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칠 교수의 일기는 1993년 〈역사앞에서〉란 제목으로 창비에서 출간되었다. 이 일기는 1945년 11월 29일자 뒤쪽부터 남아있었는데, 그 앞의 일기가 사라진 것으로 보였다. 유물을 보관하고 있던 필자의 아들 김기목(통계학·전 고려대) 교수가 사라진 줄 알았던 일기를 최근 찾아냈다. 1945년 8월 16일에서 11월 29일(앞쪽)까지 들어 있다. 중앙일보는 이 일기를 매주 토요일 원본 이미지를 곁들여 연재한다. 필자의 다른 아들 김기협(역사학) 박사가 필요한 곳에 간략한 설명을 붙인다.
11월 22일 개다. [4시 기상. U.S.A.의 농민감사일]
새벽에 일어나서 〈당대(唐代)의 사학사상(史學思想)〉(金井之忠)을 읽다.
아침에 조합에 나가보니 출근도 제대로 하지 않고 여늬 관청처럼 몹시 을스녕해 보인다. 새삼스레 우리 조합 직원들의 꾸준한 태도에 감사한 생각을 머금다.
우화교(羽化橋) 위에 거닐면서 단양천을 부감하니 몹시 산읍(山邑)임을 알 수 있다. 옛날 우헌(迂軒) 할아버지께서 이곳에 유배 오시어 이 천변에 방회하시면서 무료한 나머지 날마다 석탑으로 소일하시었다는 이야길 추상(追想)하고 말 없는 천변을 이윽히 굽어보았다.
[해설: 우헌 김총(金, 1633-1678)은 필자의 9대 조상이다.] 우화교 비문의 행문(行文)과 자체(字體)가 모두 자미로워 탁본해 보고 싶었으나 시간이 촉박해서 뜻을 이루지 못하고 군(郡)에서 기별이 있어 갔더니 백(白) 과장이 법전의 선배라 해서 매우 반가이 맞아주었다.
아라키(荒木) 이사가 오늘 떠난다 해서 찾아보았다. 극도로 초췌한 모양이 차마 바로 볼 수 없을 지경이다. 무심하게 노는 아이들도 그래 보아서 그런지 몹시 풀이 죽어 보인다. 그들이 침략과 강압을 시사(是事)한
[해설: 옳게 여기고 일삼은] 당연한 업보이겠지만 당년의 푸르르던 서슬에 비기어 패전국민의 참상은 한 방울 동정의 눈물을 자아내게 한다.
세사(世事)는 유전(流轉)한다든가 흥망(興亡)이 유수(有數)하다든가 하는 말들도 이렇게 우리들의 눈앞에 너무나 명백한 사실로 나타날 때 아연하지 않을 수 없다.
오늘날 거지처럼 노두를 방황하는 그들이 과거 40년 동안 3천리 강산을 호령하고 2천만 동포의 고혈을 착취하고 수많은 인인지사(仁人志士)로 하여금 감옥과 이역과 지하에서 피눈물을 머금게 한 걸 생각하면 쾌하다 하는 생각보다도 인생의 무상을 느끼게 한다. 오죽 못나서 우리 2천만이 저네들 수십만에게 쥐여 살았을까, 오죽 못나서 서른 살 장부가 저네들의 손에 잡혀갈까 해서 꿈에까지 가위눌렸을까, 하고 생각하니 그때의 절벽처럼 느껴지던 우리들의 운명과 비기어 인류의 손으로 만들어지는 인류의 질곡이 너무 심각함에 새삼스레 놀라지 않을 수 없다.
그네들이기로서니 수십 년 동안 남의 땅에 와서 분탕을 치고 지지리 이웃사람들을 못살게 굴고 설사 한때의 호사는 누릴 수 있었다더라도 그 대신 그만한 원한의 매듭을 맺고 오늘날 거지가 되어 쫓기어가게 되는 것이 무에 그리 좋을까. 그래도 인간의 본성이란 남을 누를 수 있는 때까지 눌러보는 것으로 일시의 쾌(快)를 탐하려 하는 것일까. 이웃끼리 유무상통하고 혹시 한 편이 비운에 빠지는 일이 있으면 붙들어주고 건져주고 해서 의좋게 지내는 것이 피차의 행복을 누리는 소이이고 또 그것이 의로운 일이라 할진대 국가 간에는 왜 그럴 수 없을까. 백년이 못 가서 다시 지하로 환귀하는 것이 인생의 숙명인 것을 하필 왜 서로의 피를 흘려서 비극의 역사를 만들어내기에 골몰한 것인가.
일본에 만일 위대한 정치가가 나서 또 일본 국민이 좀 더 아량이 있어서 평시에 자발적으로 조선의 독립을 선언하고 이 땅을 물러서기로 했던들 우리들은 얼마나 감사하게 여기고 은의(恩誼)를 품게 될 것인가. 그리하면 양 민족은 서로 영원히 우호적인 교분을 가질 수 있을 것이요 그들이 오늘날의 비참한 퇴각을 하기에 이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오히려 필요한 일부 이권의 확신(確信)도 가능했을 것이다. 이러해야만 그들이 외치는 다 같은 동아 민족으로서의 공존공영(共存共榮)과 동생공사(同生共死)도 진실로 이루어질 것이다. 개인이나 국가나 간에 너무 그악스럽게 구는 것이 가장 잘 사는 도리가 아님을 이로 보아서도 알 수 있는 것이다.
남을 살리는 것이 저를 살리는 길이요 남을 위하는 것이 곧 저를 위하는 소이이며 언제든지 처지를 바꾸어 생각해서 상대편의 불행과 고난을 덜기에 힘쓰는 것이 진정한 공리주의의 원리임을 알 것은 개인에 있어서나 국가에 있어서나 불변하는 진리임을 우리는 항상 명념(銘念)해야겠다.
군청에서 나오는 길에 학교 교정을 지나면서 보니 미국의 젊은 군인들이 제 집 뜰에서나 노니는 듯이 희희낙락하며 축구를 하고 있다. 다사로운 동양의 햇볕 아래서 마음껏 삶을 즐기는 그들의 경쾌한 인상이 아직도 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데 이쪽 향교 모퉁이를 돌아 나오다 보니 철귀(撤歸)하는 일인(日人)들이 짐을 꾸레미 꾸레미 묶어다 길가에 쌓아놓고 후줄근한 옷을 입은 소녀가 정신 나간 사람처럼 멍하니 보따리를 기대어 서 있다. 그 표정은 애수(哀愁)의 선을 넘어선 실신(失神) 상태에 있다. 그 옆에도 또 도망꾸니 짐 같은 짐들을 쌓아두고 길가에 노파와 어린이들이 옹송거리고 앉아 있다.
[그 소녀는 지금 무얼 생각하고 있을까. 패망의 조국, 혼란과 기아가 기다리고 있는 고향일까, 전쟁에 나가 죽은 오빠의 혹은 애인의 생각일까, 전쟁과 인생과 동조(東條)에
[해설: 대표적 일본 전범 도조 히데키] 대한 염오(厭惡)일까, 평화와 사랑에 대한 향수일까, 과거의 호화에 대한 추억일까, 당년의 고난에 대한 불안일까, 식민지에 대한 미련, 조국에 대한 동경일까, 미국에 대한 증오, 소군에 대한 전률일까, 그의 혈관을 도는 붉은 피는 자포자기의 니힐일까 아름다운 꿈의 추구일까. 낙엽 우짖는 산곡을 응시하고 움직이지 않는 그의 눈동자는 풀 수 없는 수수께끼 같다. 바라건대 슬픔과 괴로움의 심연에서 참된 인생의 길을 찾고 너희가 낳을 자자손손에게 침략의 옳지 못함을 가르치어 행복된 인생을 설계할지어다.]
만산홍엽의 이역 산읍, 낙엽이 구르는 도로변에서 허물어진 고성과 기울어져 가는 헌 집을 배경으로 하고 힘에 겨운 봇짐을 기대어 선 초췌한 그들의 행색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일말의 애수를 자아내게 한다. 패망 일본의 단적인 표상 같아서 카메라에 거두어두고 싶은 풍경이나 한편 생각하면 대립관념을 전제로 해서 객관적으로 관찰할 것이 아니고 아직도 미망(迷妄)의 역(域)을 저회(低徊)하고 있는 인류 공통의 비극의 한 표상이라 할 수도 있다. 그들의 그러한 모양이 곧 우리들의 모양이다. 우리 아닌 그들을 가엾어 할 것이 아니고 그들을 포함한 우리 전체를 깊이 반성해야 할 것이다.
미군과
일인들
좋은, 너무나 선명한 대조였다.
열하일기(熱河日記)의 환희기(幻戲記)에
徐花潭先生 出遇泣于道者 曰 爾奚泣 對曰 我三歲而盲 今四十年矣 前日 行則寄視于足 執則寄視于手 聽聲音而辨誰某則寄視于耳 嗅臭香而察何物則寄視於鼻 人有兩目 而吾手足鼻耳 無非目也 亦奚特手足鼻耳 日之早晏 晝以倦視 物之形色 夜以夢視 無所障礙 未曾疑亂 今行道中 兩目忽淸 瞖膜自開
天地寥廓 山川紛鬱 萬物礙目 群疑塞胸 手足鼻耳 顚倒錯缪 皆失故常 渺然忘家 無以自還 是以泣爾 先生 曰 爾問爾相 相應自知 曰 我眼旣明 用相何地 先生 曰 還閉爾眼 立地汝家
(서화담 선생이 길에서 우는 자를 만나 왜 우느냐 물으니, “내가 세 살에 소경이 되어 이제 40년인데, 전에는 걸어다닐 때는 발로 보고 물건을 잡을 때는 손으로 보고 목소리를 들어 누구인지 가릴 때는 귀로 보고 냄새를 맡아 무슨 물건인지 살필 때는 코로 보았습니다. 사람들은 두 눈을 가졌는데 나는 손, 발, 코, 귀가 모두 눈 아닌 것이 없었습니다. 또한 어찌 손, 발, 코, 귀뿐이겠습니까. 시간이 이르고 늦은 것을 낮에 피곤한 정도로 보고, 물건의 모양과 빛깔을 밤에 꿈으로 봅니다. 아무런 거리낌도 없고 의심과 혼란도 없었는데, 이제 길을 걷다가 홀연히 두 눈이 맑아지고 꺼풀이 스스로 열리면서 천지가 넓고 큰데 산천이 마구 엉켰고, 온갖 물건이 눈을 가리고 온갖 의심이 가슴을 막아서, 손, 발, 코, 귀가 뒤집히고 어긋나 안정된 상태를 벗어나니, 집조차 아득히 잊어버려 돌아갈 수가 없으므로 웁니다.” 하더랍니다. 화담 선생이 이르기를, “네가 네 길잡이에게 물어보면 길잡이가 응당 스스로 알 것이 아니냐.” 하였더니 “내 눈이 이미 밝았으니 길잡이에게 물으면 무엇하겠습니까.” 하기에 선생이 말하기를, “도로 눈을 감으면 곧 네 집을 찾을 것이다.” 했다고 합니다.)
라는 대문이 있다. 오늘날 우리들의 혼란이 특히 정치의 난맥이, 상업의 탈선이 그 청맹과니와 같은 처지에 있기 때문이 아닐까. 우리가 암실 속에 있다가 갑자기 햇볕에 나가면 눈이 부시어 허둥지둥하고 말 것이니 그렇다고 물론 다시 암실로 들어갈 필요는 없지만 과도기적인 고뇌는 불가피한 것이 아닐까.
낮차로 출발.
단양군의 총무과장 백 씨는 법전시대 동창으로 반가이 맞아주었다.
제천역에서는 보이스카우트의 교통사고가 있었다. 전부터 소년군의 역 진출이 눈에 거슬려 보이고 민중과의 직접 접촉이 훈련은커녕 그들의 품성을 버려주는 것만 같아 우려되더니 이런 걸 계기로 지도자층의 반성이 있었으면 좋겠다.
서정렬(徐廷烈) 씨가 서울주보 창간호를 가지고 왔다. 그의 부탁으로 밤부터 〈초당〉 번역의 정서(淨書)를 시작하다.
중앙일보
김기협 역사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