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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즈니스 포커스]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 삼천리 사옥. 사진=연합뉴스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 삼천리 사옥. 사진=연합뉴스


삼천리그룹이 ‘지도표 성경김’으로 유명한 성경식품을 인수했다. 71년 전 을지로 연탄 가게에서 출발한 삼천리는 국내 도시가스 시장 점유율 1위로 성장했고 이번 인수를 통해 사업 다각화에 속도를 내고 있다.

재계에서는 이번 거래를 에너지 사업 성장 정체에 대응하는 동시에 3세 경영 체제와 맞물린 전략적 선택으로 보고 있다.

을지로 연탄 가게에서 시작된 71년 동업 신화


삼천리그룹의 뿌리는 1955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함경남도 출신 실향민인 고(故) 이장균·유성연 두 창업주가 서울 을지로에 세운 ‘삼천리연탄기업사’가 그 시작이다.

해방 직후 한국은 땔감용 장작에 의존하던 시기였고 탄광이 북측에 쏠려 있어 석탄은 귀한 몸이었다. 하지만 6·25전쟁 이후 산림 황폐화로 연료 부족이 심각해지자 정부는 석탄 개발에 사활을 걸었다. 1960~80년대 연탄은 서민의 생존 필수품이었으나 공급 부족으로 매년 ‘연탄 파동’과 사재기가 반복되던 혼란의 시기였다.

이 시기 삼천리의 독특한 경영철학이 빛을 발한다. 1956년 삼천리는 기존 19공탄보다 화력이 높고 재가 잘 깨지지 않는 ‘22공탄’을 개발했다. 폭발적인 인기가 보장된 기술이었으나 삼천리는 특허 출원 대신 기술 무상 공개를 택했다.

“국민의 연료 제조법은 모든 생산자가 공유해 삶의 질을 높여야 한다”는 창업주의 신념 때문이었다. 창업주의 ‘노블레스 오블리주’ 정신은 1980년대 가스 사업 전환 후에도 이어져 가스계량기 제조 기술을 업계에 무상 개방하는 행보로 나타났다.

이러한 공익적 철학은 두 가문의 ‘전설적인 동업’을 지탱하는 든든한 뿌리가 됐다. 두 가문은 70여 년간 지분율을 단 한 주의 오차도 없이 똑같이 맞춰왔다.

“한 사람이라도 반대하면 중요한 의사결정을 하지 않는다”는 철저한 신뢰 아래 이 씨 가문은 국내 사업(삼천리)을, 유 씨 가문은 해외 자원 및 투자(ST인터내셔널)를 분담하며 경영을 이어왔다. 현재까지도 5:5의 균형을 유지하고 있다. 이 같은 신뢰 구조가 삼천리그룹이 장기간 안정적인 성장을 이어온 배경으로 꼽힌다.

삼천리그룹 연혁. 그래픽=송영 기자
삼천리그룹 연혁. 그래픽=송영 기자


연탄에서 가스로, 다시 김으로


삼천리의 70년사는 대한민국 에너지 변천사와 궤를 같이한다. 1962년 삼척탄좌 설립으로 석탄 사업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삼천리는 1980년대 초 결단을 내린다. 1982년 경인도시가스를 인수하며 ‘검은 연료’에서 ‘투명한 연료’로의 사업 전환을 시도한 것이다.

이는 석탄 산업의 사양화를 예견한 신의 한 수였다. 1987년 국내 최초 LNG 공급과 1988년 서울 올림픽 이후 불어닥친 난방 혁명은 삼천리를 도시가스 업계의 독보적인 1위로 만들었다. 이 결정은 삼천리그룹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변곡점으로 평가된다.

2000년대 들어 삼천리는 종합 에너지 기업으로의 확장을 가속했다. 2008년 삼천리자산운용을 설립해 금융업에 발을 들였고, 2014년 안산복합화력발전소를 준공하며 민자발전 사업까지 영토를 넓혔다.

하지만 2010년대 후반부터 시작된 두 번째 변곡점은 이전과는 결이 다르다. 에너지라는 울타리를 넘어 BMW 딜러십(삼천리모터스)과 외식업(SL&C) 등 ‘생활문화’로의 급격한 다각화를 시도한 것이다. 그리고 2025년 말 성경식품 인수로 사업 다각화의 정점을 찍었다.

연탄과 도시가스를 주력으로 해온 삼천리가 이번에는 식품 사업에 도전장을 냈다. 에너지 사업 성장성이 둔화하는 상황에서 지속가능한 성장 사업 재편을 염두에 둔 포트폴리오 조정이라는 해석이 나온다.

삼천리 매출 비중. 그래픽=송영 기자
삼천리 매출 비중. 그래픽=송영 기자


삼천리그룹 사업 영역. 그래픽=송영 기자
삼천리그룹 사업 영역. 그래픽=송영 기자


1200억 베팅…재수 끝에 품은 성경김


사실 삼천리의 성경식품 인수는 단번에 이뤄지지 않았다. 2024년 말에도 삼천리는 성경식품 인수를 검토하며 실사까지 마쳤으나 돌연 계획을 철회했다.

당시 시장에서는 고금리 상황에서의 자금조달 부담과 김 원초 가격 급등에 따른 수익성 악화 우려를 원인으로 꼽았다. 에너지 전문 기업이 식품 제조라는 이질적인 영역을 완벽히 소화할 수 있을지에 대한 신중론도 외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1년 만에 삼천리는 재도전해 성경식품을 품었다. 이는 본업인 도시가스 사업의 성장 정체가 예상보다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는 위기감의 반영이기도 하다.

삼천리그룹의 재무 지표는 겉보기에 매우 견고하다. 연간 매출액은 5조원을 상회하며 도시가스라는 지역 독점적 사업 구조 덕분에 매년 수천억원의 영업 현금흐름이 발생한다. 하지만 70년 명가에도 ‘성장의 벽’은 찾아왔다.

도시가스 사업은 지역 독점권이 보장되지만 반대로 말하면 정해진 권역 외에는 확장이 불가능한 ‘지리적 한계’가 뚜렷하다. 이미 수도권 보급률은 90%를 넘어 포화 상태에 이르렀고 탄소중립과 에너지 전환 트렌드로 인해 화석연료 기반의 도시가스 수요는 장기적으로 줄어들 수밖에 없는 구조다.

연탄에서 가스로 갈아탔듯, 이제는 가스 이후의 미래 먹거리를 찾아야 하는 두 번째 변곡점에 서 있는 셈이다. 삼천리가 성경식품을 1200억원에 전격 인수한 이유다.

'지도표 성경김'. 사진=성경식품
'지도표 성경김'. 사진=성경식품


성경식품을 앞세워 ‘글로벌 확장성’도 꾀할 수 있다. 김은 최근 K푸드 열풍을 타고 전 세계 식탁을 점령하고 있다. 성경식품은 국내 3위권의 입지를 다진 것은 물론 전체 매출의 약 40%를 미국 등 해외에서 벌어들이는 알짜 수출기업이다.

삼천리는 이미 SL&C를 통해 중식 ‘차이797’, 홍콩 딤섬 ‘호우섬’ 등 다수의 외식 브랜드를 성공적으로 안착시킨 경험이 있다. 여기에 성경김의 제조 역량과 글로벌 유통망이 결합한다면 삼천리는 단순 에너지 공급자에서 종합 라이프스타일 기업으로 탈바꿈할 수 있다.

1981년 대전에서 출발한 성경식품은 ‘지도표 성경김’으로 국내 김 시장에서 확고한 브랜드를 쌓아왔다. 김은 2024년 수출 1조4000억원으로 수출 10대 품목에 오르며 ‘검은 반도체’로 불린다.

최근 5년간 연평균 성장률 약 14%, 2025년 수출 1조6000억원·매출 1300억원을 올린 것으로 추산된다. 삼천리그룹은 K푸드 확산에 따른 글로벌 김 시장 성장성을 보고 인수를 결정했다고 밝혔다.

삼천리그룹 지배구조. 그래픽=송영 기자
삼천리그룹 지배구조. 그래픽=송영 기자


‘지분 열세’ 셋째 딸 이은선의 K푸드 승부수


성경식품 인수를 주도한 인물은 이만득 명예회장의 셋째 딸인 이은선 부사장이다. 1982년생인 이 부사장은 그룹 내 미래사업 총괄을 맡으며 외식 사업의 양적·질적 성장을 주도해 왔다. 재계에서는 이번 딜을 이 부사장의 ‘경영권 승계 시험대’이자 대관식으로 보고 있다.

현재 삼천리그룹의 장손인 이은백 사장(이장균 창업주의 장남인 고 이천득 부사장의 장남)이 전략 총괄로서 지분율 9.18%를 보유한 최대주주 자리를 지키고 있는 상황에서 지분율이 1% 미만(0.67%)인 이 부사장이 존재감을 증명할 방법은 신사업의 성공뿐이다.

이 부사장은 그동안 차이797의 매장 확대와 호우섬의 흥행을 이끌며 경영 감각을 보여줬다는 평가다. 하지만 외식업은 경기에 민감하고 내수 비중이 높다는 한계가 뚜렷하다.

성경김 인수는 이러한 한계를 단숨에 돌파할 수 있다. 직접 제조와 글로벌 수출이 가능한 식품 사업을 손에 쥠으로써 이 부사장은 그룹 내 ‘생활문화 부문’이라는 독자적인 영토를 확실히 구축하게 된다.

이는 향후 가문 내 사업 부문 조정이나 계열 분리 논의 시에도 영향력을 발휘할 전망이다. 본업인 에너지 부문이 아닌 생활문화 부문에서 성경김을 통해 가시적인 글로벌 성과를 낸다면 향후 그룹 내에서의 입지와 사업 부문별 후계 구도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할 수 있다. 성경식품 인수 성패에 따라 삼천리의 미래 후계 구도 역시 요동칠 것으로 보인다.

성경식품 인수로 수직계열화를 통한 시너지도 기대된다. 삼천리가 보유한 전국 단위의 영업망과 운영 중인 50여 개의 외식 매장은 성경김의 강력한 B2B(기업 간 거래) 및 B2C 유통 채널이 될 수 있다.

특히 삼천리의 외식 브랜드들이 미국 LA, 일본 도쿄 등 글로벌 주요 거점으로 진출할 때 성경김은 ‘식자재 공급’과 ‘PB 상품화’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을 수 있는 핵심 병기다. 에너지 기업 특유의 꼼꼼한 관리 시스템이 식품 제조 공정의 효율화를 가져올 것이라는 기대도 적지 않다. 삼천리자산운용 등 금융 계열사를 통한 원재료 소싱이나 자금 운용의 묘도 발휘될 수 있다.

그러나 장밋빛 전망만 있는 것은 아니다. 가장 큰 리스크는 기후변화와 수출 폭증으로 인한 김 원초 가격의 급등이다. 원재료 가격이 뛰면 제조 원가 부담이 커져 수익성이 악화할 수밖에 없다.

또한 에너지 산업과 식품 산업은 경영 DNA 자체가 판이하다. 보수적이고 안정 중심적인 에너지 기업의 문화가 유행에 민감하고 속도감이 생명인 식품 유통 시장에서 오히려 걸림돌이 될 수 있다는 지적이다.

사모펀드(어펄마캐피탈) 체제 아래서 효율성을 극대화했던 성경식품이 삼천리라는 대형 그룹 체제로 편입된 후에도 특유의 조직문화를 유지할 수 있을지도 의문이다.

삼천리그룹-성경식품 주식매매계약 체결식. 사진=삼천리그룹
삼천리그룹-성경식품 주식매매계약 체결식. 사진=삼천리그룹


4000억 실탄 장전, 다음 M&A 타깃 노린다


도시가스 사업은 정부가 허가한 특정 지역에 배관망만 깔아두면 가스 요금이 현금으로 꽂히는 전형적인 캐시카우다. 2025년 기준 삼천리는 약 4000억원 이상의 순현금(현금성 자산-차입금)을 보유한 대표적인 ‘현금 부자’다.

2025년 9월 말 연결 기준 유동자산만 약 1조4726억원에 달하며 유동비율 역시 144.3%로 재무 상태가 탄탄하다.

최근 3년간 연 매출 5조원대와 1000억~1700억원 규모의 영업이익을 기록하며 2025년 실적 회복세를 보인 삼천리는 이번 성경식품 인수로 비에너지 포트폴리오 강화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1200억원의 인수 대금은 삼천리의 재무 체력에 비춰볼 때 충분히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다.

삼천리가 성경식품 외에도 막대한 실탄을 바탕으로 추가적인 M&A에 나설 것이란 관측도 나온다. 업계에서는 삼천리가 식품 제조와 외식 사업 간 연계를 강화하기 위해 소스 전문 기업이나 신선 물류 플랫폼 기업 등을 추가로 검토할 가능성이 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소스 전문 기업이나 물류 플랫폼 기업을 인수할 경우 성경김에 다양한 시즈닝(양념) 기술을 더해 전 세계인이 즐기는 ‘김 스낵’으로 업그레이드하고 도시가스 배관을 관리하듯 촘촘한 물류망을 확보해 자사 음식을 직접 배송하는 시스템을 갖출 수 있다.

다만 최근 김 원재료 가격의 높은 변동성은 부담이다. 삼천리가 안정적인 배당주를 넘어 주가가 치솟는 ‘성장주’로 체질을 바꾸려면 단순히 기업 몇 개를 쇼핑하듯 사들이는 것만으론 부족하다.

결국 관건은 인수 이후 계열사 간 시너지를 실제 수익으로 연결할 수 있느냐다. 오너 3세 이은선 부사장이 이종 산업인 에너지와 식품 사업 간 시너지를 증명해 내는 것이 향후 경영 능력 시험대가 될 전망이다.

삼천리 실적. 그래픽=송영 기자
삼천리 실적. 그래픽=송영 기자


영풍·고려아연과 다른 길…3세 승계 앞두고 계열 분리설 ‘솔솔’


삼천리그룹은 이 씨 가문과 유 씨 가문이 70년간 완벽한 균형을 유지하며 경영해왔으나 3세 승계 시기를 맞아 계열분리 가능성이 꾸준히 제기되고 있다. 최근 황해도 출신 창업주들이 함께 세운 고려아연과 영풍(영풍그룹)이 끝내 동업 관계를 청산하며 갈등을 빚은 사례와 대조적으로 삼천리의 행보는 이례적이다.

성경식품 인수를 계기로 재계 안팎에서는 두 가문의 ‘결별 시나리오’에 주목하고 있다. 이미 삼천리(이 씨 가문)와 ST인터내셔널(유 씨 가문)은 상호출자 관계를 사실상 정리한 상태다.

현재의 지배구조는 각 가문이 독자 노선을 선택할 수 있는 여지를 남긴 구조로 평가된다. 특히 이은백 사장과 유용욱 부사장 등 3세 리더들이 전면에 나서면서 71년 전 동업 초기보다는 각자의 전문성과 사업적 이해관계를 우선시하는 분위기가 감지된다.

유 씨 가문이 이끄는 ST인터내셔널은 이미 자원 개발을 넘어 민자 발전과 부동산 투자 등에서 독자적인 캐시카우를 완성했다.

일각에서는 이번 성경식품 인수가 이 씨 가문의 독립적인 ‘생활문화 그룹’ 출범을 위한 포석이 아니냐는 분석도 나온다. 삼천리는 이제 연탄과 가스를 팔던 과거를 뒤로하고 각자의 길에서 최정상에 서는 새로운 실험에 돌입했다.

다만 산업의 흐름이 바뀌는 국면에서 삼천리가 어떤 방식으로 다음 장을 써 내려갈지는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 김에서 시작된 이번 선택이 삼천리의 체질을 바꾸는 계기가 될지, 또 하나의 실험으로 남을지는 조금 더 지켜볼 일이다.

한경비즈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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