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랭크뉴스 › 오른눈 잃고도 신체나이 60세…100세 장인이 매일 하는 것

랭크뉴스 | 2025.06.15 05:38:09 |
중요무형문화재 제77호 이봉주 유기장이 지난 1일 경북 문경시 가은읍 납청유기촌 전시장에서 중앙일보와 인터뷰하고 있다. 김종호 기자

" 피가 콸콸 나는데도 이럴 수가 있습니까? 당장 죽겠는데 돈 없다고 돌아가라는 게 말이 되냐고요! "
1983년 4월의 어느 날 해 뜨기 전 새벽, 다급하게 서울 강남의 한 종합병원 응급실을 찾은 남성은 작업복 차림이었다. 겨우 한 손을 갖다 댄 오른쪽 눈에선 피가 터져 나왔다. 급하게 나서느라 지갑을 두고 온 탓에 병원에선 접수조차 해주지 않았다. 피를 계속 흘리며 명동에 있는 병원으로 옮겨 응급수술을 받아야 했다.

올해 백수(白壽)를 맞은 국가무형문화재 이봉주 유기장이 42년 전 한쪽 눈을 잃은 날 얘기다. “그 시절엔 돈 없으면 병원도 안 받아줬다”며 아찔했던 순간을 회상했다.

이봉주 유기장이 지난 1일 경북 문경시 가은읍 납청유기촌 공방에서 전통 방식으로 물동이 성형 작업을 하고 있다. 김종호 기자

그는 방짜유기를 만드는 장인이다. 한쪽 눈을 잃고도 열흘 만에 다시 불 앞에 섰다. 놋쇠를 녹인 쇳물을 거푸집에 넣어 찍어내는 대신 망치로 수천 번 때려 유기를 만든다. 그릇도 만들고 징도, 꽹과리도 만든다.

600~700도 넘는 화로 앞 담금질은 지금도 계속한다. 이달 초 경북 문경 방짜유기 공방에서 만난 그는 4㎏짜리 물동이를 가뿐하게 들어옮겼다.

평생 두드린 ‘쇠질’은 유기뿐 아니라 그의 몸도 빛나게 단련시켰다. 신체 나이는 ‘60세’라는 그는 네팔 히말라야로 여행을 떠난다고 자랑했다. 가족과 직원의 걱정을 이기고 히말라야로의 100세 여행을 계획한 그만의 이유가 있었다.

〈100세의 행복〉 두 번째 이야기는 100세 유기 장인(匠人)이 주인공이다. 어떻게 지금까지 몸 쓰는 현역으로 일할 수 있는지, 이러다 죽겠다 싶었던 인생의 고비를 어떤 마음으로 이겨냈는지 강인함의 비결을 들었다.



쇠붙이 맞아 오른 눈 잃었다… 그런데도 “감사” 왜
공방 사무실 의자에 앉은 이봉주 유기장이 1983년 눈을 잃은 사고 당시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김종호 기자

“내가 인생 얘기하면 사람들이 ‘저놈 미친 소리 한다’며 못 믿겠지만 다 실제 겪은 일이다. 눈이 이렇게 됐어도 원망 같은 건 없었어” 잠시 망치질을 멈춘 그가 원래 없었던 것처럼 감긴 오른쪽 눈을 가리켰다.

사고는 순식간에 일어났다. 작업장에서 함께 일하던 조수가 망치를 내리친 순간, 쇳덩어리가 이봉주 유기장의 눈으로 날아왔다. 순간 앞이 안 보였다. 동맥이 터져서 피가 쏟아졌다. 눈은 결국 살릴 수 없었다. 안구를 적출해야 했다. 병원을 찾은 가족과 지인들은 놀라 기절초풍했다. 되려 이들에게 뱉은 그의 첫마디가 모두를 놀라게 했다.

" 이제는 그냥 한 눈만 쓰라고 하시나 보다. 눈을 두 개 주셔서 창조주께 감사하다. "
지금 떠올려도 끔찍한 사고는 평생 교훈을 하나 남겼다. 이겨냈지만 아물지 못한 상처이기도 했다. “그날부터 여태껏 지키는 게 있어요. 나는 새벽에 잠깐 화장실 갈 때도 현금을 꼭 챙겨 다녀요”



“배고픔에 손가락 잘라 넣더라” 고난 견딘 ‘멘털’
이봉주 유기장은 꼿꼿하게 선 자세로 중앙일보와 인터뷰했다. 김종호 기자

무쇠처럼 단단한 장인도 청년 시절 두려움에 떨었던 일이 있었다. 해방 후 먹고살 길을 찾아 고향인 평안북도 정주를 떠나 홀로 월남하던 1948년 겨울이다. ‘인민군에게 끌려가 죽으나, 삼팔선을 넘다 총 맞아 죽으나 마찬가지다’ 싶었다. 옥수수로 죽을 쒀 자녀들을 먹이던 어머니는 원한 맺힌 소리로 울었다. “평생 최고의 굶주림”이었다.

죽음을 각오했을 뿐, 무조건 살아야 했다. 황해도 예성강을 따라 38선을 건너다 ‘잡히면 죽는다’는 경비대를 마주쳤다. 흙구덩이에 빠지고 돌부리에 넘어지며 뛰었다. 정신없이 가다 보니 몸이 붕 떠올랐다. 낭떠러지로 떨어진 것이다. 그를 살린 건 발목에 감긴 칡넝쿨이었다.

넝쿨을 풀고 나와 웅덩이에 몸을 숨겼다. 밤새 겨울비가 쏟아졌다. 적막 속에서 마음이 약해졌다. ‘차리리 자수할까, 그럼 목숨이라도 살려주지 않을까’ 싶었다. 그때였다. 재빠르게 무언가 지나갔다. 제풀에 놀라 도망가는 노루였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 내가 도망간다면 아무도 없는데 혼자 놀란 노루 꼴이겠구나. 계획대로 남쪽을 향해 달린다. 생사는 하늘에 맡기자. "
남쪽으로 흐르는 강가를 따라 뛰기 시작했다. 한겨울에 몸을 가린 건 바지저고리에 짚신뿐이었지만, 열이 달아올랐다. 지금 생각해 보면 12월에 이토록 굵은 비가 쏟아진 적은 한평생 없었다. 그 덕에 경비를 따돌렸다. 기적이었다.

이봉주(뒷줄 오른쪽) 유기장이 군 복무 시절 전우들과 함께 있는 모습. 사진 이봉주 자서전

이후로도 오래도록 굶주림이 따라다녔다. 6·25 전쟁이 터진 1950년 12월엔 기차 짐칸 지붕에 올라타 피란을 갔다. 굶주림과 추위를 못 버틴 몇몇 아이들이 기차에서 죽었다. 부모는 숨이 끊긴 아이를 열차 밖으로 던졌다. 쫓겨날 것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1952~55년 군에 있을 땐 한 하사가 자기 손가락을 대검으로 잘라 밥통에 넣었다. 놀라서 말리자 죽일 듯이 덤벼들었다. “간만에 고깃국을 먹으려는데 왜 말리냐”는 외침에 몸이 굳었다. ‘배고픔이 괴로워 죽으려던 시절’은 마찬가지였다.

갖은 고난을 겪었지만, 그는 “스트레스를 금방 잊었다”고 말했다.

(계속)

장인은 멘탈조차 강철이었습니다.
그는 또렷한 기억력도 자랑했는데요, 해외를 나가도 매일 하는 루틴이 있다고 합니다.
또 신체 나이가 60세라는 그가 가장 좋아하는 음식도 밝혔습니다.
치아는 틀니이고, 2008년 담낭 수술을 받았지만, 식사와 소화에는 문제가 없다고 합니다.

100세에도 히말라야로 떠나는 그의 건강 비결은 뭘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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