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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남아공 인종차별 정책 종료됐지만
30년 지나도 여파… 농지 대부분 백인 소유
트럼프 진의는 DEI 반감·협상 카드 활용?

편집자주

매일 보도되는 국제 뉴스를 읽다 보면 사건의 배경이나 해당 국가의 역사 등을 알지 못해 이해하기 어려운 경우가 종종 생깁니다. 격주 금요일에 만날 수 있는 '세계는 왜'는 그런 궁금증을 쉬운 언어로 명쾌하게 풀어주는 소화제 같은 연재물입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지난달 21일 미국 워싱턴 백악관을 찾은 시릴 라마포사 남아프리카공화국 대통령에게 '백인 학살의 증거'라며 언론 보도 인쇄물을 들어보이고 있다. 워싱턴=AFP 연합뉴스


지난달 21일(현지시간) 백악관을 찾은 시릴 라마포사 남아프리카공화국 대통령 앞에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TV쇼 진행자 본능'이 가감없이 발휘되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기자 질문에서 '남아공의 백인 학살'이라는 단어가 나오자 트럼프 대통령은 대뜸 영상 하나를 재생합니다.

트럼프 대통령은 흰색 십자가와 흙더미 여러 개가 모인 광경을 내보이며 "1,000명이 넘는 백인 농부가 살해당했다"고 주장했습니다. 영상만 본다면 남아공에서는 엄청난 비극이 일어나고 있는 듯합니다. 영상 속 흙더미가 2017년 시위용으로 만들어진 가짜 무덤이라는 사실이 언론에 의해 밝혀지지 않았다면 말이죠.

트럼프 대통령은 취임 직후부터 "남아공 백인 농부 학살"이 진짜라고 믿어왔습니다. 올해 11월 남아공에서 열릴 G20에는 보이콧을 선언했고, 지난달 11일에는 남아공 의회가 토지수용법을 제정해 백인 농부들의 땅을 빼앗으려 한다며 '백인 난민' 49명을 받아들이기도 했죠. 실제로 남아공에서는 '백인 박해'가 일어나고 있는 것일까요? 트럼프 대통령의 주장 뒤에 숨겨진 이야기는 없을지 살펴봅니다.



20세기 후반 '국제사회 외톨이' 남아공



1992년까지만 하더라도 남아공은 '국제 사회의 외톨이'였습니다. 극단적인 인종차별 정책 '아파르트헤이트'(아프리칸스어로 '분리'라는 의미) 때문입니다. 트럼프 대통령이 주장하는 '백인 차별'과는 정반대로 이 시기에는 흑인이 차별의 대상이 됐습니다.

남아프리카공화국 출신 코미디언 트레버 노아(오른쪽)가 2022년 4월 미국 네바다주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그래미 시상식에서 사회를 보고 있다. 라스베이거스=로이터 연합뉴스


아파르트헤이트가 끝나기 10년 전 태어난 남아공 출신 코미디언 트레버 노아는 자서전 제목을 '태어난 게 범죄'(Born a Crime)로 지었습니다. 그는 아버지가 스위스인, 어머니가 흑인 코사족인 흑백혼혈이고, 당시 남아공에서 백인과 다른 인종 간의 성관계는 5년 이하의 징역에 처해지는 중범죄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방송에 나와 가벼운 목소리로 이렇게 말합니다. "어릴 적 길을 가다가도 경찰이 나타나면, 어머니는 제 손을 놓아버리곤 했죠. '걸어다니는 대마초'를 본 것마냥요!"

노아는 자신의 출생을 웃음의 소재로 삼는 대범함을 보였지만, 실제 차별은 매우 심각했습니다. 이 시기 남아공에서는 화장실과 공원 벤치부터 건물 출입구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에 '백인 전용'이 따로 있었습니다. 흑인들은 참정권, 거주·직업선택의 자유와 같은 기본적인 공민권을 제한받았고 낙후된 전용 게토에 수용됐습니다. 도시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특별허가증이 필요했고, 허가 없이 들어갔다면 체포됐습니다.

1970년대 남아공 정부는 흑인들이 밀집 거주하는 곳을 골라 '반투스탄'이라는 독립 국가로 만듭니다. 이들 반투스탄은 황무지가 대부분이라 경제를 남아공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반투스탄에 거주하는 '외국인'들은 남아공에서 일하고 남아공에서 돈을 받지만, 남아공 국민으로 인정받지 못했습니다. 이 시기 350만 명의 흑인이 생활기반을 잃어버린 채 고향에서 내쫓겼고, 그중 다수는 빈곤층으로 전락했습니다.

남아공 인종별 소득 격차는 여전

남아공의 인종별 소득 격차 및 인종 비율. 그래픽=신동준 기자


아파르트헤이트 정책은 1994년 공식 폐지됐지만 30년이 지난 지금도 인종 간 빈부 격차는 여전합니다. 지난 1월 남아공 통계청이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2023년 남아공 흑인의 연평균 소득(14만3,632랜드·약 1,099만 원)은 백인(67만6,375랜드·약 5,176만 원)의 5분의 1 수준에 불과합니다. 남아공 전체 사유지의 73%는 전체 인구의 7%를 차지하는 백인의 소유입니다. 남아공 정부가 극심한 빈부격차 해소를 위해서라는 이유로 토지수용법을 마련하게 된 이유입니다.

토지 수용은 우리나라를 비롯한 각국에서 볼 수 있는 제도지만, 남아공의 토지수용법엔 '무상 몰수'도 규정돼 있다는 점이 문제를 불러왔습니다. 토지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백인들은 '역차별 조치'라며 크게 반발했고, 백인과 기업가의 지지를 받는 연립 여당인 민주동맹도 토지수용법에 반대 입장을 표명했습니다.

다만 트럼프 대통령의 주장대로 남아공 정부가 백인들의 농장을 무상 몰수해 흑인들에게 분배할 수는 없습니다. 토지 무상 몰수가 가능한 경우는 △투기 목적 보유나 △실제로 사용되지 않는 경우 △공공 안전에 위협이 되는 경우 등으로 한정돼 있습니다. 백인들에 의해 활발히 운영되고 있는 농장은 토지 무상 수용의 대상으로 보기 어렵습니다. 남아공 정부는 이러한 토지에 대해서는 기존과 같이 협의에 의한 매수를 이어나간다는 입장입니다.

'학살'과 관련해서는 어떨까요? 남아공 경찰청 통계에 따르면 지난해 벌어진 2만7,621건의 살인 사건 중 농장과 관련이 있는 경우는 55건, 전체의 0.2%에 불과합니다. 센조 음추누 남아공 경찰장관은 지난달 21일 "지난해 10월부터 지난 3월까지 벌어진 농장 살인사건 18건 가운데 백인이 피해자인 경우는 2건에 불과했다"고 밝히기도 했습니다. 백인 농부를 상대로 한 '대량학살'이 이뤄진다는 트럼프 대통령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데이터는 찾기 어렵습니다.

음모론 들고나온 이유는

지난달 12일 남아프리카공화국을 출발한 백인 난민들이 미국 버지니아주 덜레스 국제공항에 도착했다. 덜레스=EPA 연합뉴스


트럼프 대통령은 후보 시절부터 '핍박받는 백인' 서사를 통해 인기를 모아 왔습니다. 미국이 인종차별을 반성하고 백인이 아닌 다른 인종을 보호하면서 백인들은 소외되고, 심지어는 역차별까지 당했다는 것이 트럼프 대통령 주장입니다. 그는 집권 후 인종 차별을 시정하기 위해 도입됐던 다양성·형평성·포용성(DEI) 정책을 폐지했습니다. 이민자 단속에도 고삐를 쥐었습니다. 해외에서 날아온 '백인 농부 살해'라는 자극적인 서사는 트럼프 대통령 자신의 정책을 정당화하는 도구가 될 수 있었을 겁니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 어떤 것이든 이용하는 트럼프 대통령의 성향도 그가 음모론을 유포하는 원인 중 하나입니다. 트럼프 대통령은 진위 여부와 상관없이 바이든 로봇설이나 부정선거설 등 각종 음모론을 자신의 인기에 활용해 왔습니다. 무엇이든 협상에 이용하는 트럼프 대통령이 남아공을 상대로 '건수'를 잡아 관세 협상 등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하겠다는 속셈을 숨기고 있을 가능성도 높습니다.

제멋대로인 트럼프 대통령의 '입'이 다음에는 우리나라를 향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습니다. 지난 3일 대통령 선거 이후 한국도 정상외교 복원에 나서고 있기 때문이죠. 트럼프 대통령과 이재명 대통령 간의 첫 만남은 오는 15일 캐나다에서 이뤄질 것으로 예상됩니다. 트럼프 대통령이 준비한 각종 가짜뉴스와 겁박에 넘어가지 않고 현명하게 대처한 라마포사 대통령처럼 철저한 준비와 침착한 대응이 필요합니다.

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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