썰렁한 전통시장, 장바구니도 가벼워
송년회·회식 감소에 연말 특수 '실종'
원자재 가격 올랐지만 판매가 그대로
"최근 10년 중에 올해가 가장 힘들어"
송년회·회식 감소에 연말 특수 '실종'
원자재 가격 올랐지만 판매가 그대로
"최근 10년 중에 올해가 가장 힘들어"
17일 서울 동대문구 청량리 전통시장에서 상인 장덕일(왼쪽)씨가 배를 사러 온 손님과 대화하고 있다. 나민서 기자
"배 4개 묶음에 5,000원 주세요."
"아유, 경제도 안 좋은데, 2개만 2,000원에 안 될까."
17일 서울 동대문구 청량리 전통시장 과일가게에서 상인과 손님이 물건 값을 놓고 한참을 '아웅다웅' 실랑이를 벌였다. 퍽퍽한 살림살이에 한 푼이 아쉬운 건 손님이나 상인이나 매한가지. 탐스러운 배에서 좀처럼 눈을 떼지 못한 채 손님은 쓴 입맛을 다시며 발걸음을 돌렸다.
사장 장덕일(76)씨는 "이렇게 팔아도 남는 게 없다"며 "싸게 드리고 싶지만, 손해 보고 장사할 수는 없지 않냐"며 한숨을 쉬었다. 그 틈에 끼어든 옆 가게 상인은 떠나는 손님을 다급히 붙잡더니 "사과는 어떠냐. 원래 7개 1만 원인데 하나 더 넣어드리겠다"며 시식용 사과 한 조각을 건넸다.
썰렁한 전통시장…텅 빈 장바구니
17일 서울 영등포 전통시장의 한 모자 가게에 '점포 정리' 문구가 붙어 있다. 남병진 기자
한파에 기온은 뚝뚝 떨어지는데, 물가는 죽죽 올라간다. 흥청망청이 어느 정도 용인되던 세밑 대목은 한파보다 매서운 고물가에 이제 옛일이 됐다. 돈을 쓰는 사람은 이전 가격 생각에 발길을 돌리고, 파는 사람은 연말 특수는커녕 '본전치기'도 어렵다며 가슴을 졸인다. 특히 서민들이 주로 찾는 전통시장은 물가에 대형마트와 경쟁까지, 이중고를 하소연한다.
이날도 기자가 찾은 청량리 시장 상인들도 물가 얘기를 한없이 입에 올렸다. 늘 북적이다 이젠 한산한 생선가게 사장 강영이(65)씨에게 말을 걸어봤다. "'국민 생선' 고등어 가격을 아냐. 작년보다 2,000원 넘게 올랐다"는 말이 오간 뒤 그는 "파는 사람도 사는 사람도 괴로운 연말"이라며 한숨을 푹 쉬었다.
상인들만 울상이 아니다. 장 보러 나온 시민들도 '얇아진 지갑'에 가격만 물어보기 일쑤다. 청량리 시장이 저렴하다는 소문을 듣고 후암동에서 45분 걸려 왔다는 신영희(67)씨는 "야채가 조금이라도 비싸면 못 사겠다"며 청양고추 한 묶음을 들었다 내려놨다 하다가 자리를 떠났다.
시장만 그런 것도 아니었다. 이곳엔 동네마트와 대형 음식점 등에 식재료를 공급하는 도매상도 밀집돼 있는데 요즘 직격탄을 맞았다. 30년 경력 청과물 도매상 황종현(66)씨는 "동네마트가 다 망해 가니까 사가는 사람이 없다"며 "연말연시에 이렇게 장사 안 되기는 처음"이라고 혀를 내둘렀다.
같은 날 서울 영등포구 전통시장은 사실상 휴업 상태나 다름없었다. 문을 연 가게보다 닫은 가게가 훨씬 많았고 '점포정리'라 써둔 곳도 적지 않았다. 시장 골목을 통로 삼아 지나가는 행인만 간간이 보였다. 잡곡•건채류를 파는 이희숙(67)씨는 "하루에 2만 원도 못 판다"고 말했다.
연말 모임 줄이고 생활비 조여 매고
17일 서울 종로구에 있는 족발집이 손님 없이 텅 비어 있다. 나민서 기자
연말 회식이나 모임으로 북적여야 할 식당가에도 찬 바람만 불고 있다. 종로구의 맛집 골목은 퇴근한 직장인들이 들이닥칠 저녁 시간이 다 됐는데도 오가는 사람이 손에 꼽을 정도였다. 족발집을 운영하는 박건하(67)씨는 "회식 예약은 안 들어오고, 소상공인 대출 상환 독촉 전화만 오고 있다"고 했다. 서울 여의도의 맥주집 사장 공지선(45)씨는 "작년에는 매일 다섯 팀 이상 예약이 들어왔고, 80석 자리도 다 찼다"며 "올해는 예약도 없고 오는 손님도 맥주 한 잔씩만 하고 자리를 뜬다"고 말했다.
시민들은 연말 모임과 식비를 줄여가며 불황을 견디고 있다. 실제로 회식비 부담에 연말 모임이 편치 않다는 이들이 적지 않다. 3년째 금융업계에 종사한다는 최원준(32)씨는 "얻어먹는 '청첩장 모임'이 아닌 자리는 회비가 걱정돼 최대한 피하고 있다"며 "소개팅 제안도 들어오는데 저녁 값이 부담스러워서 거절했다"고 토로했다.
17일 서울 영등포구의 한 편의점에서 직장인 김지호씨가 저렴하게 점심을 해결하고 있다. 남병진 기자
젊은 직장인들은 아예 '자린고비 챌린지' 등 허리띠를 잔뜩 조일 준비를 마쳤다. 불필요한 지출을 줄이겠다는 각오. 직장인 김지호(37)씨는 이날 편의점에서 도시락을 통신사 할인받아 싸게 구매한 뒤 점심 한 끼를 해결했다. 그는 "밥값이라도 줄이려 3개월째 '식비 30만 원 챌린지'를 하고 있다"며 "연말 모임에 가고 싶지만 참고 있다"고 말했다.
일부 청년들은 우정과 사랑도 포기해야 할 형편이라고 털어놨다. 서대문구에 거주하는 대학생 김민성(23)씨는 "동아리 종강 파티에 참여하려면 3만 원씩 걷는데 자취 식비도 빠듯해 못 갔다"며 아쉬워했다. 연말을 맞아 여자친구와 교제 1주년 파티를 계획 중이던 대학생 이정후(21)씨는 "케이크 가격이 8개월 사이 5만 원 넘게 올랐더라"며 "집에서 간소하게 홈파티나 하려 한다"고 씁쓸하게 웃었다.
오른 물가에 양 줄이는 소상공인
치솟는 재료비와 원자재 가격은 자영업자들에게 치명적이다. 판매가를 올려야 하지만 가격이 오르면 찾는 이가 줄어들 수밖에 없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 하고 발만 동동 구르고 있다. 마포구에서 디저트 가게를 운영하는 이지은(33)씨는 "초콜릿 가격이 올해 초보다 2배 올랐고 버터도 30% 올랐다"며 "가격을 차마 올리지 못하고 재료 양을 줄이고 있다"고 설명했다. 레스토랑을 운영하는 김성민(41)씨도 "주변 사장님들끼리 최근 10년 중에 올해가 제일 힘들다고 말한다"고 털어놨다.
원래 연말에 업황이 좋지 않았던 소상공인들의 상황은 더 심각하다. 구로구의 기계공구상가에선 간간이 기계 돌아가는 소리만 들릴 뿐 활기라고는 찾아보기 어려웠다. 볼트를 파는 김건용(64)씨는 "건설업은 보통 3월부터 현장 업무가 시작되기 때문에 겨울은 늘 장사가 안 되는 편이긴 하지만 올해는 유독 힘들다"며 "올겨울에는 주문 자체가 안 들어온다"고 푸념했다.
18일 서울 구로구의 기계공구상가 거리를 행인 한 명이 지나가고 있다. 이곳에선 '임대 문의' 문구를 붙여 놓은 점포를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남병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