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매 전쟁 일상화…예매 대행 사설업체 이용하거나 부정승차 감수
KTX 열차 수서역 투입으로 ‘숨통?’…선로·열차 증설 없인 미봉책
KTX 열차 수서역 투입으로 ‘숨통?’…선로·열차 증설 없인 미봉책
정부가 KTX와 SRT의 단계적 통합을 골자로 한 ‘이원화된 고속철도 통합 로드맵’을 발표한 지난 12월 8일, 서울 강남구 수서역 대합실에 SRT 열차 운행 시간표가 표시돼 있다. 성동훈 기자
[주간경향] 세종시에 근무하는 공무원 A씨는 지난 11월 수능 시험일 직전까지 1년간 매주 한 번씩 오전 6시 55분 알람에 맞춰 SRT앱을 실행했다. SRT는 탑승일 30일 전 오전 7시에 표 예매를 시작하는데 이 시간을 놓치지 않기 위해서였다. 고3인 딸이 주말마다 서울 입시학원의 현장 강의를 들으러 가는데, 자칫 표를 구하지 못할까봐 시작한 일정이다. A씨는 “깜빡하고 2~3주 전까지 예매를 안 해두면 표가 매진돼 온종일 새로고침 버튼을 누르며 취소표를 뒤져야 한다”고 했다.
충남 천안에서 KTX를 타고 매일 서울로 출퇴근하는 김소영씨의 경우 자유석 제도를 이용해 교통비를 아끼고 있다. 자유석 제도는 가격은 낮춰주되 별도로 지정된 자유석 지정칸 빈 좌석에 앉아갈 수 있도록 하는 표다. 탑승객이 적으면 일반실에 앉아서 갈 수도 있다. 하지만 김씨는 거의 좌석에 앉아본 적이 없다. 그는 “빈자리는커녕 복도나 열차 연결하는 곳까지 사람이 꽉 찬 채로 타고 내린다”며 “갈수록 심해지는데, 특히 월요일은 지옥철”이라고 말했다.
일상된 예매 전쟁…“기차표 못 구해 여행 취소될 뻔”
국내 고속철도가 상시 매진이라는 난관에 봉착했다. 명절 기간에나 볼 법한 예매 전쟁이 평일과 주말을 가리지 않는 일상이 되면서 사설 예매 대행 서비스를 이용하거나, 비싼 벌금에도 부정승차를 감수하는 사람들도 늘고 있다. 내년부터 KTX 열차까지 수서역에 투입, 좌석 부족 현상을 숨통이라도 틔워보겠다는 게 정부 계획이지만, 선로·열차 부족이라는 인프라 문제가 해결될 때까지 최소 수년간은 예매 전쟁이 이어질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국토교통부 자료를 보면 지난해 고속철도 이용객은 KTX 9000만명, SRT 2600만명으로 1억1600만명을 기록했다. 이는 1년 전보다 5.4%(600만명) 증가한 것으로, 전체 간선철도(일반+고속) 이용객의 68%에 달한다. 고속철도 이용객은 2019년 9500만명으로 1억명에 육박했다가, 코로나19 직격탄을 맞은 2020년 6100만명으로 급감했는데 2021년 7000만명, 2022년 9500만명, 2023년 1억1000만명 등 매년 수백만명씩 늘고 있다.
고속철도 이용률은 112%(KTX 105.8%·SRT 134%), 승차율은 67.1%(KTX 64.5%·SRT 78.1%)다. 이용률이란 공급 좌석 수 대비 이용객 수를 말하는데, 서울~부산 구간 열차에서 서울~오송, 오송~부산처럼 구간별로 이용자가 다를 수 있기 때문에 100%를 넘길 수 있다.
이와 달리 승차율은 일반적으로 공급되는 좌석이 모두 얼마나 팔렸는지를 나타낸다. SRT의 승차율이 78.1%라는 말은 새벽부터 심야까지 운행하는 모든 열차 좌석 10개 가운데 8개가 팔렸다는 뜻으로, 수서~오송 구간 등 주요 노선에서는 출퇴근 시간대는 물론 낮시간대까지 매일 표가 매진된다.
지난 12월 11일 서울역 플랫폼에서 승객들이 오가고 있다. 연합뉴스
김경택 철도교통연구본부 부연구위원은 “자연적으로 증가하는 이용객에 더해 고속철도와 연계되는 신규 노선이 계속 개통되면서 중장거리 이용객이 크게 늘었고, 세종시나 혁신도시들이 들어서면서 출퇴근 수요도 늘었다”고 설명했다. 여기에 차량공유 서비스 활성화에 따른 장거리 직접 운전 필요성의 감소, 외국인 여행객 증가 등도 철도 수송 수요를 크게 늘렸다. 외국인 철도이용객은 올 상반기에 284만명을 기록했는데, 이는 지난해 같은 기간 대비 13.4% 증가한 수치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이런 ‘상시적 매진’ 상황을 예상하지 못한 사람들이 낭패를 겪기도 한다. 회사원 정수진씨는 “특가를 보고 호텔까지 다 예약했는데 기차표 때문에 여행을 못 갈 뻔했다”면서 “호텔 취소가 안 돼 결국 밤 기차를 타고 이동하면서 하루를 그냥 날리게 됐다”고 말했다.
오픈런에 부정승차, 사설 예매 대행까지
기차표 구하기가 어렵다 보니 마음먹고 무임승차에 나서는 경우도 많다. 국회 국토교통위원회 정점식 의원(국민의힘)이 SR로부터 제출받은 ‘연도별 SRT 부정승차 적발 및 금액 현황’ 자료를 보면 최근 5년간 조사된 부정승차 적발 건수는 80만3000건이다. 2021년에 5만7000건이었던 부정승차는 지난해 24만2000건으로 4배 이상 급증했다. 의원실은 표를 구하지 못하는 상황이 상시화되면서 부가운임을 내고서라도 고속열차를 타야 하는 사람이 늘었기 때문으로 분석했다.
코레일 관계자는 “예약 사이트가 열리면 일단 무더기로 예약한 뒤 취소하는 사람이 늘면서 표가 부족한 상황을 더 부채질한 것 같다”며 “부정승차 부가운임, 취소 수수료 확대로 앞으로 개선될 수 있을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코레일과 SR은 지난 5월부터 승차권 위약금(취소수수료)을 최대 2배 인상해 운영 중이다. 부정승차 부가운임도 기존 대비 2배로 높였다.
시장에서는 취소표 예매를 대행해주는 사설업체까지 등장했다. B업체는 고객이 원하는 시간대의 표를 지정하면 실시간으로 취소표를 검색해 원래 운임에 수수료를 더해 표를 판매한다. 표가 확보되지 않으면 별도로 지급해야 하는 비용이 없다. 다만 철도사업법은 철도사업자나 위탁판매 사업자가 아닌 경우 승차권을 정가보다 높게 판매하는 행위를 금지하고 있기 때문에 법 위반 소지가 있다.
이장호 한국교통대(철도인프라공학과) 교수는 “철도는 주택처럼 공급할 때까지 수년이 소요되기 때문에 공급이 지속적으로 이뤄졌어야 했다. 코로나19 직전에 이미 차량 주문의 필요성이 제기됐지만 막혔고, 코로나19 때는 ‘승객이 줄었다’, 코로나19가 끝나고 나서는 ‘앞으로 인구가 줄어들 거다’ 등의 이유를 들어 재정당국이 차량 주문 요구를 막았다”면서 “논란이 되는 평택~오송 복복선화(4차선) 사업도 예타(예비타당성조사)를 탈락시켜 이제 겨우 시작하게 됐다”고 비판했다.
평택~오송 구간은 중부권에서는 서울, 용산, 수서발 열차가, 남부권에서는 부산·광주·목포·여수·진주·마산발 열차가 모두 지나가는 구간이다. 하루평균 190대만 운행이 가능하기 때문에 열차를 새로 투입할 수조차 없다. 앞서 한 차례 예타 탈락으로 사업이 지연된 뒤 문재인 정부의 ‘국가균형발전 프로젝트’에서 예타 면제 대상 사업으로 선정돼 2023년부터 공사가 진행 중이다. 사업이 완료되면 최대 352회의 차량이 다닐 수 있어 증편에 숨통이 트일 수 있지만, 일러야 2028년에나 완공될 전망이다.
철도 인프라 개선은 2028년 이후에나
때문에 정부는 코레일과 SR의 단계적 통합작업(이원화된 고속철도 통합 로드맵)의 일환으로 내년부터 20량짜리 KTX 차량을 수서역 SRT 노선에 일부 순환 배치한다는 계획이다. 통합편성·운영이 완료되면 현재 하루평균 25만5000석 수준인 고속철도 좌석이 하루 최대 1만6000석 더 늘어날 것으로 코레일은 추산하고 있다.
일각에서는 KTX 차량을 수서역으로 돌리면 서울역 출발 좌석이 더 줄어드는 게 아니냐는 우려도 나오지만, 차량 운용계획에 융통성이 생기면서 대기시간을 줄이는 효과로 감편 없이 좌석을 늘릴 수 있을 것으로 업계는 보고 있다. 다만 이 역시 신규 열차 추가나 병목 노선 해결 같은 인프라가 개선되는 것은 아니어서 미봉책에 그친다.
이 교수는 “결국은 증편이 이뤄져야 예매 대란 문제가 해결될 수 있다”면서 “열차를 지금 주문해도 4년 걸리는데 하루라도 빨리 주문해서 10량짜리 열차를 20량짜리로 만들고, 병목구간 해소 사업도 서둘러야 한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