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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기계처럼 짜여진 시스템이 아니라
다양한 주체들이 서로 맞물려 성장-소멸하는 생태계이고
그 목표와 방식도 서로 다르다”


작은 기회도 놓치지 않는 치밀한 계획과 느슨함이 파고들 수 없는 촘촘한 관리, 톱니바퀴처럼 착착 맞아 돌아가는 탄탄한 실행조직. A그룹이 자랑하고 언론과 학계가 찬양하는 성공모델이다. 어느새 거스를 수 없는 경영의 진리로 여겨진다. 과연 그럴까. 경영학 책에 나오는 이야기에 끼워 맞춘 가공의 스토리를 말로 먹고사는 사람들이 떠들고 이를 생각 없이 외워댄 것은 아닐까.

경영학은 20세기 미국의 주요 산업들이 성장하고 금융시장이 따라서 발전하는 과정에서 형성됐다. 대규모 시설투자와 이를 위한 자본동원으로 소유가 분산된 대형 제조기업들이 등장하고 이를 운영하는 기법들이 기존 학문들의 틀에 기대어 체계화된 것이다. 치밀한 계획, 촘촘한 관리는 이런 기업들에 요구되는 기본적 명제였고 제2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대규모 군수체계로 구현됐다.

‘XX관리’로 이름 붙인 경영학 과목들, ‘시스템’의 틀에 짜맞춘 이론구성이 그 결과물인데 주어진 목표와 사업을 잘하는 관리자적 역할에 초점을 둔다. 그런데 이것이 전부가 아니다. 세상은 기계처럼 짜여진 시스템이 아니라 다양한 주체들이 서로 맞물려 성장-소멸하는 생태계이고 그 목표와 방식도 서로 다르다. 무엇을 하느냐가 어떻게 잘하느냐보다 훨씬 중요하고 직접 나서서 세상을 바꾸는 적극적 역할도 필요하다.

치밀한 계획과 촘촘한 관리는 더 높은 수준에서 세상을 바꾸고 미래를 만들어가는 전략의 지혜를 담지 못한다. 시키는 일 잘하는 머슴의 덕목일 뿐이다.

변화를 담는 여백

서울의 대형 아파트단지에 재건축-재개발 분야의 관심이 모이고 있다. 서울시는 100층에 가까운 초고층 재건축을 허용하는 고밀도 개발을 통해 녹지공간과 한강변의 풍경을 확보하려는 방침이다. 그런데 단지 주민들의 반응은 의외로 부정적이다. 현재의 기술조건과 안전규제에서 50층이 넘으면 비용부담이 커지고, 용적률 혜택을 모두 활용해서 초고층을 지을 경우 앞으로는 헐고 새로 짓기가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전기자동차가 언제 대세가 될지 모르니 전기저장과 충전을 어떻게 가져갈지 모른다. 드론 같은 도심항공운송(UAM)이 나오면 착륙장을 어디에 둘지도 고민이다. 태양광 패널을 둘지 건물 벽에 테이프형 패널을 붙일지도 생각이 복잡한데 상하수도와 쓰레기 등 자원순환과 재활용도 신기술이 계속 나온다. 20년 후의 세상이 어떻게 될지 모르면서 50년 동안 바꾸기 힘든 개발계획을 내걸기는 어렵다.

재건축-재개발의 직접적 이해 당사자인 주민들의 생각과 삶의 방식이 엇갈리는 점도 고민이다. 아파트단지 근린상가에서 장 보고 미용실 가는 생활이 익숙한 주민들이 여전히 많지만 온라인-모바일쇼핑과 음식 주문배달이 대세이고 제대로 쓸 때는 상업-유흥 지역으로 가는 주민들이 빠르게 늘고 있다.

실제로 과거 개념의 근린생활시설을 지었다 텅텅 비어서 급히 병원과 필라테스 학원으로 바꾼 재건축 단지가 있고, 1990년대 당시 최고 수준으로 지은 모 주상복합 단지가 낮은 재건축 가치와 높은 관리비로 어려움을 겪는 반면사례들이 있다. 파격적 용적률 혜택을 받았던 아파트단지가 재건축-재개발 여지가 없어 고민인 점도 마찬가지다.

이런 논점들이 정리되면서 해당 아파트단지의 주민들은 ‘뭔가 빨리 보여주고 싶은’ 서울시의 나름 파격적인 조건에도 불구하고 35층 정도의 ‘무난한’ 개념이 대세가 되고 있다. 세상의 변화를 모두 알지 못하고 내가 나서서 바꿀 수도 없을 때 앞으로의 변화를 담을 수 있는 여백을 두는 나름의 전략인데 건축기술과 이를 반영한 안전규제의 변화, 도시교통과 자원순환의 변화, 이를 담는 도시개발 정책과 세제의 미래를 반영할 수 있도록 지금 가능한 수준의 전략을 택한 결과다.

확장 가능성과 단단함

몸에 꼭 맞는 옷은 불편하다. 성장기에는 다소 덜 맞더라도 여유를 둬서 변화를 담고 나아가 수선이 가능한 디자인이나 재질을 선택한다. 기계장치에도 공차(allowance)를 둬서 시스템의 탄력성을 확보하고 고무와 같은 가소성 재질이나 액체를 이용해서 보완한다. 사람의 몸이 쉽게 균형을 찾고 움직이는 것도 뼈의 기둥 역할에 더해서 탄력성 있는 근육이 움직임을 만들고 인대와 힘줄이 보완하기 때문이다. 조직이론에서 말하는 느슨한 연결(loose coupling)의 개념이다.

격투기에서 상대의 공격을 막는 커버링 기술은 거리와 시선이 생명이다. 너무 머리에 가깝게 붙으면 충격이 그대로 전달되고 위치가 잘못되면 방어가 뚫리거나 커버하는 팔다리가 타격을 받는다. 시선이 살아 있어야 제대로 방어하면서 반격을 할 수 있다.

세상의 변화를 내다보고 나아가 유리하게 만들려면 통찰력이 필요하다. 눈앞의 일에 매달려서 시키는 일만 열심히 하면 절대로 얻을 수 없는 능력이다. 내가 아는 것이 전부이고 우리 회사가 최고라는 유치한 생각은 성실한 머슴의 덕목일 수는 있지만 미래를 준비하고 만드는 경영자에게는 독약이다.

세상의 모든 변화를 내다보고 담아낼 수는 없다. 정말로 좋은 전략은 계속적 수정과 진화를 통해 미래의 변화를 담으면서 예상치 못한 변화를 흡수하거나 일정 시간 견딜 수 있어야 한다. 요즘 얘기하는 회복탄력성(resilience)과 단단함(robustness)의 개념이다.

스마트폰에서 보듯이 과거 하드웨어로 작동하던 기능이 소프트웨어로 구현되고 네트워크를 통해 상시적으로 업그레이드된다. 신제품, 신공정을 도입하고 기능을 확장하는 것도 쉬워졌다. 이는 전략계획과 관리에 있어 여유를 둬 탄력적으로 변화를 담아낼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런 상식이 경영의 현실에선 어렵다.

사내정치의 생존게임

부산에서 하와이로 가는 항해계획이 아무리 정교해도 태풍이 예상되면 항로와 일정을 바꿔야 한다. 가는 길에 보물섬을 발견하면 최소한 탐문 정찰은 해야 마땅하고 새로운 항해기술을 발견했으면 시험운항은 시도할 필요가 있다. 이것이 일하는 과정에서 문제를 풀어가면서 계획 자체를 수정하고 사업 모델을 진화시키는 애자일(agile) 경영이다. 그러나 멍청한 경영자와 영악한 아전들이 어울리는 관료제의 생존게임에서는 매우 어려운 일이다.

그룹의 ‘실세’로 불리는 B 부회장, 치밀한 계획은 어긋나는 일이 없고 촘촘한 관리통제로 성과목표를 지켜낸다. 그런데 알고 보면 한번 세운 계획은 ‘신성 불가침의 어명’으로 찍어 누르고 그의 수하들이 시도 때도 없이 상황 보고를 요구하며 간섭해 짜맞춘 결과일 뿐이다. 보물섬이 나와도 항로와 일정을 바꾸면 감사 대상이 되고 회장님께 보고하지 않은 일은 아예 세상에 없어야 한다.

B 부회장의 치밀한 계획과 촘촘한 관리를 돕는 분들도 고민이 많다. 돈 버는 일이 아니니 회사 어려울 때는 숙청 대상이 될까 불안하다. 그들 사이의 경쟁도 치열한데 충성도가 업적이니 회사가 아닌 정치판이 된다. 함께 손잡고 버티며 경영자를 포획하는 생존게임이 시작되면 그들의 품에 숨긴 조각 비밀들은 소중한 밑천이 된다. 그럴듯한 경영학 용어와 그래픽으로 도배된 보고서, 화려한 발표기술과 가지런히 맞춰진 숫자도 한몫하는데 회장님 티타임에 쓸 얘깃거리를 따로 만들어 주는 컨설턴트도 있다. 이런 궁정정치 충성게임의 현장에서 ‘회장님께 드린 말씀’은 한 치도 달라질 수 없다.

활동복에 여유를 두고 재건축 용적률도 가려서 받는 평범한 상식이 경영의 현실에서는 어렵다면 혹시 경영학은 멍청한 경영자와 영악한 아전들의 만행을 꾸며주는 포장술에 불과한 것 아닐까.

박찬희 중앙대 경영학과 교수

한경비즈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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