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명 당선인 스토리]
변방 비주류에서 최고 권력까지
검찰수사·피습 테러·사법리스크
숱한 위기 정면돌파, 기사회생
"이재명은 국민이 지어준 희망의 이름"
변방 비주류에서 최고 권력까지
검찰수사·피습 테러·사법리스크
숱한 위기 정면돌파, 기사회생
"이재명은 국민이 지어준 희망의 이름"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가 선거유세 마지막 날인 2일 오후 서울 여의도공원 문화의마당에서 열린 집중유세에 참석, 손을 들고 포즈를 취하고 있다. 고영권 기자
경이로운 '언더도그(Underdog·이길 가능성이 희박한 비주류를 칭하는 용어)' 신화. 이재명 대통령 당선인의 인생 역정은 이렇게 요약된다. 중학교도 다니지 못한
'무(無)수저' 소년공 출신에서 변호사, 성남시장, 경기지사를 거쳐 대한민국 권력의 최정점에 우뚝 서기까지
. 그는 숱한 위기를 마주할 때마다 무너지긴커녕 오뚝이처럼 일어나 스스로 길을 개척했고 더 높은 곳을 향했다. 대한민국 주권자가 백척간두 위기에 처한 대한민국을 구할 선장으로 낙점한 배경이다.이 당선인은 6·3 대선 전 피날레 유세에서 이렇게 말했다. "여러분, 저는 알고 계신 것처럼 가진 것 없이 자랐습니다. 그러나 남의 것 탐하거나 가해하지 않고 나쁜 길로 빠지지 않았습니다. 평범한 사람들이 공정하게 대우받는 상식적 세상을 만들기 위해 온갖 위기를 이겨내며 여러분 힘으로 이 자리까지 왔습니다."
그의 말처럼 이 당선인은 위기에 처할 때마다 굴하지 않고 더 선명하고 단단해졌다. 때론 저돌적 추진력으로 갈채를 받고, 때로는 거친 행동으로 비판을 받기도 했다. 이 당선인은 위기를 기회로 만드는 불굴의 의지를 발휘했고, 국민 역시 변화를 열망하는 투표로 그에게 호응했다. 이제 그는 자신이 염원하던
'평범한 사람들이 대우받는 상식적 세상'을 만들 출발선
에 섰다.1978년 야구 글로브 공장인 '대양실업' 소년공 시절의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 모습. 더불어민주당 제공
①가난한 소년공, 운명을 개척하다
이 당선인이 지금도 길에 피어 있는 식물 이름을 달달 외는 건 지독한 가난 때문이다. 이 당선인은 1963년(호적상 1964년) 경북 안동에서 5남 4녀 중 일곱째로 태어났다. 매일 왕복 10㎞ 산길을 걸어 초등학교에 다녔고, 꽃과 나물을 캐 먹으며 배고픔을 달랬다.
초등학교를 졸업한 1976년 아버지를 따라 모든 가족이 성남 상대원 시장 뒷골목 반지하 단칸방으로 이사했다.
살아남기 위해 그는 중학교 졸업 대신 공장을 전전하는 소년공의 삶을 받아들여야만
했다. "초등학교 3, 4학년이 될 무렵 중학교에 진학할 수 없다는 걸 완전히 이해하고 있었다." 나이가 어린 탓에 형의 이름을 빌려 위장취업한 그가 공장에서 받은 일당은 100원이었다.여섯 번째로 취업한 대양실업이라는 야구글러브 공장에서 압착 프레스에 왼쪽 손목이 으스러졌다. 성인이 되어 장애 판정을 받고 군대를 면제 받을 만큼의 큰 부상이었다. 그러나 사고는 기회로 이어졌다. 공장에서 30분 일찍 퇴근할 수 있게 해준 덕에 학원에 다닐 수 있었고, 고교 검정고시를 수월하게 통과한다. 하루 두 시간씩 자며 공부하는 의지로 중앙대 법학과에 장학생으로 입학한다.
'82학번 이재명'은 빛나는 학생이었다. 대학 시절 은사인 이상돈 중앙대 법학전문대학원 명예교수(20대 국회의원)는 "아주 우수한 성적으로 입학해 특별장학생 조건으로 들어온 이재명은 이미 유명한 학생이었다. 보통 학생보다 나이가 좀 많았고 공부도 잘하고 해서 학생들 사이에 신망이 있었다"고 기억했다. 대학시절 접한 5·18 민주화 운동의 실상은 그에게 '사회 의식'을 깨우치는 계기가 됐다.
변호사 시절이던 2004년 성남시립의료원 설립 및 운영에 관한 조례가 성남시의회에서 '날치기 부결'된 후, 의회 본회의장에서 오열하는 모습. 더불어민주당 제공
②기득권 대결 패배, '현실 정치'에 눈뜨다
이 당선인은 1986년 두 번째 도전 끝에 사법시험에 합격한다. 사법연수원 성적은 상위 30% 정도였다고 한다. 판·검사도 노려볼 만했지만, 인권변호사로 활동하던 고(故) 노무현 전 대통령의 강연을 듣고 삶의 방향을 틀었다.
1989년 성남에서 변호사 사무실을 개업하고,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이천·광주 노동상담소'에서 일하는 등 열혈 시민 활동가로 지냈다. 1995년에는 성남시민모임을 만들어 △2000년 분당 백궁·정자지구 용도 변경 특혜 의혹 △2002년 분당 파크뷰 특혜 분양 사건 의혹 등을 파헤친다.
처음부터 정치에 뜻을 둔 건 아니다.
그의 운명을 바꾼 건 뒤틀어진 기득권 정치에 대한 울분이 시작
이었다. 2004년 시민 20만 명의 뜻을 모아 성남 공공의료원 설립을 위한 '주민 조례'를 발의했다. 1년간 시민들이 분투했던 작업은 그러나 시의회에서 새누리당 주도로 47초 만에 휴지 조각이 된다. 이에 항의하던 그는 오히려 특수공무집행방해 혐의로 고발을 당했고, 쫓기는 신세가 됐다. 성남시청 앞 주민교회 지하 기도실에서 눈물을 흘리면서 그는 다짐한다. "부정한 기득권자들이 좌절시킨 시립 공공병원의 꿈을 성남시장이 되어 반드시 이뤄보겠다. 정치를 하기로 결심했다."
'변방의 시민운동가'의 정치 생활은 순탄치 않았다. 2006년 성남시장에 도전했지만 낙선했다. 2년 뒤 성남 분당갑 전략공천을 받았지만 떨어졌다. 2010년 두 번째 도전 끝에 성남시장에 당선됐다. 시민운동을 하던 경험을 살려 청년배당·무상 산후조리원·무상 교복 등의 정책을 성공시키는 저돌적 추진력을 발휘한다. 오랜 꿈이던 성남시민의료원도 설립한다.
2016년 10월 국정농단 사건이 터지자 앞장서서 박근혜 전 대통령 하야를 주장했다.
'사이다 이재명'을 전국에 각인시킨 계기
였다. 19대 대선 경선에서 문재인 전 대통령, 안희정 전 충남지사와 경쟁했지만 21.2% 득표율로 3위를 기록하며 탈락했다. 굴하지 않고 2018년 경기지사에 도전해 문재인 정권의 실세 전해철 전 의원을 꺾고 경기지사에 오른다. 2022년 대선 재수에 도전, 이낙연 전 국무총리를 누르고 대선주자로 도약한다.이재명 대선 후보가 당대표 시절이던 2024년 1월 2일 오전 부산 강서구 가덕신공항 부지를 둘러본 뒤 왼쪽 목 부위 피습을 당해 바닥에 누워 병원 이송을 기다리고 있다. 연합뉴스
③숱한 위기에 기사회생, '이재명 일극체제' 이루다
대권가도에 오른 이 당선인에게 브레이크는 없었다. 2022년 대선에서 윤석열 전 대통령에게 0.73%포인트 차이로 패했지만, 이 당선인은 굴하지 않았다. "대선에서 패배한 정치인은 일선에서 물러난다"는 관례를 스스로 깨부수고, 대선 3개월 만에 치러진 국회의원 보궐선거에 출마해 인천 계양을에 당선됐다. 내친김에 그해 8월 당대표 선거에 출마, 77.77% 득표율로 민주당 당권을 차지한다.
차기를 넘보는 야권 대선 주자의 정치 생활은 위기의 연속
이었다. 대장동 개발 특혜 의혹, 공직선거법 위반, 쌍방울 관련 수사 등 그의 목에는 늘 검찰의 칼이 겨눠져 있었다. 2023년 9월 검찰이 구속영장을 청구하고, 국회 체포동의안에 민주당 일부 의원들이 동조하며 구속 위기에 몰린다. 이 당선인은 단식투쟁으로 맞섰고, 법원이 구속영장을 기각하며 기사회생한다.그에게는 '냉정하다'는 꼬리표가 따라 붙는다. 2024년 총선을 앞두고 체포동의안 표결 때 '반란표'를 던진 것으로 지목된 친문재인계 의원들이 줄줄이 공천에서 탈락한 것이 대표적이다. 이른바 '비명횡사' 논란이다. 정치적 타협 대신 사생결단식의 대결을 선택했다는 비판이 거셌다. 그러나 그해 총선에서 이 당선인이 이끌던 민주당은 172석을 따내며 공천 잡음에 대한 비판도 잠재워버렸다.
압도적 승리를 거둔 그를 더 이상 '비주류'라고 부르는 이는 없었다.
위기 때마다 기사회생하는 반전 드라마도
써 냈다. 지난해 1월 부산 가덕도 신공항 부지 방문 중 흉기에 목을 찔리는 정치 테러를 당했다. 자칫 생명이 위태로울 수 있는 부상에도, 서울로 옮겨져 응급수술을 받고 목숨을 건졌다. 대법원이 지난달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에 '유죄' 취지의 파기환송을 내리며 정치 생명이 끝날 위기에 처했지만, 고등법원이 선거 이후로 재판을 미루며 또 한번 살아났다. 윤석열 전 대통령이 지난해 12월 긴급 대국민 담화를 통해 비상계엄령을 발표할 당시 여의도 국회 본회의장에서 한동훈(오른쪽) 국민의힘 대표와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악수하고 있다. 뉴시스
④비상계엄과 조기대선, 21대 대통령에 당선되다
이 당선인에게 날개를 달아준 건 역설적으로 윤석열 전 대통령
이다. 지난해 느닷없는 불법 계엄을 선포하자 이 당선인은 국회에서 비상계엄 해제를 진두지휘하며 '민주세력 리더' 입지를 공고히 다진다. 이어 헌법재판소가 숙의 끝에 윤 전 대통령을 탄핵하면서 조기 대선 레이스에 참여한다. 선거 내내 '어대명'(어차피 대세는 이재명)은 흔들리지 않았고, 막판 '아들 발언 논란' 등 네거티브 공세에 시달렸지만 대세론을 꺾기에는 역부족이었다."단 한 번의 순탄한 과정도, 단 한 번의 쉬운 싸움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어려울 때마다, 우리 당원 동지들께서, 우리 국민들께서 상처투성이로 쓰러지던 저 이재명을 일으켜 주셨습니다. 저 이재명은 지금부터 여러분이 지어주신 희망의 새 이름입니다."
그의 말마따나 국민들은 이 당선인이 사선에 놓일 때마다 우군이 되어 살려냈고, 결국 대통령이라는 최고 권력 자리까지 부여했다.
2030년 대통령 임기를 마무리할 때도 그의 이름이 '희망'으로 기억될지, 이제 그 자신이 대한민국 국민 앞에 증명해야 할 차례
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