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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 끝까지 우려먹다
전세사기 연루 주택서 또 임대사업
가압류 후 빈집 찾아 조직적 돈벌이
임차권 등기 해둔 집도 짐 빼고 깔세
경매 낙찰까지 소유권… 제재 어려워
피해자들 "보증금 떼먹고 양심 없다"

편집자주

거듭 진화하는 전세사기는 단순히 제도의 한계로만 설명할 수 없다. 법과 제도의 틈을 집요하게 파고드는 조직적 금융범죄에 피해자는 다시 일어설 기회조차 잃고 있다. 집을 삶의 터전이 아닌 빚의 족쇄로 만드는 이들, 그 범행 구조를 추적했다.
경기 수원시 일가족 전세사건 피해 주택인 경기 수원시 팔달구의 한 빌라에 임차권 등기를 해 뒀던 피해 세입자의 짐이 비닐봉투에 담겨 나와 있다. 피의자 정씨가 대리인을 통해 단기임대를 놓기 위해 피해자 동의 없이 짐을 꺼낸 것이다. 전세사기피해자 경기대책위원회 제공


문이 열리지 않았다. 잠시 비워뒀던 집, 비밀번호를 잊어버렸을 리 없었다. '쿵! 쿵!' 답답한 마음에 문을 두드렸다. 얼마 안 돼 낯선 남자가 문을 열고 나왔다. 박성호(가명·30대)씨에게 남자가 물었다. "누구시죠?" 4월의 어느 날, 경기 수원시 팔달구 소재 S빌라의 작은 소란이었다.

성호씨는 전세사기 피해자다. 보증금 1억5,000만 원을 2년 넘게 받지 못한 채 비워뒀던 집을 오랜만에 찾았다. 남자는 '수원 일가족 전세사기 사건'의 주범인 정모(61)씨 대리인으로 자신을 소개했다.

정씨는 '무자본 갭투자'로 500여 명의 전세보증금 760여억 원을 가로챈 혐의로 지난해 12월 1심에서 법정최고형인 징역 15년을 선고받고 복역 중이다. 대리인은 그런 정씨로부터 건물 관리를 위임 받았다고 했다. 빌라의 공실을 놀릴 수 없어 월세를 내놓겠단 말도 덧붙였다.

성호씨는 멍했다. 수원시가 빌라를 가압류한 게 2023년. 작년 7월엔 법원이 임의경매 개시를 결정했는데, 가능한 일인가. 사건 이후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갔다.

성호씨는 주택도시보증공사(HUG)의 전세보증금반환 보증보험을 가입하지 못해 전세보증금 반환청구 소송을 따로 내야 했다. 다행히 소송에선 이겼다. 문제는 정씨였다. 돈을 돌려줄 생각이 없었다.

선택지는 하나. '전세사기피해자 지원 및 주거안정에 관한 특별법(이하 특별법)'에서 보장한 한국토지주택공사(LH) 피해주택 매입 신청이었다. 직장 때문에 이사를 해야 했지만 임차인 대항력과 우선변제권을 인정받기 위해 임차권 등기를 해뒀다. 물건도 그대로 놔뒀다. '그런데 왜? 내 집에 낯선 사람이?'

일단 경찰에 도움을 청했다. 대리인은 "빈집"이라고 주장했다. 경매가 완료되지 않아 여전히 정씨 소유란 말을 반복했다. 월세도 자신의 합법적 재산권 활용이라고 했다. 고민하던 경찰은 성호씨를 말렸다. 성호씨는 "감옥에서 월세로 돈을 버는 게 상식적인가"라고 따졌지만, 소용없었다.

경기 수원시 세류동은 일대 사회초년생들이 처음 독립해 보금자리로 찾아드는 곳이다. 2023년 수원 일가족 전세사기 사건에 무방비로 당해 가장 피해가 컸던 지역이기도 하다. 수원=김지현 기자


전세사기 일당의 '막판 쥐어짜기'...가압류 집 임대



전세 사기범들이 경매를 앞둔 집에 '단기임대 세입자'를 들여 돈을 버는 사례가 속출하고 있다. 사기가 인정돼도 경매 절차가 끝날 때까지는 임대사업을 계속 할 수 있다는 법의 허점을 교묘하게 이용한 것이다. 경매 절차까지 최소 1~2년, 이 기간 '깔세(선 월세)'로 추가 수익을 노리는, 일종의 '탐욕'이다.

수법은 간단하다. 임대인은 재산 압류를 피하기 위해 모집책(대리인)을 내세운다. 빈집을 찾아내 단기 세입자를 구하고, 수익은 대리인과 집주인(사기범)이 나눠 갖는다. 30채 빌라에서 월세 80만 원을 받으면, 매달 2,400만 원을 벌 수 있다는 얘기다. 대리인이 직접 계약해 중개 수수료를 낼 필요도 없다.

수원 임대왕 정씨도 개중 하나다. 본보 확인 결과, 최근 부동산 직거래 사이트나 사회관계망서비스(SNS) 등에 소개된 수원 지역 원룸이나 빌라 단기임대 물건 중 상당수는 정씨 보유 건물이었다. '역세권 풀옵션 원룸' '반려동물 가능한 무보증 월세' '무보증월세+테라스+풀옵션+인프라' 등을 내세워 단기세입자를 구하는 글이 4, 5월 사이 여러 차례 게시됐다. 월세는 집 크기에 따라 60만~110만 원 선. 무보증 단기임대로 최소 3개월, 최대 6개월 계약이 가능, 기간 연장도 가능하다는 글이다.

상담을 가장한 본보 질문에 임대인은 "경매가 걸려 있어도 잠깐 사는 데 아무 문제 없다"고 설명했다. 그는 "집주인에게 위임을 받았기 때문에 중개인 도움도 필요없다"는 말도 덧붙였다.

그렇다면 경매가 예정된 매물에 월세를 놓아도 문제는 없을까. 정씨 건물 인근의 부동산 중개인은 "임차권 등기가 되어 있는 물건은 보증금이 반환되지 않았다는 뜻"이라며 "거주 중에 경매 절차가 진행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일반적인 일은 아니다"고 했다. 또 다른 부동산 중개인은 "신축이거나 리모델링을 한 건물이니 놀리기에 아까웠을 것"이라고 했다.

악성 임대인의 단기 세입자 모집 수법. 그래픽=김대훈 기자


"월세에서 5만 원 떼 피해자 주겠다" 황당 회유



피해자들은 납득하지 못한다. 정씨가 소유한 수원 권선구 A빌라에 살았던 이종혁(가명·30대)씨도 취재진에게 도어록 비밀번호가 바뀌어 있었던 4월 중순의 황당함을 털어놨다. 집에 남겨둔 짐은 현관문 앞에 봉지째 쌓여 있었다. "무단 침입"이라고 따졌지만, 대리인은 도리어 "이사를 간 당신이 무단침입"이라고 맞섰다. 이어 "수도나 가스 사용량이 없는 세대라서 비어있다고 판단, 단기임대를 한 것"이라고 당당히 말했다.

피해자들 항의에 정씨와 대리인은 황당한 제안을 내놓고 있다. 또 다른 빌라에 거주했던 최영은(가명·30대)씨는 "피해자 구제라며 매달 5~10만 원씩 떼어준다고 하더라"고 말했다. 그는 "전 재산인 전세금을 1억 넘게 떼먹고 그깟 푼돈으로 변제한다는 게 말이 되느냐"며 목소리를 높였다. 정씨 변호인은 이달 9일 2심 결심 공판에서 "단기임대의 수익은 매우 미미하다"며 "공실 수익은 피해를 회복할 자금을 마련하려는 것"이라는 취지로 해명했다. 선고 재판은 다음 달 말 열린다.

2023년 10월 수원 전세사기 의혹의 피의자인 정씨 일가가 경찰의 압수수색을 참관하기 위해 경기 수원시 팔달구의 한 다세대주택을 찾았다가 피해 세입자들에게 항의를 받고 고개를 숙이고 있다. 연합뉴스 자료사진


꼼꼼한 전세사기범… "피해 보상 의지는 없어"



피해자들이 더욱 분노하는 건 정씨의 꼼꼼한 사기 행각 때문이다. 1심 판결문을 보면, 정씨는 2013년부터 수원, 화성, 양평 일대에서 가족과 다수의 법인 명의로 자기 자본금도 없이 은행 대출금과 임차인의 임대차보증금만으로 빌라, 오피스텔을 다량 매수했다. 아내 김모(1심 징역 6년)씨는 임대사업 부대표로 시설관리 업무를, 감정평가사인 아들(1심 징역 4년)은 소장을 맡아 임대차계약과 관련한 입·퇴실 관리를 했다. 이들은 사건이 터졌던 2023년 10월 당시 건물 총 46개동, 788세대를 가지고 있었다. 정씨는 직접 부동산을 운영하면서 사기를 숨겼고, HUG의 전세보증금반환 보증보험도 거의 들어주지 않았다.

정씨는 피해자들 전세보증금을 펑펑 썼다. 양평군 토지 매수에 30억 원, 프랜차이즈 사업에 12억 원을 투자했다. 게임아이템 구입에도 13억 원을 허비했다. 법인카드로 15억 원 상당 카드깡을 한 정황도 확인됐다. 이재호 전세사기피해자 경기대책위 위원장은 "전세사기범들은 금전적 피해를 보상할 생각이 없는 게 공통점"이라고 했다.




수원 일가족 전세사기 사건 범행 조직도. 그래픽=김대훈 기자


압류된 집, 월세로 돈벌이하면서 당당… 왜?



업계에서는 깔세가 이미 전세사기 일당들의 '막판 돈벌이 공식'으로 자리를 잡았다고 본다. 실제 전세사기의 주 무대였던 서울 강서구 화곡동에서도 '깔세'로 단기 세입자를 구하는 사례는 쉽게 확인 가능하다. 대부분 HUG가 전세금을 먼저 내주고 가압류를 건 뒤 경매를 진행 중인 물건이었다. 서울 관악구 봉천동 H빌라의 경우엔 12세대 중 절반 이상에 깔세를 놓은 것으로 파악됐다. HUG가 전세금을 대신 내주면서 기존 세입자가 나가자마자 단기임대를 놓은 것이다.

깔세의 방식도 진화하고 있다. 부동산 관리업체가 악성임대인을 직접 수소문해 단기 임대를 구하고 있다. 화곡동의 한 공인중개사는 "주로 부동산 컨설턴트 업체가 주축이 돼 깔세 물건을 관리하는데, 전국적인 연락망이 있는 것으로 안다"며 "경매 절차 기간 동안 임대인이랑 업체랑 수익을 나누면 서로 이득이기 때문"이라고 귀띔했다.

수법도 교활해지고 있다. 수원 사례를 보면, 피해자들이 임차권 등기를 해 점유권을 인정받은 곳에까지 정씨 대리인은 수도·전기 계량기를 살펴 빈집이란 사실을 확인하고, 집을 재점유한 후 깔세를 받고 있다.

전세사기범 일당이 부동산 직거래 사이트에 올린 단기임대 세입자 모집 글. 가압류 혹은 경매가 진행 중인 건물이기 때문에 부동산 중개인을 거치지 않고 월세를 선납하는 직거래를 원하는 게 특징이다. 부동산 직거래 사이트 캡처


피해자 고통 덜어주려 특별법에도… 가해자는 "나몰라라"



가해자들은 여전히 피해 보상에 관심이 없다. 특별법은 HUG 전세보증금반환보증에 가입하지 못한 피해 주택을 LH로 하여금 매입하도록 하고 있다. 피해 사각지대를 보완하겠다는 취지에서다. 하지만 전세사기 일당은 이런 매물까지 깔세를 놓기 일쑤다. 정씨 소유 물건도 LH 피해주택 매입이 진행 중이다. 피해자들은 단기임대 세입자 때문에 이 절차가 늦어질 것이란 우려가 크다.

정부는 고민이 깊다. 현행법상 가압류가 된 매물이라도 경매 낙찰 전까지는 기존 소유권자가 재산권을 행사할 수가 있다. 국토부 관계자는 "깔세 문제를 원천적으로 막을 순 없겠지만, 전세사기 피해자들의 LH 피해주택 매입이 지연되지 않도록 절차를 효율화하는 방안을 찾고 있다"고 말했다.

박효주 참여연대 주거조세팀장은 "다만 임차권 등기를 해놓은 집에 무단 침입을 하고 짐을 꺼낸 것은 범죄 행위로 봐야 한다"면서 "피해자들이 노력해서 특별법과 LH 매입 방안이 나온 것인 만큼 깔세 문제에 정부가 더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고 지적했다.

목차별로 읽어보세요

  1. ① <상> 진짜 돈 되는 사기
    1. • '전세 대출사기'로 반년 만에 100억…사기꾼만 웃는 '몸빵 재테크'
      (www.hankookilbo.com/News/Read/A2025042415420004534)
    2. • '월세'로 알았는데 모두 '전세'…진화하는 사기, 정부는 뒷짐만
      (www.hankookilbo.com/News/Read/A2025050912400004930)
  2. ② <중>끝까지 우려먹다
    1. • "전세 사기꾼이 감옥에서 돈 벌어도 되나요?"…'깔세'로 배불리는 나쁜 집주인들
      (www.hankookilbo.com/News/Read/A2025050521360000367)
    2. • HUG '깔세' 피해만 240채…악성 임대인 막판 돈벌이 왜 못 막나
      (www.hankookilbo.com/News/Read/A2025050914160005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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