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존 위해 결혼·출산·육아 지워버린 30대 여성
'저임금' 돌봄 서비스직으로 내몰린 4050 여성
개선된 여성 고용 통계 뜯어보니... 성차별 여전
'저임금' 돌봄 서비스직으로 내몰린 4050 여성
개선된 여성 고용 통계 뜯어보니... 성차별 여전
편집자주
한국일보 기자들이 직접 여러 사회 문제와 주변의 이야기를 젠더적 관점에서 풀어냅니다. '젠더, 공간, 권력' 등을 쓴 안숙영 계명대 여성학과 교수의 글도 기고로 함께 합니다.
게티이미지뱅크
“지수씨, 다시 회사 다닐 생각이면 결혼 전에 직장 구하는 게 좋을 거야.”
상사의 괴롭힘을 견디다 못해 8년간 다닌 회사를 돌연 그만두게 된 스물아홉 살 여성 최지수씨. 자신을 아끼던 회사 선배를 찾아가 퇴사 소식을 알리며 청첩장을 건네자, 그는 대뜸 이런 서늘한 충고를 건넵니다. 지수씨는 겉으로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내심 생각하죠. ‘난 아직 서른도 안 됐는데, 설마 재취업하는 게 그리 어려울까.’
그러나 현실은 지수씨의 상상과는 한참 달랐습니다. 면접을 치를 때마다 “결혼은 했냐”는 질문이 따라왔고, 사실대로 말하면 분위기는 얼어붙었죠. “그럼, 아이는?”이란 이어진 질문에 “아직은 없다”고 답하면서도 어쩐지 위축됐습니다. 빈말로라도 “아이를 낳을 계획이 없다”고 답하지 않으면 합격할 게 뻔해 보였으니까요. 이후 그는 비자발적 백수이자 전업주부로, 파트타임 학원 강사로, 최저임금도 못 받는 프리랜서로, 카페 아르바이트생으로 전전하며 6년을 보냅니다. 그렇게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구직 실패자’의 신세로 서른다섯 살이 됐죠.
이런 여성들이 익숙하시다고요? '지수씨'는 우리 주변에서 한 번쯤 마주쳤을 법한 현실 속 30대 경력단절 여성의 초상을 엮어 만든 가상 인물입니다. 노동 시장에서 여성이 겪는 성차별 구조를 폭로한 소설 ‘연쇄 구직자’의 주인공인데요. 이 작품을 쓴 정수정 작가는 경력 중단으로 일상의 붕괴를 겪는 한 여성의 삶을 통해
결혼과 출산이 곧 ‘리스크’로 취급되는 관행, 한번 경력이 끊긴 여성을 영원히 값싼 노동력으로 취급하는 현실
을 집요하게 보여줍니다.
2019년 3월 8일 '세계 여성의 날'을 맞아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열린 '제3회 조기퇴근 시위'에서 참가자들이 '3시 STOP' 손팻말을 들고 있다. 이들은 한국의 성별 임금 격차를 비판하고 "오후 3시부터의 무급노동을 거부한다"며 시위를 벌였다. 연합뉴스
현실 속 '지수들'은 어떻게 살고 있을까? 통계가 보여주지 않는 30대 여성들의 선택
그렇다면 진짜 세상 속 ‘지수들’, 현실의 삼십 대 여성들은 어떤 삶을 살고 있을까요? 지난달 28일 성평등가족부와 고용노동부가 발간한 ‘여성경제활동백서’를 들여다봤습니다. 이 백서에서 가장 눈에 띈 점은 여성의 연령대별 고용률 그래프에서 고질적으로 나타났던 ‘M 커브’ 현상이 완화됐다는 건데요. 통상적으로 여성의 고용률은 10~20대를 거치며 가파르게 오르다가 30대가 되면 임신·출산·육아로 인해 뚝 떨어지고 40~50대에 이르러 재취업에 도전하며 다시 오르는 양상을 보여 왔습니다. 그래프의 모양이 꼭 알파벳 ‘M’자와 닮아 ‘M 커브’란 이름이 붙었죠.
지난해 백서에 따르면 30대 여성 고용률은 지속적으로 늘어나 10년 전인 2014년과 비교했을 때 M 커브 곡선이 비교적 완만해졌습니다.
소설 속 지수씨처럼 30대에 경력 단절을 겪는 여성이 상대적으로 줄었다는 의미인데요.
그러나 이 통계 뒤엔 ‘숨은 진실’이 있습니다. 현실 속 30대 여성들은 소설 속 지수와는 완전히 다른 선택을 했다는 겁니다.
이들은 △결혼하지 않거나 △해도 아주 늦게 하거나 △자발적으로 ‘딩크족(맞벌이를 하면서 의도적으로 자녀를 갖지 않는 부부)’이 되거나 △출산 자체를 40대 이후로 미뤘습니다. 결혼과 출산을 30대 인생의 경로에서 아예 제외해 버린 것이죠.
2024년 연령별 여성 고용률 그래프. 여성경제활동백서
전문가는 이와 같은 여성들의 선택이
"바뀌지 않는 성차별 구조 속에서 어쩔 수 없이 택한 생존의 방도"
라고 진단합니다. 김난주 한국여성정책연구원 연구위원은 “30대는 직업인에게 있어 업무 역량이 가장 크게 성장하는 결정적 시기이자 승진이 잦은 구간인데, 자녀를 낳은 여성은 이 시기를 오롯이 육아에 빼앗기고 있다”며 “남성들의 육아 휴직 사용률이 조금씩 오르고 있다고는 하나 대부분 공공기관·대기업 종사자 등 특정 계층에 집중돼 있는 데다, 가정 내 육아와 돌봄은 여전히 ‘여성의 일’로 인식되고 있기 때문”이라고 지적했습니다.게다가 오늘날엔 맞벌이가 ‘선택이 아닌 필수’로 여겨지다 보니, 요즘 세대 워킹맘 여성들이 느끼는 일·가정 양립 문제의 부담은 이전 세대 여성들에 비해 결코 덜하지 않습니다. 김 위원은 “현실적인 상황이 이렇다 보니 후배 세대 여성은 선배 세대 여성의 이중 부담을 지켜보며 ‘저렇게 살지 말고 일단 나부터 살아남아야겠다’는 생각으로 결혼과 출산을 포기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습니다. 정리하면, 여성의 교육 수준·경제활동 의지는 크게 변화했지만, 성역할 규범과 노동 문화가 이를 따라가지 못해 발생한 ‘지체 현상’의 결과라는 겁니다.
이어 김 위원은 “M 커브 완화를 성차별 구조 개선의 결과로 볼 수 있으려면 출산율 역시 유의미하게 반등해야 하는데, 여전히 대한민국 합계출산율은 세계 최저 수준(2024년 0.75명)에 머물고 있다”며 “이 때문에 현재로선 M 커브 완화를 여성의 경력단절 문제가 ‘해결되고 있다’는 시그널로 볼 근거가 희박하다”고 일축했습니다.
4050 여성, 고용률은 올랐지만 일자리 질은 떨어졌다
그렇다면 M 커브의 재상승 구간에 진입한 4050 여성들의 사정은 어떨까요? 여기에도 숫자가 보여주지 않는 ‘불편한 진실’이 있습니다. 고용률은 늘었을지 몰라도, 일자리의 질은 터무니없이 열악하다는 건데요. 김 위원은
“고학력 중년 여성들은 자신이 20~30대에 다녔던 직장에 비해 고용 상태가 불안정하고, 임금이 낮은 비정규직 일자리에 종사하고 있다”
고 꼬집었습니다. 특히 50대 이상의 여성들은 자녀뿐 아니라 아픈 부모를 함께 돌봐야 하는 생애 주기에 진입하면서 상대적으로 시간을 많이 낼 수 있는 시간제 일자리를 전전하게 됩니다. 구직 상황에선 성차별뿐 아니라 ‘연령 차별’까지 더해진 이중고를 겪게 되고요.
2022년 9월 2일 대구 북구 엑스코에서 열린 2022 여성 UP 엑스포에서 여성 구직자들이 채용알림판을 보고 있다. 연합뉴스
게다가 50대 이상 여성들의 일자리는 대표적인 저임금 일자리인 ‘돌봄·요양 부문’에 치우쳐 있는데요. 이 때문에 보건업 및 복지서비스업계의 ‘임금 페널티’ 문제 역시 하루빨리 개선돼야 한다는 지적도 제기됩니다. 김 위원은 “여성들이 주로 종사하는 돌봄 서비스직의 처우는 전 세계적으로 저평가돼 있지만, 인공지능(AI)이 대부분의 인간 노동을 대체하고 있는 현 상황에선 일종의 ‘변곡점’에 와 있다고 본다”며
“돌봄은 AI가 절대로 대체할 수 없는 대표적인 일자리이자 고령화 사회를 가고 있는 대한민국의 필수 일자리이기 때문에 현시점을 계기로 처우가 대폭 개선되어야 한다”
고 밝혔습니다. 호주와 같은 선진국은 이미 발빠르게 움직이고 있어요. 2022년부터 성별에 따라 저평가된 산업에 대해 정부가 직접 나서 '임금 보전 조치'를 취하는 제도를 도입했는데요. 이에 따라 호주 정부는 지난해 4월 주로 여성들이 종사하는 보육교사·의료전문가 등 돌봄 분야 직종의 근로자를 상대로 최대 35%의 임금 인상을 권고한 바 있습니다.
한편, 우리나라는 OECD 29개국을 대상으로 발표되는 ‘유리천장지수’에서 2013년 이후 매년 최하위를 기록하다가, 지난해에야 겨우 한 단계 오른 28위를 기록했습니다.
단순한 ‘숫자 개선’ 이면에 숨은 현실을 외면한 채 성과를 자축할 단계는 아니라는 뜻입니다.
고용 구조 곳곳에 남아 있는 성차별이 실제로 해소되고 있는지, 더 집요하게 들여다보고 지켜봐야 할 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