송씨에게 공기계를 하나 사서 인근 모텔로 가라고 지시했다. 피해자 입증을 위한 ‘보호관찰’ 절차라고 설명했다. 지시에 따라 ‘Teamviewer Host’라는 애플리케이션도 설치했다. 휴대전화 원격조종 앱이었는데 송씨가 사건 내용을 유출하는지 확인하는 용도라고 했다. 하지만 실시간 감시와 수·발신 내역을 조작하는 악성 앱 설치를 위한 함정일 뿐이었다.
얼마 뒤 금감원 대표번호인 1332로 전화가 걸려왔다. 검찰과 공조하고 있는 김성욱 금감원 과장이라고 소개한 남성은 송씨 때문에 자신도 곤란하게 됐다면서 귀찮은 티를 냈다. 쩔쩔매는 송씨에게 김 과장은 모텔에서 일정 기간 협조해야 ‘신원 보증서’를 받을 수 있다고 말했다. 그 길로 송씨는 직장에 휴가를 냈다.
대전동부경찰서 용전지구대 경찰관들은 지난달 2일 "친구가 보이스피싱 범죄를 당한 것 같다"는 신고를 받고 출동, 모텔에 있던 피해자를 40분간 설득해 피해를 예방했다. 사진 대전경찰청
두 사람은 송씨의 외부 접촉을 완전히 제한했다. 허락 없이 휴대전화를 조작하면 바로 “구속되고 싶냐”는 협박 전화가 걸려왔다. 기상과 취침, 식사도 허락을 받아야 했다. 피해자에 대한 반성문도 수십 장을 쓰라고 지시했다. 검사는 선한 역할, 금감원 직원은 악역을 맡아 심리를 조종했다.
송씨가 완전한 심리적 지배 상태에 놓이자 두 사람은 자금 이전을 지시했다. 송씨 계좌를 통한 피해가 있었기 때문에 국가의 안전한 계좌로 현금을 옮겨야 한다는 논리였다. 조사가 마무리되면 돈을 다시 돌려준다고 했다. 송씨는 예금, 주식 계좌를 헐어 송금했다. 은행에 공범이 있어 수사상 필요하다는 이유로 연 12.7%의 6140만원 대출도 받게 했다. 이렇게 송씨는 총 1억6250만원을 일당에게 넘겼다.
송씨는 모텔에 갇힌 지 15일 만인 지난 10일 보호관찰이 해제됐다고 통보 받았다. 일당의 지시에 따라 신원 보증서를 찾기 위해 금감원을 방문한 뒤에야 송씨는 보이스피싱에 당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송씨는 지난 12일 서울 영등포경찰서에 사건을 접수했다. 금감원을 관할로 두는 영등포서에는 검사와 금감원 직원의 역할을 분담해 사칭한 형태의 유사 사건이 수십 건 접수되고 있다고 한다. 4년제 대학을 나온 평범한 직장인인 송씨는 “내가 보이스피싱을 당할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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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사기관, 출석 조율 외에 전화로 사건 조사하지 않아”
경찰청에 따르면 지난해 보이스피싱 전체 피해액은 8545억원으로 역대 최고치를 경신했다. 지난 2021년 7744억원에서 2023년 4472억원으로 줄어들던 피해액이 두 배 가까이 늘어났다. 기관사칭형 보이스피싱 범죄의 경우 전체 피해자 9519명 중 5501명(57.7%)이 20·30 청년층으로 집계됐다.
보이스피싱 수사 경험이 많은 다른 경찰관(경감)은 “심리 조작형 수법이 최근 유행하는데 고위 공무원, 기자, 심지어 경찰 피해자도 있다”면서 “피싱 조직은 직장인처럼 회의와 연습을 거듭해 최상의 시나리오를 짜기 때문에 누구든 걸려들 수 있다”고 했다. 보이스피싱 수사 전문인 한 경찰관(경정)은 “법원이나 수사기관은 출석 조율 외에 전화로 구체적인 사건 얘기를 하지 않는다고 생각해야 피해를 예방할 수 있다”며 “보이스피싱 시나리오를 감지해 경고해주는 통신사 앱을 까는 것도 방법”이라고 조언했다.
중앙일보
이영근 기자 [email protect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