뤼터 사무총장 함구에 유럽 불만…"갈등에 역할 다해야" 지적 봇물
뤼터 나토 사무총장(왼쪽)과 트럼프 미국 대통령 [AP 연합뉴스 자료사진]
(브뤼셀=연합뉴스) 현윤경 특파원 =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연초부터 동맹 덴마크의 영토인 그린란드에 대한 군사행동 가능성까지 거론하며 75년 넘는 역사를 이어온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를 뒤흔들고 있다.
하지만 정작 나토는 미국을 향해 이렇다 할 대응을 하지 않은 채 말을 아끼고 있어 유럽이 분노하고 있다고 영국 일간 파이낸셜타임스(FT)가 11일 진단했다.
그린란드가 국가 안보에 꼭 필요하다며,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린란드를 차지하겠다는 입장을 거듭 드러내는 트럼프 대통령의 행보에 연초부터 대서양 양안의 긴장이 높아지고 있지만 나토는 동맹을 향한 트럼프의 야욕에 정면으로 대응하거나, 덴마크와 그린란드의 영토 주권을 강조하는 공식적인 성명조차 현재까지 내놓지 않고 있다.
나토의 유럽 내 주요 회원국이 앞다퉈 덴마크와 그린란드에 연대를 표명하고, 미국과의 긴장을 완화하기 위해 그린란드를 포함한 북극권 안보 강화 방안을 위해 머리를 맞대는 등 총력 대응에 나선 것과 확연히 다르다.
네덜란드 총리를 지낸 마르크 뤼터 나토 사무총장은 평소 트럼프 대통령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며, 우크라이나 지원 등 주요 현안에서 엇박자를 내는 트럼프 대통령을 설득하는 역할을 맡아 왔다. 그런 뤼터 총장이 다른 일도 아닌 나토 존립 자체를 근본적으로 위협할 수 있는 트럼프 대통령의 그린란드 야욕에 침묵을 지키고 있는 것은 상당히 이례적인 일로 받아들여진다.
우크라이나 종전 협상 국면에서 트럼프 대통령의 눈치를 살피지 않을 수 없는 유럽 27개국의 연합체인 유럽연합(EU) 지휘부도 당초 침묵을 깨고 그린란드 편에서 목소리를 낸 것과 비교하면 뤼터 사무총장의 이런 대응은 의외라는 평가가 나온다고 FT는 짚었다.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EU 집행위원장은 최근 "법은 무력보다 강하다"는 말로 미국이 국제법에 의거해 덴마크와 그린란드의 영토 주권을 존중할 것을 촉구했고, 안토니우 코스타 EU 정상회의 상임의장은 "덴마크와 그린란드 사안이 당사자들 없이 결정될 수는 없다"는 말로 트럼프 대통령의 영토 야욕을 우회적으로 힐난한 바 있다.
FT는 유럽과 북미 간 안보 논의에 있어 사안 족족 존재감을 드러내 온 뤼터 사무총장이 이번 그린란드 사태와 관련해 공식 입장을 표명한 것은 CNN의 질문에 60초가량 짤막히 답변한 것에 불과하다고 전했다.
그는 당시 답변에서 그린란드 주변에서 러시아와 중국의 활동이 증가하고 있다는 트럼프 대통령의 평가에 동의하며, 안보를 증강할 필요가 있다는 취지로 이야기하는 데 그쳤다.
한 EU 당국자는 이와 관련 "트럼프와 소통에 있어 유럽이 의지할 수 있는 인물로 여겨지던 뤼터가 이렇게까지 조용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상당수 유럽 당국자들은 미국이 나토에서 차지하는 위상을 고려하면 나토의 대응이 제한될 수밖에 없다는 점은 인정하면서도 나토가 계속 침묵을 지킬 경우 동맹을 대하는 트럼프 대통령의 무소불위식 행동과 유럽의 대미 안보 의존을 이용하는 행태를 부추길 소지가 있다고 우려한다.
나토의 한 외교관은 "이런 문제를 나토 내부에서 논의하기는 물론 쉽지 않다"면서도 "논의조차 않는다면, 이는 현재 벌어지고 있는 일들에 우리가 모두 동의하고 있다는 인상을 주게 된다"고 지적했다.
작년까지만 해도 트럼프 대통령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 그린란드 관련 문제에 최대한 입장 표명을 자제하던 덴마크의 메테 프레데릭센 총리가 며칠 전 "만약 미국이 또 다른 나토 국가를 군사적으로 공격하면, 이는 나토의 '종말'"이라고 강경한 목소리를 낸 것에도 나토의 침묵에 대한 짜증이 녹아 있다고 유럽 당국자들은 FT에 전했다.
이번 사태를 풀기 위해 나토에 적극적인 대응을 요구하는 목소리도 이어지고 있다.
덴마크 정치권은 미국과의 분쟁에서 나토가 좀 더 강력한 역할을 할 것을 촉구했다. 중도우파 정당 자유동맹의 카르스텐 바흐 의원은 "나토의 한 회원국인 미국은 북극권에서 위협을 인식하고 있는데, 그 위협은 나머지 회원국에는 그리 명확하지 않을 수 있다"며 "이런 까닭에 나토는 이번 갈등에서 중요한 역할을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조르자 멜로니 이탈리아 총리도 지난 9일 신년 기자회견에서 "모든 당사국이 나토 동맹국인 상황이기 때문에 이 사안에 대한 압박을 줄이거나 완화하기 위해 나토가 진지한 논의를 시작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앨리슨 하트 나토 대변인은 나토의 입장을 묻는 FT의 질문에 "외교적 논의의 세부 내용을 밝히지는 않겠지만, (뤼터)사무총장은 늘 그렇듯이 대서양 양안의 지도자 및 고위 당국자와 긴밀히 협력하고 있다"고 답했다.
[email protect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