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경제] 그날의 뉴스는 지나갔지만, 그 의미는 오늘에 남아 있습니다. ‘오늘의 그날’은 과거의 기록을 통해 지금을 읽습니다.<편집자주>
“흔적도 없이 죽고 싶었다.”
2005년 1월 3일 오전 7시 10분. 서울 지하철 7호선 온수행 열차가 가리봉역(현 가산디지털단지역)을 출발해 철산역으로 향하던 중 7번째 객차에서 불이 났다. 경찰은 50대 남성이 시너와 인화물을 이용해 고의로 불을 붙인 방화 사건으로 결론지었다.
출근 시간대였지만 비교적 이른 시각이었고 종착역을 얼마 남기지 않은 상황이어서 대형 인명 피해는 발생하지 않았다. 다만 화재에 직접 노출된 60대 여성 1명이 손에 1도 화상을 입었다.
당시 서울도시철도공사 직원이 소화기를 이용해 초기 진압에 나섰고 승객들은 철산역에서 하차해 대피했다. 그러나 완전히 제거되지 않은 불씨가 이후 재발화하며 상황은 급격히 악화됐다.
경찰 조사 결과, 종합사령실은 기관사에게 화재 사실을 전달했지만 연락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고 역 측 역시 출발을 완전히 통제하지 못했다.
전문가들은 “화재 초기 철산역에서 열차를 멈추고 완전 진압했다면 대형 화재로 번지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고 지적했다.
열차는 결국 광명사거리역 인근 대피 선로에서 멈춰 섰다. 이 불로 전동차 8량 중 3량이 전소됐다. 이 가운데 2량은 완전히 타 폐차됐고 상대적으로 상태가 양호했던 1량은 화재 사고의 경각심을 높이기 위해 영구 보존됐다.
재산 피해는 약 20억 원, 7호선 신풍~온수 구간 운행은 3시간 30분가량 중단됐다.
형사들은 새벽 시간대 인력시장과 노숙인 밀집 지역을 찾아다니며 전단을 배포했고 사건 당일 노숙자를 용의자로 긴급 체포했다가 물증 부족으로 석방하는 혼선도 겪었다.
사건 발생 11일이 지났지만 화재 객차에 타고 있던 것으로 추정된 10여 명의 승객 중 경찰이 확보한 목격자는 5명에 불과했다.
경찰은 결국 사건 당일 해당 구간을 지나간 7개 역의 신용카드 사용 내역을 확보하는 강제 수사에 나섰다. 한 형사는 “사건을 직접 보지 않았다고 생각해 신고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며 “요즘은 사고 현장을 보고도 제보를 꺼리는 분위기가 있다”고 토로했다.
강씨는 노숙자가 아니라 부인과 아들을 둔 가장이었다. 경찰에 따르면 강씨는 1997년 주식 투자 실패로 약 2억 원의 손실을 본 뒤 일정한 직업 없이 생활고에 시달려왔다.
강씨는 사건 당일 시너를 우유팩과 플라스틱 통에 나눠 담아 배낭에 넣고 전동차에 탔다. 객실에서 주운 광고 전단지에 시너를 뿌린 뒤 불을 붙였다.
그는 경찰 조사에서 “생활고에 시달리다 자살을 결심했고 흔적도 없이 죽고 싶었다”며 “사람이 적을 것 같아 7호선을 택했다”고 진술했다.
검거의 결정적 단서는 ‘보라매공원 인근에서 손에 화상을 입은 남자가 약을 구하고 다닌다’는 익명의 제보였다. 경찰은 이 남성이 정신과 치료 전력이 있다는 사실도 확인했다.
사고 이후 여론이 악화되자 철도 당국은 계획을 앞당겨 2006년까지 모든 전동차 내장재의 불연재 교체를 완료했다. 화재에 취약했던 일부 역사 내 우레탄 인공 암반 외벽도 철거됐다. 당시 이명박 서울시장은 “지하철 방재 훈련이 형식적이었는지 반성해야 한다”며 현상금 상향을 지시했고 서울시는 범인 검거를 위해 현상금 1000만 원을 내걸고 수사 지원에 나섰다.
그러나 이 사건 이후에도 지하철과 열차를 겨냥한 방화와 방화 시도는 반복됐다. 2014년 서울 지하철 2호선 상왕십리역 인근 전동차 방화 사건과 2025년 서울 지하철 5호선 방화 사건으로 승객 수백 명이 긴급 대피하는 소동이 벌어지기도 했다.
2005년 1월 3일 오전 서울 지하철 7호선 온수역에서 소방관들이 전동차의 잔불을 진화하고 있다. 연합뉴스
“흔적도 없이 죽고 싶었다.”
2005년 1월 3일 오전 7시 10분. 서울 지하철 7호선 온수행 열차가 가리봉역(현 가산디지털단지역)을 출발해 철산역으로 향하던 중 7번째 객차에서 불이 났다. 경찰은 50대 남성이 시너와 인화물을 이용해 고의로 불을 붙인 방화 사건으로 결론지었다.
출근 시간대였지만 비교적 이른 시각이었고 종착역을 얼마 남기지 않은 상황이어서 대형 인명 피해는 발생하지 않았다. 다만 화재에 직접 노출된 60대 여성 1명이 손에 1도 화상을 입었다.
당시 서울도시철도공사 직원이 소화기를 이용해 초기 진압에 나섰고 승객들은 철산역에서 하차해 대피했다. 그러나 완전히 제거되지 않은 불씨가 이후 재발화하며 상황은 급격히 악화됐다.
SBS 보도화면 갈무리
◇“멈췄다면 막았을 화재”…불 난 채 3분 더 달린 열차
=사고의 핵심 쟁점은 화재 발생 이후 열차가 철산역을 지나 광명사거리역 방향으로 약 3분간 더 운행됐다는 점이다.경찰 조사 결과, 종합사령실은 기관사에게 화재 사실을 전달했지만 연락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고 역 측 역시 출발을 완전히 통제하지 못했다.
전문가들은 “화재 초기 철산역에서 열차를 멈추고 완전 진압했다면 대형 화재로 번지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고 지적했다.
열차는 결국 광명사거리역 인근 대피 선로에서 멈춰 섰다. 이 불로 전동차 8량 중 3량이 전소됐다. 이 가운데 2량은 완전히 타 폐차됐고 상대적으로 상태가 양호했던 1량은 화재 사고의 경각심을 높이기 위해 영구 보존됐다.
재산 피해는 약 20억 원, 7호선 신풍~온수 구간 운행은 3시간 30분가량 중단됐다.
◇“불 난 열차 승객을 찾고 있다”…발로 뛴 수사
=사건 직후 경찰 수사는 뜻밖의 난관에 부딪혔다. 광명경찰서 형사들은 “불이 난 지하철에 타고 있던 승객들을 찾기 위해 발이 부르트도록 뛰고 있다”며 사건 발생 직후부터 철산·광명·가리봉역 일대를 돌며 대대적인 탐문수사를 벌였다.형사들은 새벽 시간대 인력시장과 노숙인 밀집 지역을 찾아다니며 전단을 배포했고 사건 당일 노숙자를 용의자로 긴급 체포했다가 물증 부족으로 석방하는 혼선도 겪었다.
사건 발생 11일이 지났지만 화재 객차에 타고 있던 것으로 추정된 10여 명의 승객 중 경찰이 확보한 목격자는 5명에 불과했다.
경찰은 결국 사건 당일 해당 구간을 지나간 7개 역의 신용카드 사용 내역을 확보하는 강제 수사에 나섰다. 한 형사는 “사건을 직접 보지 않았다고 생각해 신고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며 “요즘은 사고 현장을 보고도 제보를 꺼리는 분위기가 있다”고 토로했다.
SBS 보도화면 갈무리
◇방화범 검거까지 45일…‘노숙자’ 아닌 생활고에 몰린 가장
=사건 발생 45일 만인 2월 17일, 경찰은 방화범 강모(50)씨를 검거했다.강씨는 노숙자가 아니라 부인과 아들을 둔 가장이었다. 경찰에 따르면 강씨는 1997년 주식 투자 실패로 약 2억 원의 손실을 본 뒤 일정한 직업 없이 생활고에 시달려왔다.
강씨는 사건 당일 시너를 우유팩과 플라스틱 통에 나눠 담아 배낭에 넣고 전동차에 탔다. 객실에서 주운 광고 전단지에 시너를 뿌린 뒤 불을 붙였다.
그는 경찰 조사에서 “생활고에 시달리다 자살을 결심했고 흔적도 없이 죽고 싶었다”며 “사람이 적을 것 같아 7호선을 택했다”고 진술했다.
검거의 결정적 단서는 ‘보라매공원 인근에서 손에 화상을 입은 남자가 약을 구하고 다닌다’는 익명의 제보였다. 경찰은 이 남성이 정신과 치료 전력이 있다는 사실도 확인했다.
◇‘불에 약한 지하철’ 이후에도 반복된 방화
=이 사고는 구형 전동차의 화재 취약성을 다시 한번 드러냈다. 서울시는 대구 지하철 참사 이후 전동차 내장재를 불연성 소재로 바꾸겠다고 밝혔지만 사고 당시 불연재로 개조된 전동차는 전체의 20% 수준에 그쳤다.사고 이후 여론이 악화되자 철도 당국은 계획을 앞당겨 2006년까지 모든 전동차 내장재의 불연재 교체를 완료했다. 화재에 취약했던 일부 역사 내 우레탄 인공 암반 외벽도 철거됐다. 당시 이명박 서울시장은 “지하철 방재 훈련이 형식적이었는지 반성해야 한다”며 현상금 상향을 지시했고 서울시는 범인 검거를 위해 현상금 1000만 원을 내걸고 수사 지원에 나섰다.
그러나 이 사건 이후에도 지하철과 열차를 겨냥한 방화와 방화 시도는 반복됐다. 2014년 서울 지하철 2호선 상왕십리역 인근 전동차 방화 사건과 2025년 서울 지하철 5호선 방화 사건으로 승객 수백 명이 긴급 대피하는 소동이 벌어지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