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발 직후 미국 ‘모르쇠’…파장 우려 사전인지 부인했을 가능성
윤석열·군 수뇌 삼청동 안가 회동 때부턴 계엄 계획 알았을 듯
윤석열·군 수뇌 삼청동 안가 회동 때부턴 계엄 계획 알았을 듯
지난해 12월 3일 윤석열 대통령이 불법 계엄을 선포한 후 자정을 넘긴 4일 새벽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에 도착한 무장군인들이 국회 본청 진입을 시도하자 국회 직원 등이 격렬히 막아서고 있다. 성동훈 기자
[주간경향] “The situation is fluid(상황은 유동적이다).”
윤석열 전 대통령이 불법 계엄을 선포한 2024년 12월 3일, 국제관계 전문가인 이해영 한신대 국제관계학부 교수는 미국 동향이 중요하다고 판단해 주한 미국대사관의 X(옛 트위터) 공지를 실시간으로 캡처했다.
“사건 발발 직후부터 쭉 그렇게 쓰여 있었다. 그러다 국회에서 계엄 해제를 의결한 다음부터 논조가 바뀐다. 상식적인 경우라면 상황이 발생했을 때 쿠데타는 민주주의를 해치고 한·미가 공유하는 공동가치에 어긋난다고 얘기했을 텐데 처음에는 일언반구도 없었다.”
최근 MBC와 인터뷰한 필립 골드버그 당시 주한 미 대사가 “쿠데타 당일 관저에서 막 잠이 들어” 계엄 선포를 몰랐다고 밝힌 것에 대한 이 교수의 주장이다. 골드버그 전 대사는 MBC에 “갑자기 대사관에서 유선전화로 저를 찾는 전화가 걸려 와서 잠자리에서 일어났다. (…) 휴대전화를 열어보니 각종 부재중 전화가 쌓여 있었다”고 말했다.
잠들어 몰랐다는 미 대사…사실일까
이 교수는 “정말 몰랐다면 웃자고 하는 소리”라고 강조했다.
“쿠데타 발생 직후 아프리카 방문 중인 바이든 당시 미국 대통령에게 보고가 들어간다. 그 보고를 듣고 아무런 말을 안 한다. 그게 기록에 잡힌다. 나는 이 상황과 가능성을 사전에 알고 있었다고 본다. 혹시나 성공하면 우리 편, 실패하면 자신은 모르는 일이다. ‘이기면 관군(官軍) 지면 역적(逆賊)’, 그 공식은 국제관계에서도 여지없이 관철된다. 쿠데타가 성공했다면 미국은 모르쇠로 일관했을 것이다. 그런데 실패했으니 다급해 하는 모습이 포착된다. 바이든 정부가 내세우는 최대 업적이 한·미·일 공조인데 이게 어떻게 될 것인지가 미국으로선 중요했다. 이후 대선 국면에서도 새로 구성될 한국 정부에 끊임없이 미국이 확인하려고 했던 대목이다.”
해당 인터뷰에서는 ‘평양의 반격을 유도하기 위해 북한에 무인기를 침투시켰다는 의혹이 드러났는데 미 정보 당국이 포착하지 않았나’라는 질문이 나왔다. 이에 대해 골드버그 전 대사는 “그때는 전혀 인식하지 못했다”라며 “다만 그 이후에 그런 일이 있었을 수 있다는 보도를 봤고, 사법절차에 따라 서울에서 진행되고 있다는 것만 알고 있었다”라고 답했다. 그러나 국제 관계 전문가들은 이는 사실일 가능성이 낮다고 지적한다.
적어도 윤 전 대통령과 군 수뇌부들이 삼청동 안가에서 회동을 갖고 계엄을 모의한 2024년 3월 29일 즈음부터는 도청이나 휴민트 등 여러 방식으로 정보를 수집해 미국이 계엄 계획을 사전에 알고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는 게 이들의 공통된 의견이다.
“당일 출동한 부대들이 한미연합사 통제 밖에 있었던 것은 맞다. 1980년이나 1987년, 정치적 필요로 군을 동원하면 늘 나오는 그 부대들이 동원된다. 그래도 예전 군사 기밀문서들을 확인해보면 다 연락을 한다. 1980년 5월에도 윌리엄 글라이스틴 대사가 비상계엄 전국 확대를 몰랐다고 하는데 나중에 관련 문서가 공개되면서 군대 이동을 다 알고 있었다는 것이 드러났다. 게다가 1980년 5월 17일에서 20일 사이 광주에 20사단이 파견되는데 20사단은 미군의 작전통제권 안에 있는 부대였다. 다 알고 승인했는데도 모르는 체한 것이다.”
최용주 전 5·18민주화운동 진상규명 조사위원회 조사1과장의 말이다.
2024년 12월 5일 비상계엄 전계엄사령관인 박안수 육군참모총장(왼쪽)이 5국회 국방위 현안질의 정회시 엘리베이터를 함께 탄 김민석 당시 더불어민주당 의원과 함께 굳은 표정을 짓고 있다. /박민규 선임기자
87년 6월 쿠데타 시도 때도 CIA 출동 부대앞 ‘무력 시위’
1987년 6월 항쟁과 관련해서도 미국의 역할에 대한 비사(祕史)가 있다.
지난해 8월 출간된 책 <허수아비와 그림자 권력>에 따르면 전두환은 1987년 6월 20일 새벽 4시를 기점으로 전국에 계엄령을 선포하려고 했다. 사전 정보를 입수한 미8군 정보부대는 전날인 19일 제임스 릴리 당시 주한 미 대사의 전두환 면담을 추진한다. CIA 한국지부는 주한미군의 협조를 얻어 탱크 5대를 특전사와 수방사 등 주요 한국군 정문에 보내 마치 탱크가 고장 나 수리하는 것처럼 꾸며 버티는 ‘무력시위’를 한다. 이는 추정이 아니라 전두환 회고록과 기밀 해제 문서 등을 통해 밝혀진 내용이다. 책 저자인 정상모 평화민족문화연구원 이사장의 말이다.
“손바닥 보듯 다 알고 있었을 것이다. 골드버그 전 대사의 인터뷰를 봤지만, 미리 알고 있었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 없는 미국의 입장이 있을 것이다. 인정하는 순간 자칫하면 의외의 파장이 생기니까. 대사도 정무 감각이 있는 인물이다. 특히 평양 무인기 사건 같은 게 벌어진 배경을 미국이 몰랐을 리 만무하다. 여러 정보 판단을 했을 것이다.”
박태균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는 “구체적인 근거가 없는 상태에서 확정해 언급하는 것은 이르다”면서도 “평양 무인기 사건은 군용 정찰 드론이 아닌 민간 제조사 무인기를 선정했다는 것부터 말이 안 된다”라고 말했다. 군에서도 이런 작전을 계획했을 때 미국이 승인을 거부할 가능성을 염두에 뒀을 것이라는 지적이다. 그는 이렇게 덧붙였다.
“과거 계엄 때와 유사하다면 직전이라도 통보하고 시작했을 가능성이 크다. 그런데 다른 한편으로 그런 통보를 했을 때 미국이 OK할 가능성은 없다. 그렇다면 통보 안 하고 저질렀을 가능성도 있다.”
1980년 5·18 당시 미국 대사관과 미국 국무부 등 사이에서 오간 기밀문서 공개를 외교부와 함께 진행한 최용주 전 과장은 “해제된 기밀문서를 보면 우리가 보기에 사소한 일에도 수백 페이지짜리 보고서를 만드는 등 문서 작업을 엄청나게 해놓았다”라며 “외부에 공개하지 않더라도 계엄 전에도 윤 전 대통령 동향에 대한 정세 판단이나 12·3 한국에서 벌어진 사태에 대한 분석을 담은 보고서는 분명 작성해 내부적으로 회람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박선원 더불어민주당 의원실 관계자는 “평양 무인기 사건에 대해 한미연합사는 당연히 알았고, 대사가 그걸 언론 보도를 보고 알았다고 하는 것은 말이 안 된다”고 말했다.
그는 “우리가 생각하는 가장 큰 의혹은 쿠데타가 일어난 다음 날 미국 출장이 예정돼 있던 조태용 당시 국정원장이 미 대사 및 미 정보당국자와 저녁 식사 회동을 한 일”이라며 “의례적인 자리였다고 하지만, 미국 측이 계엄을 사전에 몰랐다면 관심을 돌리려고 한 것이었고, 만약 알았다면 한국 측이 사정을 설명하고 협조를 요청하는 자리였을 가능성이 있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