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릭 테오 주한 싱가포르 대사
에릭 테오 주한 싱가포르 대사는 중앙일보 인터뷰에서 '아시아의 네 호랑이'로 불렸던 싱가포르가 아시아 최초로 1인당 국민소득이 9만 달러를 돌파해 세계 4위의 부자 나라가 된 비결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김종호 기자
대한민국·대만·홍콩·싱가포르는 196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 고도 경제 성장을 경험한 공통점이 있다. 국제사회는 ‘아시아의 네 마리 용(Four Asian Dragons)’ 또는 ‘아시아의 네 호랑이(Four Asian Tigers)’로 불렀다. 네 나라 모두 선진국 대열에 진입했지만, 유달리 싱가포르의 성장세가 눈에 띈다.
국제통화기금(IMF)의 2025년 1인당 국민소득(GNI) 추정치를 보면 한국은 3만4642달러인데, 싱가포르는 9만2932달러다. 싱가포르의 1인당 소득이 홍콩(5만6031달러)·대만(3만6319달러)보다 많은 것은 물론이고, 한국의 3배에 육박할 정도로 부유하다.
한국은 3만 달러 선에서 정체 중인데 싱가포르는 아시아 최초로 1인당 국민소득 9만 달러 선을 넘어 세계 4위의 부자 나라가 된 비결은 무엇일까. 양국 수교 50주년(8월 8일)을 맞아 궁금증을 풀기 위해 에릭 테오(張文喜·54) 주한 싱가포르대사를 만났다. 2019년 8월 부임 이후 만 6년간 일해온 그는 2018년 6월 싱가포르 외교부 동북아국장 재직 시절에는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을 2박3일간 옆에서 안내한 경험이 있다. 싱가포르국립대에서 한국어를 가르치던 부인 김민재(49)씨와 결혼해 ‘대한민국의 사위 대사’로 불린다.
에릭 테오 주한 싱가포르대사는 아시아에서 처음으로 싱가포르의 1인당 국민소득이 9만 달러를 돌파한 비결에 대해 “장기적인 국가 전략에 따라 정치적 안정을 이루고 유능한 지도자들이 국민의 삶을 개선하기 위해 노력했다” 고 강조했다. 김종호 기자
Q : 한국 생활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은.
A :
“가족과 함께 한국의 거의 모든 지역을 여행했다. 한국은 생동감과 역동성, 현대와 전통이 나란히 공존한다는 사실이 가장 눈에 띄었다. 특히 소프트 파워의 매력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아내는 일과 사생활 모두에서 도움을 준 ‘비밀 무기’였다. 한국은 열심히 일하고 규율을 지키는 인적자원 개발에 집중해 경제적 성공의 기적을 일궜다. 오늘날 한국과 싱가포르는 저출산·고령화 시대에 발맞추기 위한 교육개혁 필요성 등 비슷한 과제에 직면해 있다. 한국은 미래를 위해 더 많은 외국 인재와 노동력을 수용할 수 있도록 개방 속도를 결정해야 할 것이다.”
정치안정에 싱가포르 고속성장 미래 생길 문제, 미리 대비 가능
다국적기업 유치 한국의 50배
유일자원 인적자본 육성도 힘써
Q : 아시아 네 호랑이 중 싱가포르의 1인당 국민소득 성적표가 최고다.
A :
“국내시장이 큰 신생 독립국가들은 보호주의 정책을 채택했으나 싱가포르의 선구적인 지도자들은 65년 독립한 이후부터 수출 주도 산업화 전략을 선택했다. 산업화를 촉진하기 위해 외국인 투자를 유치하고 인프라 구축에 주력했다. 유일한 자원인 인적자본을 훈련·개발하는 데 중점을 뒀다. 지도자들은 좋은 거버넌스, 장기적인 계획, 사회 안정 유지에도 주력했다. 경제 성장을 지속하기 위해 더 많은 외국 인재와 노동력을 유치하고 금융·제약 등 신산업 육성 정책을 폈다. 한국처럼 기업의 해외시장 확대를 위해 27건의 자유무역협정(FTA)을 체결했다.”
에릭 테오 대사와 한국 출신 부인 김민재 여사가 서울 성북구 성북동 주한 싱가포르대사관저에서 함께 사진 촬영에 응했다. 김종호 기자
주한미국상공회의소(회장 제임스 김)에 따르면 한국에는 다국적기업(MNC)의 아태본부가 100개 미만이지만, 싱가포르에는 5000개가 넘는다.
Q : 다국적기업을 5000개 이상 유치한 비결은.
A :
“제조업·서비스업 등 다양한 산업에 걸쳐 미국·유럽·아시아 기업들을 유치했다. 이들은 싱가포르의 정치·사회적 안정성, 디지털 및 물리적 연결성, 정부의 각종 지원 정책, 숙련된 인력에 매력을 느낀다. 준비된 파트너와 강력한 지식재산권(IP) 보호를 갖춘 활기찬 싱가포르의 혁신 생태계는 다국적기업들이 새로운 제품과 서비스를 신속하게 출시하도록 지원한다.”
Q : 국내 정치 안정이 고속 성장에 얼마나 영향을 줬나.
A :
“싱가포르는 항상 장기적인 계획, 건전한 거버넌스, 실용주의를 중시해 왔다. 국내 정치적 안정 덕분에 미래에 발생할 수 있는 문제를 조기에 파악하고, 변화에 적응하거나 문제를 미리 완화할 수 있었다. 한국·홍콩·대만도 각각의 고유한 강점을 갖고 있으니 미래의 경제 발전을 위해 활용할 것이라고 확신한다.”
Q : 장기적인 정치 안정의 비결은.
A :
“65년 8월 9일 말레이시아연방에서 독립할 당시 싱가포르는 국토 면적이 작고(734.3㎢, 한국이 136배) 자원이 제한된 국가였다. 개인 이익보다 국익을 우선시하는 유능하고 헌신적인 지도자가 필요했다. 싱가포르 정치인들은 개인적 청렴성과 선거공약 이행 측면에서 높은 수준을 유지했다. 유능하고 정직한 지도자를 포함한 좋은 거버넌스는 작은 나라인 싱가포르의 지속적인 생존과 성공의 핵심 신념이다. 정치인들은 싱가포르가 발전하려면 유권자의 신뢰를 계속 얻고 약속을 이행해야 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결국 정치는 국민의 삶을 개선하기 위한 것이다.”
2018년 6월 10일 북·미 정상회담을 위해 싱가포르 공항에 도착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을 에릭 테오 당시 싱가포르 외교부 동북아국장(오른쪽 첫째)이 영접하고 있다. [사진 유튜브 캡처]
‘싱가포르 국부’로 추앙받는 리콴유(1923~2015)는 선임장관이던 94년 미국 외교 전문지 ‘포린어페어스(Foreign Affairs)’ 3~4월호에 실린 ‘문화는 숙명이다(Culture is Destiny)’라는 제목의 인터뷰에서 “서구적 자유민주주의는 유교 문명권에서는 적합하지 않다”고 주장했다. 김대중 아태평화재단 이사장은 그해 11~12월호의 ‘문화가 숙명인가’라는 반박성 글에서 “문화는 반드시 우리의 숙명일 수만은 없다. 민주주의가 우리의 숙명이다”라고 반박했다. 그 유명한 ‘아시아적 가치 논쟁’이다.
Q : 민주주의가 국민 행복을 위한 필요충분조건인가.
A :
“궁극적으로 어떤 유형의 정치체제를 원하느냐를 결정하고, 가장 잘 대변할 수 있는 정치인과 정당을 선출하는 것은 각국 국민의 선택이다. 싱가포르의 의회 민주주의 제도는 국가 상황을 고려할 때 그동안 잘 작동해 왔다. 정부는 국민과 협력해 싱가포르의 가치와 맥락에 맞는 조화롭고 안정적인 사회를 구축하고 보호해 왔다. 이는 싱가포르처럼 다인종으로 구성된 이주 사회에 특히 중요하다. 지난 5월 3일 총선에 13개 정당(무소속 포함)이 후보 211명을 냈다. 여당인 인민행동당(PAP)은 직전 선거보다 4%포인트 높아진 65%를 득표, 전체 97석 중 87석을 차지했다.”
Q : 인구밀도가 높은데 주택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나.
A :
“독립 초기부터 모든 싱가포르인이 저렴한 주택에 접근할 수 있도록 노력해 왔다. 55년 강제퇴직저축제도로 도입한 중앙적립기금(CPF)을 68년 공공주택사업(PHS) 실시 때부터 주택 구매를 위한 비용과 모기지 상환을 위해 인출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 국민의 약 80%가 주택개발청(HDB)이 건설한 공공주택에 거주하고, 국민의 약 90%가 주택 소유권을 갖고 있다. 정부는 주택 가격 변동을 방지하기 위해 세심하게 관리하고, 주택 가격이 저렴한 상태를 유지하도록 꾸준히 노력한다.”
Q : 경제 성장과 일자리 대책은.
A :
“싱가포르는 향후 10년간 연평균 2~3%의 경제 성장을 목표로 한다. 이를 위해 제조업과 서비스업 등 주요 경제 부문을 2배로 늘리고 정밀의료 등 신성장 분야와 녹색·디지털 경제 부문에 주력한다. 인공지능(AI)을 활용해 산업 전반에 혁신을 일으켜 생산성을 높이려 한다. 저출산과 고령화의 영향을 완화하기 위해 이민 정책을 활용한다. 계량할 수 있고 안정적인 이민 속도를 유지해 향후 인구 수요를 맞추고 있다.”
트럼프 2기 들어 미국과 중국의 패권경쟁이 더욱 치열해지면서 남중국해에 인접한 싱가포르도 한국 못지않게 영향을 받는다.
Q : 미·중 사이에서 어떤 전략을 쓰나.
A :
“항상 싱가포르의 장기적인 국익에 부합하는 원칙이 있고 일관된 외교 정책을 채택해 왔다. 우리는 반미도 반중도 아닌 장기적인 국익에 부합하는 친(親)싱가포르 전략을 편다. 도시국가로서 우리는 국제법을 준수하는 규칙 기반의 다자 국제질서와 유엔 헌장의 중요성을 굳게 믿는다. 미·중 모두와 긴밀한 소통이 매우 중요하다. 미·중 모두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기를 원한다. 싱가포르의 정책 결정은 통합된 글로벌 경제 및 안보 질서를 유지하는 원칙에 기반을 둔 것임을 미·중 양측에 거듭 강조해 왔다.”
수교 50주년 맞은 한·싱가포르 6년전 부임, 한국아내 둔 ‘사위 대사’
외교부 재직 때 김정은 안내 경험도
저출산 한국, 외국인 개방 속도내야
Q : 미·중 사이에 있는 한국의 전략을 조언한다면.
A :
“미국은 한국의 동맹국이고 중국은 가까운 이웃 국가다. 따라서 한국의 이해관계는 미·중 모두와 얽혀 있을 수밖에 없다. 한국은 두 강대국과의 관계를 능수능란하게 잘 관리해야 한다. 한국은 양국 관계의 우선순위와 상호 보완성에 따라 미·중 모두를 상대해야 한다. 외교 정책은 국내에서 시작되니 외교 정책에 대한 국민의 폭넓은 공감대를 공유하는 것이 중요하다. 내부 결속력과 단결력을 갖춘다면 변화하고 복잡한 세상을 능숙하게 헤쳐나가는 데 유리할 것이다.”
Q : 올해 양국이 수교 50주년을 맞았다.
A :
“두 나라는 천연자원 없이도 매우 유사한 경제 발전의 여정을 공유한 ‘마음의 동반자’다. 규칙에 기반을 둔 다자 국제질서 촉진 및 유지, 개방과 자유무역, 국제법 존중 등 가치를 공유한다. 한국과 싱가포르는 2005년 FTA를 체결(2006년 발효)했는데 아시아에서 싱가포르가 한국의 첫 FTA 파트너였다. 2022년에는 한국의 첫 디지털 동반자 협정 파트너였다. 양국 협력은 에너지 및 지속가능성, 디지털 경제, 인공지능(AI) 및 스타트업, 식량안보, 사이버 보안 등 다양한 분야에서 전개되고 있다. 올해 양국은 전략적 동반자 관계로 격상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앞으로 양국 협력이 더욱 심화할 것으로 기대한다.”
중앙일보
장세정 논설위원 [email protect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