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차그룹 담당 부회장’으로 全 사업 총괄
정의선 회장과 이어온 40년 인연… ‘강한 2인자’
자율주행 기술 확보 등 과제도 산적
과거 한국의 대다수 기업은 창업자의 강력한 리더십과 결단력에 의존해 움직였다. 이병철 회장이 이끈 삼성과 정주영 회장이 이끈 현대가 대표적인 예다. 그러나 글로벌 시장에서 최고의 자리를 두고 다투는 지금 이들 기업은 총수 혼자 경영을 책임지기 어려울 정도로 규모가 커졌다. 총수의 가장 가까운 자리에서 각 분야를 관리하고 미래를 위한 최종 의사 결정에 핵심적 역할을 하는 이른바 ‘키맨(keyman)’의 역할이 중요해졌다. 한국 경제를 이끄는 주요 기업들의 키맨을 소개하고 이들에게 주어진 역할과 과제가 무엇인지 짚어본다. [편집자주]
장재훈 현대차그룹 부회장은 지난 5일(현지 시각)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세계 최대 정보기술(IT) 행사 ‘CES 2026′ 미디어데이를 마친 후 가진 간담회에서 이같이 말했다. 현대차그룹은 이번 CES에서 ‘인공지능(AI) 로보틱스’를 역점 신사업으로 소개하고 전면에 내세웠다. 또 엔비디아와의 전략적 협업 등을 통해 자율주행 기술을 신속히 확보하겠다는 계획도 밝혔다.
현대차그룹을 대표해 미래 사업에 대한 청사진을 제시하고 세부 전략을 소개한 인물은 장 부회장이었다. 정의선 회장이 이재명 대통령의 방중(訪中) 경제 사절단으로 합류해 자리를 비운 사이 장 부회장은 CES의 실질적 주인공으로서 총수의 자리를 빈틈 없이 메웠다.
이날 간담회에서 장 부회장의 좌우에는 호세 무뇨스 현대차 대표, 이규석 현대모비스 대표, 정준철 현대차·기아 제조부문장 등이 앉았다. 또 현대차그룹의 로보틱스 자회사인 보스턴 다이나믹스의 로버트 플레이트 최고경영자(CEO) 등도 자리를 지켰다. 그룹 주요 계열사 수뇌부의 한 가운데에서 대외적 행사를 주도한 장 부회장의 모습은 현대차그룹 내에서 그의 위상을 드러내는 장면이었다.
장재훈 부회장은 재계에서 ‘가장 힘센 그룹 내 2인자’라는 평가를 받는다. 현대차그룹의 유일한 부회장으로 정의선 회장 바로 다음 가는 위치에 있을 뿐 아니라 어린 시절부터 정 회장과 함께 성장하며 고락(苦樂)을 함께해 온 진정한 ‘오른팔’이라는 이유에서다. 그는 공채 출신의 ‘정통 현대맨’은 아니지만, 정 회장이 그룹을 장악하고 현대차를 도요타, 폴크스바겐과 함께 세계 3대 완성차그룹으로 키우는 과정에서 큰 역할을 담당했다.
그룹 실무 총괄·미래 사업 밑그림까지… ‘강한 2인자’
현대차그룹은 지난달 18일 단행한 사장단·임원 인사를 통해 장 부회장을 ‘현대차그룹 담당 부회장’으로 선임했다. 이전까지 완성차 담당 부회장으로서 현대차·기아의 전체 사업과 투자, 전략 등을 이끌었던 장 부회장이 자율주행·소프트웨어중심차량(SDV)·로보틱스 등 그룹의 미래 신사업까지 총괄하게 된 것이다.
그는 앞서 지난 2024년 11월 부회장으로 승진했다. 지난 2020년부터 시작된 정의선 회장 체제에서 처음으로 임명된 부회장이다.
정몽구 명예회장은 기획과 연구개발(R&D), 노무 등의 분야에서 여러 명의 부회장을 뒀었다. 그러나 정의선 회장은 2018년 수석부회장이 되면서 당시 부회장들을 모두 퇴임시킨 후 한동안 부회장을 두지 않았다.
장 부회장은 승진 이후 여러 행사에 현대차그룹의 대표로 참석하며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다. 정 회장이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 최태원 SK 회장 등 주요 그룹 총수들과 함께 주로 국가나 재계 차원의 행사에 나서고, 장 부회장은 사업이나 사회 공헌 등과 관련한 쪽에 참석하는 방식으로 역할을 분담한 것이다.
현대차그룹이 추진하고 있는 주요 사업도 대부분 장 부회장이 주도해 추진하고 있다. 대표적인 분야가 수소 사업이다. 장 부회장은 정 회장 취임 이후 현대차그룹이 대규모로 투자를 하고 있는 수소 분야를 총괄 지휘하고 있다. 지난해에는 수소 경제 관련 글로벌 CEO들의 협의체인 수소위원회의 공동 의장을 맡기도 했다.
‘동네 형’에서 대학까지 동문… 정의선 회장 ‘멘토’
장 부회장은 지난 2011년 현대글로비스의 글로벌 사업실장 상무로 임명되며 현대차그룹에 합류했다. 이듬해 현대차 상무로 자리를 옮긴 후 고객채널서비스사업부장, 인사(HR) 사업부장, 경영지원본부장, 국내사업본부장 등 여러 분야의 요직을 거치며 2021년 현대차 대표이사로 승진했다.
장 부회장이 현대차그룹에 들어온 후 불과 14년 만에 2인자로 실권을 쥘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정의선 회장과 개인적 흉금까지 털어놓을 수 있는 최측근이었기에 가능했다는 분석이 많다.
재계 관계자에 따르면 장 부회장은 어린 시절부터 정 회장과 ‘동네 선후배’로 친분을 쌓아왔다고 한다. 나이는 장 부회장이 1964년생으로 1970년생인 정 회장보다 6살 많다. 두 사람은 모두 경복초 출신으로 장 부회장은 서울고를, 정 회장은 휘문고를 각각 졸업했다. 대학 역시 같은 고려대를 나왔다.
개인 사업을 하던 장 부회장을 현대차그룹으로 이끈 것도 정 회장이다. 정 회장은 기아 사장으로 일하다 2009년 8월 현대차의 기획·영업 담당 부회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당시는 정몽구 회장이 건재한 데다, 부회장단을 포함한 주요 임원들이 모두 정몽구 회장의 사람들로 채워진 상황이었다. 정의선 회장이 내부에서의 입지를 넓혀가고 ‘대권(大權)’을 잡은 이후 현대차그룹을 이끌어갈 밑그림을 그리기 위해 영입한 인물이 장 부회장이다.
닛산·노무라·GE 거치며 국제 감각 키워… 현대차 문화를 바꿨다
“출근할 때 추리닝(운동복)이나 반바지를 입어도 되나요?”
“물론입니다. 입으세요. T.P.O(Time, Place, Occasion·시간, 장소, 상황)에 따라 판단해 선택하면 됩니다."
지난 2019년 3월 4일 서울 양재동 현대차그룹 본사 로비에서 열린 타운홀미팅에서 장 부회장은 한 직원의 질문에 이같이 답했다. 이날 현대차가 1967년 창사 후 처음으로 임직원 자율복장 제도를 도입했다. 당시 경영지원본부장이었던 장 부회장은 미팅을 진행하며 복장 규정을 바꾼 취지와 세부 운영 방안 등에 대해 설명했다.
현대차가 새로운 제도를 적용하면서 총수 다음가는 실권을 쥔 책임자가 임직원들과 공개적인 자리를 갖고 소통한 것은 당시가 처음이었다고 한다. 이후 정의선 회장도 임직원들과 직접 만나 대화를 하는 자리를 자주 가지면서 타운홀미팅은 현대차그룹의 대표적인 기업 문화로 자리잡았다.
장 부회장이 주도한 혁신은 비단 복장의 변화 뿐이 아니었다. 직급을 폐지하고 임원 이하 전 직원을 책임매니저와 매니저로 구분하는 인사 혁신을 단행했다. 인사 체계도 기존의 연공 서열 중심에서 효율적 성과 중심으로 바꿨다. 또 공채 중심의 문화를 바꾸기 위해 여러 분야에서 경력 직원도 적극적으로 채용하기 시작했다.
현대차그룹은 고(故) 정주영 회장 시절부터 수직적 위계질서가 강한 조직으로 꼽혔다. 위에서 지시가 내려오면 아래에서 일사불란하게 움직여 실행하는 ‘상명하복’과 강한 추진력이 현대차의 특징이었다. 여기에 장 부회장이 주도한 혁신이 맞물리면서 현대차는 조직 전체가 변화에 가장 빠르고 능동적으로 반응하면서 창의성과 효율성을 강조하는 기업으로 탈바꿈했다.
현대차그룹이 완성차·부품 제조 등 본업 외에 최근 몇 년 간 로봇과 수소, 도심항공모빌리티 등 다양한 신사업의 추진 속도를 높이고 있는 데는 장 부회장 주도로 진행된 기업 문화의 변화가 밑바탕이 됐다는 평가가 많다.
장 부회장이 앞장서 오랜 기간 이어졌던 현대차의 기업 문화를 바꿀 수 있었던 것은 그가 글로벌 무대에서 다양한 경험을 거친 후 합류했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그는 고려대 사회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보스턴대에서 경영학 석사(MBA) 학위를 받은 후 삼성물산에서 사회 생활의 첫 발을 뗐다. 이후 닛산과 노무라증권, 제너럴일렉트릭(GE) 등 여러 외국 기업에서 근무하며 국제 감각을 키웠다.
현대차 합류 전에는 개인 사업을 통해 시행 착오를 거치며 자신만의 경영 노하우를 쌓기도 했다. 서울 용산구 한남동에 있는 한 유명 이탈리아 음식점은 과거 장 부회장이 운영했던 곳으로 알려져 있다.
재계 관계자는 “장 부회장이 현대차 공채 출신으로 올라간 인물이었다면 오래된 기업 문화를 바꾸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현대차도 럭셔리 브랜드 할 수 있다”… ‘도전 DNA’ 이식
장 부회장은 지난 2020년 8월 제네시스사업본부장으로 임명됐다. 그는 당시 현대차 경영지원본부장과 국내사업본부장을 겸직하고 있었다. 회사의 안살림과 국내 판매를 책임지던 상황에서 현대차그룹의 고급 브랜드인 제네시스를 성장시키라는 특명까지 받게 된 것이다.
제네시스사업의 지휘봉을 잡은 후 장 부회장은 줄곧 임직원들에게 “우리도 글로벌 시장에서 통하는 럭셔리 브랜드를 충분히 만들 수 있다”고 강조했다고 한다. 그의 전략에 따라 제네시스는 브랜드 가치부터 새로 정립했다. 고연령대의 높은 직책에 있는 사람들이 타는 차라는 이미지를 벗어나 젊은 자산가들이 선택하는 새로운 브랜드의 고급차라는 인식을 부각시켰다.
장 부회장은 글로벌 시장에서 제네시스 브랜드의 입지를 확장하는데도 많은 공을 들였다. 미국 시장에 스포츠유틸리티차량(SUV) 모델인 GV80과 GV70을 잇따라 투입하며 판매량을 빠르게 늘렸고, 유럽과 중국 등에도 잇따라 진출했다.
지난 2019년 제네시스의 글로벌 판매량은 7만7135대였는데, 장 부회장이 제네시스 사업 총괄로 나선 2020년에는 2배에 가까운 13만2450대로 급증했다. 2021년에는 20만대, 2022년에는 22만대를 돌파했다. 장 부회장의 공언대로 국내에서만 통하는 고급차라는 한계를 벗어나 글로벌 시장에 안착하는데 성공한 것이다.
장 부회장이 현대차에 이식한 ‘도전 DNA’의 또 다른 사례로 일본 시장 개척을 꼽는 의견도 많다. 지난 2009년 판매 부진 끝에 일본에서 철수했던 현대차는 2022년 아이오닉5와 넥쏘 등 친환경차를 앞세워 다시 도전에 나섰다. 일본 시장 재진출은 닛산과 노무라 등 일본 기업에서 오랜 기간 일한 경험이 있는 장 부회장이 진두지휘했다.
다만 일본에서 현대차는 아직까지 눈에 띄는 성과는 내지 못한 상황이다. 지난해 현대차 일본 법인의 판매량은 1169대였다. 전년(619대)과 비교하면 두 배 가까이 늘었지만, 재진출 후 3년 여가 지났다는 점을 감안하면 기대치를 충족했다고 평가하기는 어려운 수준이다. 이 때문에 업계에서는 일본에서 현대차의 브랜드 이미지를 강화하고, 전기차에 대한 소비자 만족도를 개선해 더 빠르게 성과를 끌어올려야 한다는 의견이 나온다.
美 관세 극복·中 공세·자율주행·로봇… “지금부터 진정한 시험대”
그룹 안팎에서는 지금부터가 장 부회장이 능력을 증명해야 하는 진정한 시험 무대가 될 것이라는 의견도 나온다. 미국의 고율 관세 등 대내외 불확실성이 커지고 경영 환경이 악화되고 있는 만큼 그룹 담당 부회장이라는 중책을 맡고 있는 장 부회장의 어깨도 무거워질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현대차는 올해 4월부터 미국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로부터 25%의 관세를 적용받았다. 지난달 한국과 미국이 무역 협정을 타결하면서 관세율은 일본과 같은 15%로 떨어졌지만, 자유무역협정(FTA)으로 수출 관세가 붙지 않았던 과거와 비교하면 미국 시장에서의 수익성은 크게 낮아졌다.
현대차가 한·미 FTA의 수혜를 누리는 동안 일본 자동차에는 2.5%의 관세가 부과됐었다. 앞으로 도요타, 혼다 등 일본 경쟁사들과 동일한 조건으로 경쟁해야 하는 만큼 장 부회장은 새로운 생산·판매 전략을 수립해야 할 상황이다.
최근 거세지는 중국 자동차 업체들의 공세도 장 부회장이 앞장서 해결해야 할 과제로 꼽힌다. 중국 기업들은 저렴한 가격과 높은 전기차 기술력을 앞세워 유럽과 동남아시아 등에서 점유율을 높여가고 있다.
프라이스워터하우스쿠퍼스(PwC)에 따르면 인도네시아·태국·말레이시아·베트남·싱가포르·필리핀 등 동남아 6개국에서 지난 2023년부터 올해 상반기까지 한국차의 점유율은 5%에서 4%로 하락한 반면 중국차는 3%에서 9%로 상승했다.
유럽에서도 중국차의 점유율은 5%를 넘어섰다. 특히 BYD 등 중국 전기차 업체들이 튀르키예와 헝가리, 스페인 등에 짓고 있는 완성차 제조 공장이 내년부터 가동을 시작하면 중국차의 점유율은 더욱 빠르게 상승할 것으로 전망된다.
이 밖에 수소와 로봇, 도심항공모빌리티, 일본 시장 개척 등 여러 신사업에서 수익을 창출하고 성과를 내는 일도 장 부회장의 몫이다. 특히 최근 테슬라 등 경쟁사에 비해 한걸음 뒤처지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 자율주행 기술 수준을 최대한 빠르게 끌어올리는 일이 시급한 과제로 꼽힌다.
정의선 회장과 이어온 40년 인연… ‘강한 2인자’
자율주행 기술 확보 등 과제도 산적
과거 한국의 대다수 기업은 창업자의 강력한 리더십과 결단력에 의존해 움직였다. 이병철 회장이 이끈 삼성과 정주영 회장이 이끈 현대가 대표적인 예다. 그러나 글로벌 시장에서 최고의 자리를 두고 다투는 지금 이들 기업은 총수 혼자 경영을 책임지기 어려울 정도로 규모가 커졌다. 총수의 가장 가까운 자리에서 각 분야를 관리하고 미래를 위한 최종 의사 결정에 핵심적 역할을 하는 이른바 ‘키맨(keyman)’의 역할이 중요해졌다. 한국 경제를 이끄는 주요 기업들의 키맨을 소개하고 이들에게 주어진 역할과 과제가 무엇인지 짚어본다. [편집자주]
“인공지능(AI) 로보틱스 사업의 성공 여부는 속도에 달려 있다. 그룹 전 계열사가 달라붙어 로봇 생태계를 구축하는데 집중할 것이다.
”
장재훈 현대차그룹 부회장은 지난 5일(현지 시각)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세계 최대 정보기술(IT) 행사 ‘CES 2026′ 미디어데이를 마친 후 가진 간담회에서 이같이 말했다. 현대차그룹은 이번 CES에서 ‘인공지능(AI) 로보틱스’를 역점 신사업으로 소개하고 전면에 내세웠다. 또 엔비디아와의 전략적 협업 등을 통해 자율주행 기술을 신속히 확보하겠다는 계획도 밝혔다.
현대차그룹을 대표해 미래 사업에 대한 청사진을 제시하고 세부 전략을 소개한 인물은 장 부회장이었다. 정의선 회장이 이재명 대통령의 방중(訪中) 경제 사절단으로 합류해 자리를 비운 사이 장 부회장은 CES의 실질적 주인공으로서 총수의 자리를 빈틈 없이 메웠다.
장재훈 현대차그룹 부회장이 지난 5일(현지 시각)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CES 2026' 미디어행사 직후 열린 간담회에서 기자들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왼쪽부터 이규석 현대모비스 대표이사(사장), 정준철 현대차·기아 제조부문장(사장), 호세 무뇨스 현대차 대표이사(사장), 장재훈 현대차그룹 부회장, 로버트 플레이터 보스턴다이나믹스 CEO, 캐롤리나 파라다 구글 딥마인드 시니어 디렉터(로보틱스 총괄), 김흥수 현대차·기아 GSO 본부장. /현대차그룹 제공
이날 간담회에서 장 부회장의 좌우에는 호세 무뇨스 현대차 대표, 이규석 현대모비스 대표, 정준철 현대차·기아 제조부문장 등이 앉았다. 또 현대차그룹의 로보틱스 자회사인 보스턴 다이나믹스의 로버트 플레이트 최고경영자(CEO) 등도 자리를 지켰다. 그룹 주요 계열사 수뇌부의 한 가운데에서 대외적 행사를 주도한 장 부회장의 모습은 현대차그룹 내에서 그의 위상을 드러내는 장면이었다.
장재훈 부회장은 재계에서 ‘가장 힘센 그룹 내 2인자’라는 평가를 받는다. 현대차그룹의 유일한 부회장으로 정의선 회장 바로 다음 가는 위치에 있을 뿐 아니라 어린 시절부터 정 회장과 함께 성장하며 고락(苦樂)을 함께해 온 진정한 ‘오른팔’이라는 이유에서다. 그는 공채 출신의 ‘정통 현대맨’은 아니지만, 정 회장이 그룹을 장악하고 현대차를 도요타, 폴크스바겐과 함께 세계 3대 완성차그룹으로 키우는 과정에서 큰 역할을 담당했다.
그룹 실무 총괄·미래 사업 밑그림까지… ‘강한 2인자’
현대차그룹은 지난달 18일 단행한 사장단·임원 인사를 통해 장 부회장을 ‘현대차그룹 담당 부회장’으로 선임했다. 이전까지 완성차 담당 부회장으로서 현대차·기아의 전체 사업과 투자, 전략 등을 이끌었던 장 부회장이 자율주행·소프트웨어중심차량(SDV)·로보틱스 등 그룹의 미래 신사업까지 총괄하게 된 것이다.
그는 앞서 지난 2024년 11월 부회장으로 승진했다. 지난 2020년부터 시작된 정의선 회장 체제에서 처음으로 임명된 부회장이다.
정몽구 명예회장은 기획과 연구개발(R&D), 노무 등의 분야에서 여러 명의 부회장을 뒀었다. 그러나 정의선 회장은 2018년 수석부회장이 되면서 당시 부회장들을 모두 퇴임시킨 후 한동안 부회장을 두지 않았다.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오른쪽)이 6일(현지 시각) 미국 라스베이거스 컨벤션센터(LVCC)에서 장재훈 부회장과 이동하며 대화하고 있다. /뉴스1
장 부회장은 승진 이후 여러 행사에 현대차그룹의 대표로 참석하며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다. 정 회장이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 최태원 SK 회장 등 주요 그룹 총수들과 함께 주로 국가나 재계 차원의 행사에 나서고, 장 부회장은 사업이나 사회 공헌 등과 관련한 쪽에 참석하는 방식으로 역할을 분담한 것이다.
현대차그룹이 추진하고 있는 주요 사업도 대부분 장 부회장이 주도해 추진하고 있다. 대표적인 분야가 수소 사업이다. 장 부회장은 정 회장 취임 이후 현대차그룹이 대규모로 투자를 하고 있는 수소 분야를 총괄 지휘하고 있다. 지난해에는 수소 경제 관련 글로벌 CEO들의 협의체인 수소위원회의 공동 의장을 맡기도 했다.
‘동네 형’에서 대학까지 동문… 정의선 회장 ‘멘토’
장 부회장은 지난 2011년 현대글로비스의 글로벌 사업실장 상무로 임명되며 현대차그룹에 합류했다. 이듬해 현대차 상무로 자리를 옮긴 후 고객채널서비스사업부장, 인사(HR) 사업부장, 경영지원본부장, 국내사업본부장 등 여러 분야의 요직을 거치며 2021년 현대차 대표이사로 승진했다.
장 부회장이 현대차그룹에 들어온 후 불과 14년 만에 2인자로 실권을 쥘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정의선 회장과 개인적 흉금까지 털어놓을 수 있는 최측근이었기에 가능했다는 분석이 많다.
재계 관계자에 따르면 장 부회장은 어린 시절부터 정 회장과 ‘동네 선후배’로 친분을 쌓아왔다고 한다. 나이는 장 부회장이 1964년생으로 1970년생인 정 회장보다 6살 많다. 두 사람은 모두 경복초 출신으로 장 부회장은 서울고를, 정 회장은 휘문고를 각각 졸업했다. 대학 역시 같은 고려대를 나왔다.
개인 사업을 하던 장 부회장을 현대차그룹으로 이끈 것도 정 회장이다. 정 회장은 기아 사장으로 일하다 2009년 8월 현대차의 기획·영업 담당 부회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당시는 정몽구 회장이 건재한 데다, 부회장단을 포함한 주요 임원들이 모두 정몽구 회장의 사람들로 채워진 상황이었다. 정의선 회장이 내부에서의 입지를 넓혀가고 ‘대권(大權)’을 잡은 이후 현대차그룹을 이끌어갈 밑그림을 그리기 위해 영입한 인물이 장 부회장이다.
닛산·노무라·GE 거치며 국제 감각 키워… 현대차 문화를 바꿨다
“출근할 때 추리닝(운동복)이나 반바지를 입어도 되나요?”
“물론입니다. 입으세요. T.P.O(Time, Place, Occasion·시간, 장소, 상황)에 따라 판단해 선택하면 됩니다."
지난 2019년 3월 4일 서울 양재동 현대차그룹 본사 로비에서 열린 타운홀미팅에서 장 부회장은 한 직원의 질문에 이같이 답했다. 이날 현대차가 1967년 창사 후 처음으로 임직원 자율복장 제도를 도입했다. 당시 경영지원본부장이었던 장 부회장은 미팅을 진행하며 복장 규정을 바꾼 취지와 세부 운영 방안 등에 대해 설명했다.
현대차가 새로운 제도를 적용하면서 총수 다음가는 실권을 쥔 책임자가 임직원들과 공개적인 자리를 갖고 소통한 것은 당시가 처음이었다고 한다. 이후 정의선 회장도 임직원들과 직접 만나 대화를 하는 자리를 자주 가지면서 타운홀미팅은 현대차그룹의 대표적인 기업 문화로 자리잡았다.
장 부회장이 주도한 혁신은 비단 복장의 변화 뿐이 아니었다. 직급을 폐지하고 임원 이하 전 직원을 책임매니저와 매니저로 구분하는 인사 혁신을 단행했다. 인사 체계도 기존의 연공 서열 중심에서 효율적 성과 중심으로 바꿨다. 또 공채 중심의 문화를 바꾸기 위해 여러 분야에서 경력 직원도 적극적으로 채용하기 시작했다.
장재훈 부회장(왼쪽에서 두번째)은 정의선 회장(왼쪽에서 세번째)이 임직원들과 만남을 가질 때마다 자리를 함께 하며 그룹 조직 문화 변화를 진두지휘하고 있다. 사진은 지난해 12월 정의선 현대자동차그룹 회장이 '현대차그룹 싱가포르 글로벌 혁신센터(HMGICS)'에서 임직원 300여 명을 대상으로 2시간 동안 진행된 타운홀 미팅을 진행하는 모습. /현대차 제공
현대차그룹은 고(故) 정주영 회장 시절부터 수직적 위계질서가 강한 조직으로 꼽혔다. 위에서 지시가 내려오면 아래에서 일사불란하게 움직여 실행하는 ‘상명하복’과 강한 추진력이 현대차의 특징이었다. 여기에 장 부회장이 주도한 혁신이 맞물리면서 현대차는 조직 전체가 변화에 가장 빠르고 능동적으로 반응하면서 창의성과 효율성을 강조하는 기업으로 탈바꿈했다.
현대차그룹이 완성차·부품 제조 등 본업 외에 최근 몇 년 간 로봇과 수소, 도심항공모빌리티 등 다양한 신사업의 추진 속도를 높이고 있는 데는 장 부회장 주도로 진행된 기업 문화의 변화가 밑바탕이 됐다는 평가가 많다.
장 부회장이 앞장서 오랜 기간 이어졌던 현대차의 기업 문화를 바꿀 수 있었던 것은 그가 글로벌 무대에서 다양한 경험을 거친 후 합류했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그는 고려대 사회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보스턴대에서 경영학 석사(MBA) 학위를 받은 후 삼성물산에서 사회 생활의 첫 발을 뗐다. 이후 닛산과 노무라증권, 제너럴일렉트릭(GE) 등 여러 외국 기업에서 근무하며 국제 감각을 키웠다.
현대차 합류 전에는 개인 사업을 통해 시행 착오를 거치며 자신만의 경영 노하우를 쌓기도 했다. 서울 용산구 한남동에 있는 한 유명 이탈리아 음식점은 과거 장 부회장이 운영했던 곳으로 알려져 있다.
재계 관계자는 “장 부회장이 현대차 공채 출신으로 올라간 인물이었다면 오래된 기업 문화를 바꾸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현대차도 럭셔리 브랜드 할 수 있다”… ‘도전 DNA’ 이식
장 부회장은 지난 2020년 8월 제네시스사업본부장으로 임명됐다. 그는 당시 현대차 경영지원본부장과 국내사업본부장을 겸직하고 있었다. 회사의 안살림과 국내 판매를 책임지던 상황에서 현대차그룹의 고급 브랜드인 제네시스를 성장시키라는 특명까지 받게 된 것이다.
제네시스사업의 지휘봉을 잡은 후 장 부회장은 줄곧 임직원들에게 “우리도 글로벌 시장에서 통하는 럭셔리 브랜드를 충분히 만들 수 있다”고 강조했다고 한다. 그의 전략에 따라 제네시스는 브랜드 가치부터 새로 정립했다. 고연령대의 높은 직책에 있는 사람들이 타는 차라는 이미지를 벗어나 젊은 자산가들이 선택하는 새로운 브랜드의 고급차라는 인식을 부각시켰다.
장 부회장은 글로벌 시장에서 제네시스 브랜드의 입지를 확장하는데도 많은 공을 들였다. 미국 시장에 스포츠유틸리티차량(SUV) 모델인 GV80과 GV70을 잇따라 투입하며 판매량을 빠르게 늘렸고, 유럽과 중국 등에도 잇따라 진출했다.
장재훈 현대차 부회장이 지난 2024년 3월 25일(현지 시각) 미국 뉴욕 맨해튼 '제네시스 하우스 뉴욕'에서 제네시스 초대형 전동화 SUV '네오룬' 콘셉트를 설명하고 있다. /현대차 제공
지난 2019년 제네시스의 글로벌 판매량은 7만7135대였는데, 장 부회장이 제네시스 사업 총괄로 나선 2020년에는 2배에 가까운 13만2450대로 급증했다. 2021년에는 20만대, 2022년에는 22만대를 돌파했다. 장 부회장의 공언대로 국내에서만 통하는 고급차라는 한계를 벗어나 글로벌 시장에 안착하는데 성공한 것이다.
장 부회장이 현대차에 이식한 ‘도전 DNA’의 또 다른 사례로 일본 시장 개척을 꼽는 의견도 많다. 지난 2009년 판매 부진 끝에 일본에서 철수했던 현대차는 2022년 아이오닉5와 넥쏘 등 친환경차를 앞세워 다시 도전에 나섰다. 일본 시장 재진출은 닛산과 노무라 등 일본 기업에서 오랜 기간 일한 경험이 있는 장 부회장이 진두지휘했다.
다만 일본에서 현대차는 아직까지 눈에 띄는 성과는 내지 못한 상황이다. 지난해 현대차 일본 법인의 판매량은 1169대였다. 전년(619대)과 비교하면 두 배 가까이 늘었지만, 재진출 후 3년 여가 지났다는 점을 감안하면 기대치를 충족했다고 평가하기는 어려운 수준이다. 이 때문에 업계에서는 일본에서 현대차의 브랜드 이미지를 강화하고, 전기차에 대한 소비자 만족도를 개선해 더 빠르게 성과를 끌어올려야 한다는 의견이 나온다.
美 관세 극복·中 공세·자율주행·로봇… “지금부터 진정한 시험대”
그룹 안팎에서는 지금부터가 장 부회장이 능력을 증명해야 하는 진정한 시험 무대가 될 것이라는 의견도 나온다. 미국의 고율 관세 등 대내외 불확실성이 커지고 경영 환경이 악화되고 있는 만큼 그룹 담당 부회장이라는 중책을 맡고 있는 장 부회장의 어깨도 무거워질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현대차는 올해 4월부터 미국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로부터 25%의 관세를 적용받았다. 지난달 한국과 미국이 무역 협정을 타결하면서 관세율은 일본과 같은 15%로 떨어졌지만, 자유무역협정(FTA)으로 수출 관세가 붙지 않았던 과거와 비교하면 미국 시장에서의 수익성은 크게 낮아졌다.
현대차가 한·미 FTA의 수혜를 누리는 동안 일본 자동차에는 2.5%의 관세가 부과됐었다. 앞으로 도요타, 혼다 등 일본 경쟁사들과 동일한 조건으로 경쟁해야 하는 만큼 장 부회장은 새로운 생산·판매 전략을 수립해야 할 상황이다.
최근 거세지는 중국 자동차 업체들의 공세도 장 부회장이 앞장서 해결해야 할 과제로 꼽힌다. 중국 기업들은 저렴한 가격과 높은 전기차 기술력을 앞세워 유럽과 동남아시아 등에서 점유율을 높여가고 있다.
프라이스워터하우스쿠퍼스(PwC)에 따르면 인도네시아·태국·말레이시아·베트남·싱가포르·필리핀 등 동남아 6개국에서 지난 2023년부터 올해 상반기까지 한국차의 점유율은 5%에서 4%로 하락한 반면 중국차는 3%에서 9%로 상승했다.
유럽에서도 중국차의 점유율은 5%를 넘어섰다. 특히 BYD 등 중국 전기차 업체들이 튀르키예와 헝가리, 스페인 등에 짓고 있는 완성차 제조 공장이 내년부터 가동을 시작하면 중국차의 점유율은 더욱 빠르게 상승할 것으로 전망된다.
이 밖에 수소와 로봇, 도심항공모빌리티, 일본 시장 개척 등 여러 신사업에서 수익을 창출하고 성과를 내는 일도 장 부회장의 몫이다. 특히 최근 테슬라 등 경쟁사에 비해 한걸음 뒤처지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 자율주행 기술 수준을 최대한 빠르게 끌어올리는 일이 시급한 과제로 꼽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