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랭크뉴스 › 1950년 6월 유일한 승전보… 이 사람마저 졌더라면 미군 도착 전 '한국 패망’ [명장]

랭크뉴스 | 2025.06.05 06:26:08 |
[명장: 한국전쟁의 장군 열전]
⑤1950년 6월 김종오: 무너진 전선의 마지막 버팀목

편집자주

6.25 전쟁 75주년 기획 ‘명장’은 대한민국을 구한 장군들의 ‘가장 빛나던 순간’을 조명합니다. 총체적 난국을 타개하고 전황을 뒤집은 리더십의 성공 비결을 알아봅니다.


6.25 발발 이전에 찍은 것으로 추정되는 국군 수뇌부 사진. 앞줄 두 번째부터 정일권 장군, 채병덕 장군(총참모장), 김백일 장군. 위키미디어 커먼즈


“169㎝에 100㎏인 육군총참모장 채병덕의 별명은 ‘코끼리’였다. 그는 날이 어두워지자 외출 준비를 마치고 미군 스타일로 깔끔하게 맞춘 전투복을 착용했다. (전방을 떠올리며) 우울한 생각에 빠지는 것보단 미군들과 술 마시며 친목을 다지는 게 더 얻을 것이 많다고 생각했다.”

서울의 채병덕



그날은 토요일이었고, 서울의 밤은 휘황찬란했다. 미군 사교 무대인 내자호텔(현 서울경찰청), 미군 숙소였던 트래머 호텔(현 충정아파트)엔 국군과 미군 고위장교들의 웃음소리가 넘쳤다. 택시기사들은 콧노래를 부르며 반도호텔(현 롯데호텔) 등 도심 곳곳으로 손님들을 실어 날랐다. 시내에선 최고급 칵테일 파티가 두 건 잡혔고, 주한 미군사고문단(KMAG) 행사장에선 정기 댄스파티가 열릴 예정이었다. 마침 그날 군사고문단장 윌리엄 로버츠 준장이 임기 만료로 한국을 떠났다. 그래서 한국엔 미군 장군이 없었다. 한국전 참전 역사가 시어도어 페렌바크가 ‘이런 전쟁’에서 그린 1950년 6월 24일 모습이다.
6.25 전야 서울 풍경은 이토록 화려하고 허술했다
.

한국전쟁 발발 다음날인 1950년 6월 26일 서울 도심의 모습. 뉴욕타임스가 촬영한 사진으로 미국국립문서보관소가 소장하고 있다. 태평로를 오가는 차량들이 평시와 다를 바 없이 오간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이날 0시를 기점으로 채병덕의
육군본부는 전방 각 사단에 비상경계 해제 명령
을 하달했다. 13일 간 이어진 긴장이 풀렸고, 비상근무에 지친 많은 병사들이 일손을 보태려 서둘러 고향집으로 향했다. 이맘때 벼농사는 물 대기, 잡초 제거, 병충해 방지로 쉴 틈이 없다. 이때 일손을 집중 투입해야 가을철에 수확량을 바짝 늘릴 수 있다.

농사 관점에서 본다면야 육본 판단은 틀리지 않았다. 전방 사단도 만성적 식량 부족에 시달렸는데, 이때 국군 6사단 창고에선 미곡 재고가 이미 바닥났고 비상식량으로 건빵 657상자(하루치)만 남아 있었다. 군인 일손까지 보태야 하는 저조한 농업 생산성이 문제였다. 그러나 이 해가 하필 1950년이었다는 점이 역사의 비극이다.

경계 수준을 높여야 할 때, 육본은 오히려 병력 3분의 1을 부대 밖으로 내보내 전방 방어 수준을 대폭 낮추는 치명적 실수
를 저질렀다. 육본 정보국 김종필(JP) 중위 등 일부 장교들이 “심상치 않은 조짐이 있다”며 휴가·외출 중지 필요성을 언급했지만, 채병덕은 “적정을 살핀 뒤 내일(25일) 오전 8시까지 보고하라”면서 경계 강화 건의를 수용하지 않았다.

몇 시간 후면 20만 대군을 앞세운 북한의 남침이 38선 전역에서 시작될 터였다. 그러나 서울은 여전히 한가한 여름날을 즐기고 있었고, 농촌은 모내기한 벼의 뿌리가 마를까 걱정하며 농삿일에 몰두하고 있었다.

김종오 이력. 그래픽=김대훈 기자


춘천의 김종오



같은 날 원주 6사단(춘천·홍천 담당) 본부에 있던 사단장 김종오 대령은 육본의 경계령 해제를 이해할 수 없었다. 닷새 전인 6월 19일 김종오는 7연대장 임부택 중령으로부터 의심스러운 보고를 받았다. 북에서 귀순한 전차병을 심문했더니 ‘6월 23일 예정된 대규모 훈련을 위해 전차 40대와 함께 춘천 바로 위 화천(당시 북한)에 도착했다’는 정보를 얻었다. 임부택이 현장에 나가 직접 확인한 결과, 전차병이 증언한 곳에 북한군 병력이 실제 있었다. 전차를 동원한 대규모 침공 가능성이 높았다. 김종오는 바로 육본 정보국에 이를 알렸다. 그러나 한국군 사단장의 경고는 정보국 고문관인 미군 대위 선에서 기각 당했다. ‘남침 가능성은 없다’는 이유였다.

만일
김종오가 여기서 육본 정보를 곧이곧대로 믿고 마음을 놓았더라면, 대한민국 역사는 1950년에 막을 내렸을지도 모른다
. 김종오는 서울의 엘리트 군인들이 책상머리에서 만든 ‘매끈한 정보’를 믿기보단, 부하들이 산악지대를 발로 뛰며 긁어모은 ‘땀내 나는 정보’를 좇기로 했다. 그래서 육본 명령에도 6사단 장병의 외출·외박을 제한하고, 경계태세를 유지했다. 긴장을 늦추지 않았던 바로 이 차이가 6사단 구역인 중·동부전선 전황을 획기적으로 바꾼다. 북한군의 파상공세에 바로 무너진 서쪽 사단들과 달리, 김종오 사단은 북한군의 맹공을 닷새나 버티면서 국군이 한강 이남에서 방어선을 형성할 시간을 벌었다.

“일요일 오전. 춘천 북쪽 콘크리트 진지엔 사단장 김종오가 휴일 외출을 금지하는 바람에 툴툴거리는 한국군 병사들로 가득 차 있었다.”(페렌바크의 ‘이런 전쟁’)
북한이 개전 당시 세운 3단계 작전 계획. 그래픽=김대훈 기자


대전쟁의 시작



6사단의 ‘나홀로 선전’을 이해하려면, 6.25 직전 △김일성 정권이 남침을 어떻게 준비했으며 △이승만 정부는 어떻게 대비했는지 좀 더 넓은 국면을 살필 필요가 있다.

김일성은 일찌감치 전쟁으로 한반도를 통일하고자 결심했다. 그러나 북한 자체 역량으론 불가능했고 소련의 인적·물적 지원이 필수적이었다. 소련의 군사 지원을 따내고 ‘전쟁 허락’을 얻기 위해
김일성은 1949년 3월과 1950년 3월 모스크바를 극비 방문해 이오시프 스탈린을 만났다
. 스탈린은 1949년 회담에선 선제공격보다는 남한을 도발한 뒤 역습하는 시나리오를 제시했으나, 이듬해 만남에선
국제정세가 바뀌었으니 적극적 행동이 가능해졌다
고 언급했다. 정병준 이화여대 사학과 교수는 저서 ‘한국전쟁’에서 이 국제정세 변화를 ‘1949년 10월 1일 중화인민공화국 수립’이라고 풀이했다. 중국공산당의 통일 과정에서 미국이 적극적으로 개입하지 않았던 점, 중국에서 전쟁이 끝나 북한에 병력을 보낼 조건을 갖춘 점을 염두에 뒀다는 것이다. 스탈린은 △미국은 참전하지 않을 것이고 △반대로 중국이 개입할 조건은 갖춰졌다고 보아, 김일성에게 초록색 직진 신호등을 켜 줬다.

이미
북한은 전쟁을 착착 준비하고 있었다
. 1949년부터 전쟁을 상정한 총동원령(징병제 및 학생 군사훈련)에 들어갔다. 같은 해 중반부터 소련의 무기와 군사기술을 대폭 지원받았다. 이를 통해 군사력을 빠르게 증강, 6.25 발발일 기준으로 △육군 10개 보병사단 △해군 3개 기지사령부와 육전대(해병대) △공군 1개 비행사단 규모로 성장했다. 1949년 6월 미군 철수 때까지만 해도 남한 군사력이 북한보다 낫다고 볼 여지도 있었다. 당시 미국 자료를 보면 1949년 중반 국군 병력은 12만6,000명으로, 북한군의 10만2,000명보다 많았다.

그러나 불과 1년 만인 1950년 6월엔 비교가 어려울 정도로 북한의 우세였다. 한국 육군은 8개 사단 규모를 유지했지만, 병력 구조나 장비 질 면에서 매우 부실했다. 북한군 모든 사단이 3개 보병연대와 1개 포병연대로 구성된 완전편제 상태였지만, 국군 사단 중 네 개는 2개 보병연대로만 이뤄져 있었다. 그래서 남북 육군을 비교하면 사단 수에서 8대 10으로 엇비슷했음에도, 연대 수로 보면 22대 40으로 두 배 가까이 차이가 났다.

그나마 있던 국군 8개 사단 중 4개 사단은 공비 토벌과 치안 유지를 위해 후방에 있었다. 서해안 옹진반도에서 개성-파주-포천-춘천-화천을 거쳐 동해안 양양까지 이어지는
312㎞의 긴 전선을 겨우 4개 사단(1·7·6·8사단)과 1개 연대(17연대)가 근근이 틀어막고 있었다
.

6.25 당시 남북한군 배치와 북한의 돌파계획. 그래픽=이지원 기자


“한국군은 허를 찔렸다. 오전 7시 채병덕이 황급히 육본에 도착했을 때, 이미 개성이 인민군에 넘어가 있었다. 신성모 국방장관은 문민이어서 전쟁 지휘 능력이 없었다. 장비 조달 전문인 채병덕 또한 당황했다. 그는 의정부 7사단까지 가서야 비로소 북의 전면적 공격임을 확인했다.”
(와다 하루키가 ‘한국전쟁 전사’에서 묘사한 6월 25일 아침)

특명, 서울을 포위하라



이 얇디 얇은 방어선을 뚫기 위해
북한군은 세 개의 큰 돌파구를 준비
했다. 서쪽에선 ①
개성·파주
를 거쳐 서울로 비스듬히 들어오는 경로로 창을 꽂고, 그 옆에 ②
동두천과 의정부
를 통해 서울로 바로 내리누르는 해머를 준비했다. 그리고 동쪽에선 ③
춘천·홍천
의 방어선을 뚫은 뒤 가평·양평·이천을 거쳐 수원을 포위하는 초대형 그물이 준비됐다. 북한1군단이 파주·의정부를 통해 서울 쪽에서 국군 주력과 싸우는 사이, 북한2군단은 춘천에서 수원까지 달려가 국군 배후를 치고 서울로 증원되는 병력을 가로막는다. 개성, 동두천, 춘천에서 시작된 거대한 화살표 세 개가 서울을 휘감아 국군 주력을 포위·섬멸하는 게 북한군의 핵심 계획이었다. 이
모든 게 5일 안에 이뤄져야 했다.
그러기 위해선 북한2군단이 파죽지세로 최대한 빨리 수원까지 가야 했다.

서울 근교에서 5일 만에 국군 주력을 격파할 계획을 세운 북한군은 그 다음 2주 동안 후방 예비부대를 섬멸해 군산-대구-포항선을 확보하고, 마지막 열흘간 남해안 주요 항구를 장악하고자 했다. 한 달 안에 남한 모든 지역을 다 차지하는 것으로 작전을 짰다.

북한은 왜 이렇게 서둘렀던 것일까. 일본에 있던 미군 때문이었다
. 북한은 미군이 사단급 병력을 한국에 전개하려면 30~45일 정도가 걸릴 것(그러나 실제 미24사단 파병 속도는 이보다 빨랐음)으로 봤기 때문에 한 달 안에 전쟁을 끝내려고 했다. 미군 증원 병력이 오기 전에 전황을 ‘되돌리기 어려운 수준’으로 만들면, 미국이 한반도를 포기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결국 북한군이 해야 했던 ‘시간 싸움’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맡았던 부대가 춘천·홍천 전투에 투입된 2군단이었다. 거대한 포위전에서 뒷문을 닫으며 화룡점정을 찍을 부대였다.

소련의 도움으로 작성된 북한군의 선제타격 계획도. 군사편찬연구소 '6.25전쟁사''


“다른 한국군 부대들도 6사단과 비슷하게 준비했더라면 적의 공격을 지연시킬 수 있었을 텐데, 그러지 못해 상상을 초월하는 결과가 초래됐다.”(6.25 당시 유엔군사령관 매슈 리지웨이)

춘천 전투, 기적의 방어



김종오의
6사단은 가평군 적목리에서 인제군 현리까지 좌우 84㎞에 이르는 넓은 전선을 담당
했다. 주요 방어 지역은 춘천(7연대)과 홍천(2연대)이었고, 원주에 사단본부와 예비대(19연대)가 있었다. 현재 휴전선 사단이 가로 20㎞ 정도를 담당하는 것을 감안하면, 당시 6사단은 매우 성긴 방어선을 구축하고 있었다. 6사단의 맞상대인 북한2군단은 3개 보병사단(2·12·5사단)과 1개 연대(603모터사이클연대) 약 3만7,000명 병력이었다. 6사단이 약 9,300명이니, 적이 네 배나 많았다. 주요 방어 지역인 춘천 시내에서 38선까지 직선 거리가 13㎞에 불과했다.

압도적 병력 차이, 짧은 방어선이라는 치명적 단점에도 6사단은 결국 이 전투에서 승리했다. 6월 25일부터 6월 30일까지 네 배 많은 적의 공격을 버텨 내며, 수도권 포위 임무를 부여받았던 북한2군단의 발목을 닷새간 붙잡았다. 무질서하게 패퇴했던 다른 사단과 달리, 질서 있는 후퇴에 성공하며 전력을 오롯이 유지했던 것도 6사단의 공이다.

6사단의 춘천·홍천 방어가 성공했던 것은 서부전선(평야)보다 유리했던 지형 요인(산지)도 있었지만, 지형을 이용할 수 있도록
사전 대비를 충실히
했기 때문이었다. 방어선이 짧았기 때문에 인공 장애물이 필수적이었다. 육본에서 예산 지원을 받지 못했던 6사단은 공병 1개 중대를 투입하고 춘천 시민과 학생들의 도움을 받아 공격 예상로에 콘크리트 대전차 진지를 구축했다.

한국전쟁 때 국군 6사단이 치열한 방어전을 펼쳤던 춘천지구전투를 기념하기 위해 만든 전쟁기념관이 있고, 그 앞에는 춘천지구전적비가 세워져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공격 징후를 의심하던
사단 지휘부의 신속한 대응
도 돋보였다. 개전 당시 서부전선을 지키던 1사단장(백선엽)은 고급간부 교육 때문에 자리를 비웠고, 중·서부전선 7사단장(유재흥)은 전날 열린 육군회관 개관 파티 참석차 서울 자택에 있었다. 그러나 중·동부전선 6사단장 김종오는 원주 사령부에 정위치하고 있다가, 북한 침공 소식을 듣자마자 전방인 춘천으로 달려가 7연대 관측소가 있던 봉의산(현재 강원도청 뒷산)에서 사단 병력을 지휘했다.

6.25 발발 당시 한국 육군엔 군단 편제가 없어 육본이 일선 사단에 바로 명령을 내리는 구조였다. 현장 최고 지휘관인
사단장이 전장 상황을 파악해 즉시 예하부대를 지휘
한 덕분에, 6사단은 다른 사단보다 빠르게 방어 태세를 가다듬을 수 있었다. 사단장의 대비 태세는 예하 지휘관의 기민한 대응에도 영향을 줬다. 전방 상황이 평소와 다르다고 생각했던 7연대 1대대장 김용배 소령은 상급부대 별도 지시가 없었음에도 6월 25일 새벽 영외 거주 간부들을 자체적으로 소집해 놓고 있었다.

전투가 시작된 뒤부터는,
결사 방어에 집착하지 않고 유연하게 전술적 후퇴를 지시한 김종오의 융통성
이 빛났다. 소양강이 바로 내다보이는 봉의산 관측소에서 전황을 살피던 김종오는 6월 26일 적의 이동과 병력 증원이 활발해지는 것을 확인했다. 조만간 북한군 대규모 공격이 있을 것이란 점을 알아챈 김종오는 방어 병력을 질서 있게 뒤로 물려 소양강 남안에 방어선을 형성했다. 지형에 의존한 방어선을 활용해 6사단은 6월 27일까지 춘천을 사수했다.

“북한군이 수원을 장악한 7월 5일은 이미 미24사단이 전쟁에 투입된 뒤였다. 국군도 한강 이남으로 후퇴해 미군과 함께 방어작전을 수행할 수 있었다. 결국 춘천에서 지체하며 미군 참전 시간을 주고 만 것이 북한군의 첫 번째 실패였다.”(박태균 ‘한국전쟁’ 중에서)
김홍일 장군. 한국일보 자료사진


춘천전투의 나비효과



1개 군단을 상대로 버티던 6사단이 춘천·홍천 지역에서 완전히 물러난 것은 개전 엿새째인 6월 30일이다. 이미 이틀 전 (6월 28일) 서울은 함락됐고, 정부가 수도를 대전으로 옮긴 뒤였다. 이때 중·동부전선 상황만 보면 6사단이 좀 더 방어선을 유지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왼쪽에 인접한 7사단(동두천·포천)이 이미 무너졌기 때문에, 6사단도 보조를 맞춰 물러나야 했다. 6월 25일부터
30일까지 계속된 전투에서 북한2군단의 병력 피해는 사상자 6,792명, 포로 122명이었다. 반면 국군6사단의 인명손실은 사상자 405명에 그쳤다
. 4분의 1 병력으로 5일을 버티면서 사상자는 적의 6%에 불과했던 성공적 방어였다.

거시적으로 북한 1군단과 2군단의 협공 계획을 보면 6사단의 선전이 국군의 생존에 결정적으로 기여한 사실을 알 수 있다. 소련 고문단의 도움을 받은 북한은 1군단으로 서울 북방에서 국군 부대를 내리누르고, 춘천에서 달려온 2군단으로 서울 동쪽과 남쪽을 감싸 국군 주력을 완벽하게 포위하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그래서 북한2군단의 계획은 개전 첫날 춘천, 홍천, 가평을 모두 장악하는 것이었다. 2군단 예하 2사단이 둘째 날 덕소에서 한강을 건너 국군의 후퇴로를 막고, 같은 군단 소속 12사단은 둘째 날 여주까지 진출해 원주로 이어지는 도로를 차단할 계획이었다. 북한 2군단이 이 계획대로 진격했더다면 국군 전방사단은 서울 근교에서 모두 포위됐을 것이고, 남쪽에 있던 증원 사단도 서울을 구원하러 오지 못했을 것이다.

한국전쟁 당시 미24사단장인 윌리엄 딘 소장. 한국일보 자료사진


그러나 6사단의 방어전이 성공하면서 북한 2군단은 목적지였던 수원에 도달하지 못했다. 기습을 받은 국군은 전쟁 사흘 만에 서울을 잃었지만, 수원으로 근거지(육본)를 이동한 다음 한강 남쪽에 방어선을 구축할 수 있었다.

김종오의 선전을 이어받은 사람이 바로 독립운동가 출신 김홍일 소장
(건국훈장 독립장 수훈)이다. 중일전쟁에서 대규모 부대 지휘 경험이 있던 김홍일은 무질서하게 후퇴하던 국군 부대를 수습해 시흥전투사령부를 구성했고, 한강 이남에서 북한 3개 보병사단 및 1개 전차여단의 대공세를 6일간 막았다. 그 사이 미 육군 24사단 선두부대(스미스 특수임무부대)가 7월 1일 부산에 도착, 7월 4일 오산 북쪽에 진지를 구축했다. 미24사단(사단장 윌리엄 딘 소장) 예하 나머지 부대도 7월 7일까지 모두 전선에 도착해 금강 방어선을 형성했다. 미24사단 파병은 일본에 주둔하던 미8군(군사령관 월튼 워커 중장) 전체의 한반도 개입으로 이어졌다.
김종오가 방어작전으로 번 5일, 김홍일이 지연작전으로 끈 6일이 없었더라면 미군의 대규모 증원이 불가능
했을 거라 보는 게 맞다.

“중공군 2만3,000명이 백마고지에서 격퇴됐다. 한국군 3,500명 이상을 잃으며 얻은 승리다. 이것은 리지웨이가 시작하고 밴플리트가 추진한 한국군 훈련 프로그램이 성공했다는 증거였다.”(존 톨랜드 6.25 전쟁 2’)
백마고지 12차례 전투 과정. 그래픽-김대훈 기자


또 하나의 전공 ‘백마고지 전투’



6.25 전사에서 김종오의 이름은 계속 등장한다. 개전 초 병사들이 뿔뿔이 흩어진 서부전선 사단과 달리 6사단은 전력을 온존하게 유지하며 후퇴했다. 춘천-홍천에서 물러선 뒤 이천-여주-충주에서 방어선을 형성했고, 특히 임부택의
7연대가 음성 무극리에서 북한15사단을 기습
해 1,000여 명의 전사자 피해를 안겼다. 이 승전으로 연대 장병 전원이 1계급씩 특진했다.

김종오의 6사단은
낙동강 방어선에선 영천 지역을 담당
했다. 1950년 9월 초 북한군의 ‘9월 대공세’ 당시 북한 8사단의 공격을 막아 대구를 지켰다. 6사단은 인천상륙작전 이후 개시된 반격 작전에도 적극적으로 참여, 문경·충주·원주·춘천을 거쳐 38선을 돌파했다. 10월 26일엔
국군·유엔군 통틀어 최초로 압록강(초산)에 도달
한 부대가 됐다.

1950년 10월 압록강에 도달한 6사단 7연대 병사가 수통에 물을 담고 있다. 국가기록원


김종오에겐 시련도 적지 않았다. 6사단 7연대는 압록강 진공 때 중공군 개입을 알지 못한 채 너무 깊이 들어갔다가, 퇴로가 차단돼 고립되는 상황을 맞이했다. 중대·대대 단위로 분산 퇴각하느라 큰 피해를 감수해야 했다. 김종오는 이듬해인 1951년 3사단장으로 전보됐는데, 5월에 그가 속한 국군2군단(군단장 유재흥)은 6.25 최대 치욕 중 하나인 현리 전투에서 패배하며 군단이 해체되는 지경에 이르렀다.

와신상담하던 김종오는
1952년 10월 ‘한국전쟁 고지전의 백미’인 백마고지 전투에 투입
됐다. 당시 9사단장이던 김종오는 춘천 전투에서처럼 이번에도 1개 사단으로 적 1개 군단과 맞섰다. 춘천에선 북한군을 상대했지만, 백마고지의 적은 그보다 훨씬 더 잘 싸우는 중공군(38군단)이었다.

중공군이 해발 395m 무명고지(후일 백마고지로 명명) 하나에 3개 사단을 투입했던 건 이 고지의 전략적 가치가 그만큼 높았기 때문이다. 철원-김화에 아랫변을 잇고 평강에 꼭지점을 찍는 삼각형 모양의 지역이 철의 삼각지대다. 공산군 입장에서 서울-원산을 잇는 추가령구조곡의 중심인 철의 삼각지대를 장악하면 서울 공략이 매우 쉬워진다.
백마고지는 철의 삼각지대 주도권 확보를 위해 필수적으로 장악해야 하는 곳
이었다.

1952년 10월 철원 백마고지 전투 중 부상을 입은 국군 9사단 병사들이 후송을 기다리고 있다. 국사편찬위원회


중공군은 10월 6일 1차 공격을 시작으로 10월 15일까지 하루도 쉬지 않고 12차례나 백마고지에 공격을 퍼부었다.
국군은 백마고지를 일곱 번(4~10차 공격) 내줬으나 곧바로 반격해 끝끝내 이 고지를 사수했다
. 백마고지는 면적이 넓지 않아 전체 사단 병력을 배치하기는 불가능했다. 그래서 김종오는 특정 연대에 고지를 맡기는 대신 연대를 번갈아 배치했고, 정확한 시간에 예비대를 투입해 중공군을 다시 북쪽으로 몰아낼 수 있었다. 전 사단이 고지 하나에 달라붙는 치열한 전투의 결과, 10일 동안 전사 421명, 부상 2,391명, 포로 507명 등 3,000명이 넘는 인명 피해를 봤다.

백마고지 전투 승리의 의미는 단순히 ‘산 하나’를 지킨 수준이 아니었다. 백마고지를 장악하면 고지 남동쪽으로 나 있는 평야지대를 감시하고 제어할 수 있다. 그래서 당시 국군이나 유엔군 입장에선
여기를 빼앗겼다면 전체 전선에서 수㎞ 이상 뒤로 물러나야 하는 불리한 상황을 맞이했을 것
이다. 이때 철원평야를 내줬더라면, 한국은 서울을 방어하기 위해 여기저기 병력을 분산해야만 했을 것이다. 지금 휴전선이 연천을 지나 철원~양구 구간에서 유독 위로 쑥 올라가 있는 것도 이때 백마고지를 사수했던 덕분이다. 김일성이 백마고지 전투 패배 이후 사흘간 식음을 전폐했다는 얘기가 괜히 나온 게 아니다.

1952년 10월 이승만 대통령과 제임스 밴플리트 미8군사령관이 백마고지 전투의 국군9사단을 방문한 모습. 세종시


또 다른 의미는
국군이 ‘중공군 포비아’를 완벽하게 떨쳐냈다
는 데 있었다. 국군은 1950년 10월부터 1월에 이르는 세 차례 공세에서 중공군에게 속절없이 밀려났고, 1951년 4월 사창리 전투(국군6사단)와 5월 현리전투(국군3군단)에선 치욕적인 패배를 당했다. 중공군은 국군에게 좀처럼 극복하기 어려운 상대였으나, 백마고지에서는 서로 뺏고 뺏기는 접전을 펼칠 수 있을 정도로 국군 전투력이 크게 향상됐다.

김종오는 전후 1군단장, 1군사령관, 육군참모총장, 합동참모의장 등 군 최고위직을 두루 역임했다. 그러다 1966년 젊은 나이인 45세에 폐종양으로 사망했다. 흔히들 6.25 당시 국군의 최고 명장을 백선엽으로 기억하는 이들이 많다. 친일 행적(간도특설대)과 별개로 6.25 때 백선엽 전공이 컸던 것은 누구도 부인하기 어려운 사실이지만,
청성(6사단) 백골(3사단) 백마(9사단) 등 ‘메이커 사단’ 사단장을 두루 거친 김종오의 공도 백선엽에 못지않다
. 김종오가 저평가된 이유 중 하나는 그가 너무 일찍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후대에 자기 행적과 관련한 기록을 많이 남기지 못했기 때문일 수 있다.

육군장으로 열린 김종오 대장의 장례식. 한국일보 자료사진


김종오에 대한 호의적 평가는 국군의 전투력을 경시했던 미군 측의 기록에서 자주 발견
된다. 당시 국군 부대에 대해 박한 평가를 내렸던 매슈 리지웨이 대장은 회고록에서 김종오의 6사단을 두고 ‘매우 예외적’이라고 기록했다. 그는 춘천 전투를 언급하며 “전투 준비를 갖춘 소수 한국군 부대의 용맹함이 없었다면 천금같은 하루나 이틀을 허비해 끔찍한 재앙으로 이어졌을 것”이라며 “그중 한 부대가 한국군 6사단”이라고 평가했다. 통상 한국 장군의 공적을 잘 언급하지 않는 미군 공간사(公刊史)에서도 백마고지의 승장 김종오의 이름은 발견된다. 역사학자 월터 허미스는 ‘휴전 천막, 그리고 싸우는 전선’(Truce Tent and Fighting Front)에서 “김종오 장군이 공격과 방어 양쪽에서 적시에 병력을 투입해 한국군 활동에 제대로 불이 붙을 수 있었다”고 썼다.

기사에 참고한 자료<6.25 직전 상황>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6.25 전쟁사 ①,’
-정병준 ‘한국전쟁’
-T. R. 페렌바크 ‘이런 전쟁’
-와다 하루키 ‘한국전쟁 전사’

<춘천 홍천 전투>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6.25 전쟁사 ②’
-이성춘 ‘6.25 전쟁 초기 춘천지구 전투의 재분석과 평가’
-지효근 ‘무형전력이 전투 승리에 미친 영향 연구: 6.25 전쟁시 춘천-홍천지구 전투를 중심으로’

<백마고지 전투>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6.25 전쟁사 ⑩’
-나종남 ‘백마고지 전투의 재조명’
-조남준 ‘백마고지 전투 간 국군 제9사단의 화력운용 고찰’
-존 톨랜드 6.25 전쟁 2’
-Walter Hermes ‘Truce Tent and Fighting Fro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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