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랭크모어

챗GPT 키운 올트먼의 ‘인간 증명’
AI시대 신원 혁명일까, 스캠일까
코인시장 침체에 월드도 곤두박질

편집자주

내로라하는 기술 대기업이 태동한 '혁신의 상징' 실리콘밸리. 다양성을 핵심 가치로 내세우지만 거주민 중 흑인 비율은 2%밖에 되지 않는다는 사실, 알고 계셨나요? 화려한 이름에 가려진 실리콘밸리의 다양한 얼굴을 '찐밸리 이야기'에서 만나 보세요. 11일 미국 캘리포니아주 샌프란시스코에 위치한 툴스 포 휴머니티(TFH) 본사에 오브(Orb)가 설치돼 있다. 실리콘밸리=박지연 특파원
11일 미국 캘리포니아주 샌프란시스코에 위치한 툴스 포 휴머니티(TFH) 본사에 오브(Orb)가 설치돼 있다. 실리콘밸리=박지연 특파원


“안과에서 시력 검사하듯 가만히 응시하면 됩니다.”

11일(현지시간) 미국 캘리포니아 샌프란시스코에 위치한 가상화폐 월드코인 개발사 ‘툴스 포 휴머니티(TFH)’ 본사. 축구공보다 조금 작은 구(球) 모양의 기기 오브(Orb) 앞에 섰다. 오브는 사람의 홍채를 인식하는 첨단 카메라다. 매끈한 흰색 구체 안에 어두운 유리 렌즈를 품은 생김새가 마치 거대한 눈동자 같아 묘한 거부감이 들었다.

홍채 스캔은 1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렌즈를 몇 초간 바라보자 휴대폰의 ‘월드앱’이 진동했다. 휴대폰 정면 카메라를 통해 방금 오브 앞에 있던 인물과 소지자가 동일인인지 확인하는 절차다. 마지막으로 생년월일을 입력하자 신분증 대조도 없이 가입이 완료됐다. 잠시 뒤 디지털 지갑(월드앱)에는 약 20달러(약 2만9,000원) 상당의 40월드코인이 입금됐다.

유일무이한 생체 정보를 넘긴 대가는 고작 치킨 한 마리 값이었다. 데이터 삭제를 요청하면 제대로 지워줄지도 의문이다. 설사 삭제했다는 통보를 받아도 개인이 이를 확인할 방법은 없다. 홍채 정보가 헐값에 팔려나간 듯한 허탈함이 밀려왔다.

챗GPT는 알지만 월드코인은 글쎄…'인간 증명'의 명분

오브(Orb)에 홍채를 스캔한 뒤 휴대폰에 설치한 월드앱에서 동일인물 여부를 식별하는 과정에서 나오는 안내 문구들. 월드앱 캡처
오브(Orb)에 홍채를 스캔한 뒤 휴대폰에 설치한 월드앱에서 동일인물 여부를 식별하는 과정에서 나오는 안내 문구들. 월드앱 캡처


샘 올트먼 오픈AI 최고경영자(CEO)가 챗GPT로 생성형 인공지능(AI)의 대중화를 이끈 사실은 유명하지만, 그가 설계에 참여한 월드 프로젝트는 여전히 대중에게 생소하다. 이 프로젝트의 핵심 목표는 AI 시대 온라인상에서 진짜 사람과 AI 봇을 구별할 수 있는 고유한 디지털 신원(월드 ID)을 전 세계 모든 사람에게 제공한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 궁극적으로 일자리 부족 시대 인간에게 지급할 보편적 기본소득(UBI)의 기반 시스템을 구축하는 목표도 있다.

이용자들은 월드 ID를 바탕으로 디지털 지갑을 만들고, 여기에 월드코인을 보관할 수 있다. 월드코인을 가지려면 기자가 체험한 것과 같이 홍채 정보를 오브에 인식시켜 월드 ID를 생성해야 한다. TFH는 전 세계 이용자들을 유치하기 위해 신원 인증을 마친 이용자의 월드앱에 일정량의 코인을 무상 지급한다. “AI가 지배하는 세상에서 고유한 개인을 식별하면서도 프라이버시를 지키는 방식은 반드시 필요하다”는 게 올트먼의 철학이다.

"왜 돈을 주지?" 생체정보를 빼앗긴 찝찝함

오픈AI 최고경영자(CEO)이기도 한 샘 올트먼(오른쪽) 툴스 포 휴머니티(TFH) 공동창업자가 11일 미국 캘리포니아 샌프란시스코 TFH 본사에서 월드의 새 기능을 설명하고 있다. 실리콘밸리=박지연 특파원
오픈AI 최고경영자(CEO)이기도 한 샘 올트먼(오른쪽) 툴스 포 휴머니티(TFH) 공동창업자가 11일 미국 캘리포니아 샌프란시스코 TFH 본사에서 월드의 새 기능을 설명하고 있다. 실리콘밸리=박지연 특파원


실제로 AI를 활용한 딥페이크(AI 기반 가짜 이미지·영상·음성) 범행 수법이 더욱 정교해지면서 AI가 인간인 척하는 ‘신원 위기’는 이미 현실화했다. 올트먼은 “AI가 인간으로 둔갑하는 신원위기 시대에 인간임을 증명하는 방법”이라고 강조한다.

딥페이크로 가족 목소리를 흉내 내 금전을 요구하거나, 화상회의에서 가짜 영상으로 회사 임원인 것처럼 직원을 속여 거액을 송금하게 만드는 사례는 점차 흔해지고 있다. 외로운 이들을 울린 로맨스스캠(연애 빙자 사기)이나 사람과 구분이 어려워진 AI 에이전트 활용 범죄를 예방할 필요성도 높아졌다. 더 나아가 전 세계 80억 인구에게 ‘기본소득’ 개념으로 코인을 지급하고, 행정 인프라가 부족한 개발도상국 국민에게 디지털 신원을 부여한다는 대의도 그럴듯해 보인다.

11일 미국 캘리포니아주 샌프란시스코에 위치한 툴스 포 휴머니티(TFH) 본사에 홍채 정보를 입력하는 오브(Orb) 여러 대가 설치돼 있다. 실리콘밸리=박지연 특파원
11일 미국 캘리포니아주 샌프란시스코에 위치한 툴스 포 휴머니티(TFH) 본사에 홍채 정보를 입력하는 오브(Orb) 여러 대가 설치돼 있다. 실리콘밸리=박지연 특파원


하지만 현실은 냉혹하다. 가입자의 80% 이상이 아프리카, 남미, 동남아 등 저소득 국가에 쏠려 있다. 당장의 코인 보상이 강력한 유인책으로 작동하는 곳들이다.

반면 주민등록 체계 등 국가 신원 시스템이 견고한 한국, 일본, 싱가포르 등 아시아 선진국에선 “왜 생체 정보를 해외 사기업에 넘겨야 하느냐”는 근본적 불신을 넘지 못하고 있다. 실제로 TFH는 한국 개인정보보호위원회로부터 약 11억 원의 과징금 처분을 받았다. 3만여 명의 홍채 정보를 수집·국외 이전하는 과정에서 법을 위반했다는 판단이다.

태국 디지털경제사회부(DES)는 지난해 8월 “홍채 정보 수집의 투명성이 부족하다"며 120만 명의 데이터 삭제 및 운영 중단을 명령했고, 인도네시아에선 전자거래법 위반 혐의로 서비스가 중단됐다. 현지 운영자가 모집 과정에서 미성년자를 불법 스캔한 활동이 포착돼 수사로도 이어졌다.

독일을 제외한 대부분의 유럽 국가도 서비스를 중단했다. 한 차례 운영 중단 후 서비스를 재개한 케냐에선 생체 정보 수집 방식에 대해 우려를 표하고 있다. 혁신이 아닌 “경제적 취약층을 대상으로 한 실험”이라는 비판이 나오는 이유다.

규제와 불신에 갇힌 월드

월드앱에서 이제 채팅을 하거나 다른 앱을 활용할 수도 있다. 툴스 포 휴머니티 제공
월드앱에서 이제 채팅을 하거나 다른 앱을 활용할 수도 있다. 툴스 포 휴머니티 제공


부정적 인식을 지우려 업체는 프로젝트 명칭에서 코인을 떼 냈다. 하지만 생체정보 수집에 따른 심리적 저항감까지 없애진 못했다. 한 TFH 직원은 이날 오브 앞에 선 기자가 홍채 스캔을 망설이자 “당신의 홍채 정보를 중앙 서버에 저장하는 것이 아니라 익명화된 코드만 생성하고 수백만 조각으로 나눠 암호화한 뒤 삭제한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비밀번호와 달리 한 번 유출되면 바꿀 수 없는 생체정보의 특성상 불안감이 큰 건 자연스럽다.

비자와 손잡고 월드카드 출시, 틴더에 신원증명 도입

홍채 스캔을 마치자 월드앱에 약 20달러 상당의 40월드코인이 입금됐다. 월드앱 캡처
홍채 스캔을 마치자 월드앱에 약 20달러 상당의 40월드코인이 입금됐다. 월드앱 캡처


일각에서 ‘스캠 코인 수준’이라며 냉소하지만, 일단 올트먼은 자신감을 보였다. 그는 이날 행사에서 월드앱의 월간활성이용자(MAU) 수가 7개월 전보다 40% 이상 급증하며 세계 1위 가상자산 지갑으로 등극했다고 자랑했다. 알렉스 블라니아 TFH CEO도 “현재 월드앱 사용자 수는 3,700만 명이고 이 중 홍채 인식을 마친 검증된 사용자는 1,700만 명”이라며 자신감을 내비쳤다.

TFH는 홍채 인식을 통한 월드앱 계좌와 채팅, 외부 인증 기능을 갖췄다고 설명했다. 이날 무대에 임시로 마련된 카페에선 지갑이나 휴대폰을 꺼낼 필요 없이 이용자가 매장에 설치된 오브를 바라보는 것만으로 커피값이 즉각 결제되는 ‘생체 인식 결제’를 시연했다. TFH 측은 “조만간 비자(Visa)와 협업한 ‘월드 카드’를 출시해 온오프라인 어디서든 결제가 가능하도록 할 것”이라고 예고했다.

여권 등 정부 발행 신분증이 없어도 월드앱을 통해 본인·연령 인증을 할 수 있는 기능을 외부 플랫폼에 개방한다고도 밝혔다. 월드앱 안에 새로 추가된 채팅 기능에서는 ‘인간임이 인증된 사용자’의 말풍선은 파란색으로 표시해 AI 챗봇과 구분할 수 있게 했다. 이와 함께 월드앱 내 디지털 지갑에서 미국 달러 기반 스테이블코인(가치안정형 디지털자산) 가상계좌를 만들 수 있도록 해 여러 코인 거래를 유도하고 코인 생태계를 포섭하는 한편, 월드앱 내 미니 앱 생태계를 구축해 앱 활성화를 높이는 전략도 펴고 있다.

현장에서 가장 호응이 높았던 건 데이팅 앱 ‘틴더‘와의 협업이다. 무대에서 월드 ID로 인증한 사람들끼리만 매칭되는 기능이 시연되자 객석에선 탄성이 터져 나왔다. 신분증 없이도 나이와 본인 여부를 익명으로 증명할 수 있어, 개인정보 유출 우려 없이 AI 봇이 아닌 실존 인물을 믿고 만날 수 있게 된 셈이다.

하지만 허점도 보였다. 가입 시 생년월일을 사용자 재량에 의존하고, 이후 로그인 시 홍채 확인 절차가 없다는 점은 보안과 신뢰도 면에서 의구심을 남겼다.

암호화폐 시장, 구조적 침체와도 맞물려

19일 서울 강남구 업비트 고객센터 시황판에서 비트코인 가격이 표시되고 있다. 가상자산 시장이 글로벌 금융시장과 엇갈린 흐름을 보이며 하락세를 이어가고 있다. 뉴시스
19일 서울 강남구 업비트 고객센터 시황판에서 비트코인 가격이 표시되고 있다. 가상자산 시장이 글로벌 금융시장과 엇갈린 흐름을 보이며 하락세를 이어가고 있다. 뉴시스


무엇보다 ‘코인’으로서의 가치 하락이 뼈아프다. 올해 11달러에서 고점을 찍은 월드의 가치는 현재 0.51달러 선까지 곤두박질쳤다. 올트먼의 ‘신원 혁명’은 암호화폐 시장의 구조적 침체라는 거대한 벽에 부딪힌 것이다.

비트코인이 역대 최고가 대비 30% 이상 급락한 가운데, 이더리움과 솔라나 등 주요 코인도 동반 약세를 보이고 있다. 고금리 지속으로 위험자산 투자 심리가 위축된 데다, 자본이 실체가 불분명한 코인 대신 AI 반도체 등 실물 테크 산업으로 쏠리고 있기 때문이다. 블룸버그 통신은 “과거의 세 차례 연간 하락은 암호화폐 업계의 대형 추문이나 산업 붕괴 등의 사건과 맞물렸지만 이번 연간 하락은 그런 문제가 없다는 점에서 첫 사례”라며 암호화폐 시장이 침체기에 접어들었을 가능성을 시사했다.

샘 올트먼 오픈AI 최고경영자(CEO)가 2023년 7월 월드코인을 출시하며 엑스(X)에 남긴 글. X 캡처
샘 올트먼 오픈AI 최고경영자(CEO)가 2023년 7월 월드코인을 출시하며 엑스(X)에 남긴 글. X 캡처


올트먼은 월드 프로젝트를 둘러싼 각종 우려와 비판에도 불구하고 결국 시대가 자신의 비전을 수용할 것임을 확신하고 있다. 그는 2023년 7월 사회관계망서비스(SNS) 엑스(X)를 통해 월드코인 출시를 알리며 “모든 혁신적인 프로젝트가 그렇듯 월드 프로젝트 역시 잘될 수도 있고 안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런 시도를 하는 것이 발전하는 비결이라 믿는다”고 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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