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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구대 암각화 세계유산 등재 확실시‘암각화 전문가’ 김호석 화백
지난 7월 1일 오후 울산시 울주군 언양읍 대곡리 반구대 암각화에 앞에 선 김호석 화백. 그는 반구대 암각화가 한국미의 원형이라고 설명했다. 송봉근 기자
오래된 문장이 있다. ‘먹빛 조건의 지배를 받는다.’ 17년 전 출간된 『한국의 바위그림』 한 모퉁이에 새겨져 있다. ‘선은 지적인 범주에 속한다’는 표현도 박혀 있다. 손쉽게 쓴 단어의 나열은 아닐 터. 이 점과 점 같은 문장들은 선으로 모여 행진하듯 하나로 향한다. 반구대 암각화다.

프랑스 파리에서 열리고 있는 제47차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 12일 ‘반구천 암각화’의 세계유산 등재를 최종 결정했다. 2010년 세계유산 잠정 목록에 등재된 지 15년 만이다. 한국은 석굴암·불국사·해인사 장견판전 등에 이어 총 17건의 세계유산을 보유하게 됐다. 앞서 지난달 26일엔 국제기념물유적협의회가 등재를 권고했다. 반구천은 울산시 울주군 언양읍 대곡리 반구대 암각화와 천전리 암각화를 아우르는 내(川)다.

그보다 한발 앞서 반구대 암각화를 찾았다. 지난 1일 오후 3시. 장마 속 하필 땡볕. 그것도 37도. 김호석(68) 화백은 미소를 짓고 맞이해줬다. 의문 하나. 왜 가장 더운 한여름 오후 3시인가. 생존 본능은 ‘왜 수묵화가 김호석인가’라는 궁금증을 ‘의문 둘’로 미루고 말았다.

성철·법정·노무현 초상화 그린 수묵화가

Q : 반구대 암각화를 꼭 이 시간에 봐야 하는 이유가 있습니까.

A :
“암각화가 북향이기 때문이죠. 10~2월에는 햇빛이 들지 않습니다. 3월 들어서야 느릿느릿 늦은 오후에 햇빛을 받기 시작해요. 6월과 7월에 빛이 가장 길게 머무릅니다.”
김호석 화백이 연구용으로 소장하고 있는 반구대 암각화 탁본 자료. [사진 김호석]
뙤약볕을 받아 올라온 습기로 공기에 물이 찬 날, 반구대 암각화에 한 걸음 더 다가섰다. 그림자가 덜어지고 빛이 더해졌다. “암각화가 잘 보이지 않았다”는 이들은 ‘때’를 잘못 만났기 때문이었을 터.


Q : 암각화는 보통 떠오르는 해를 바라보지 않습니까.

A :
“여태껏 100만여 점의 암각화를 봤는데 적어도 제가 본 암각화 중 손바닥만 한 것들 빼고는 모두 동남향이었습니다. 오늘은 제가 이곳을 찾아온 날 중 가장 좋은 빛의 조건입니다. 보세요. 그림이 살아 움직이는 것 같죠. 그윽하고 가물가물한 유현미에서 생동감을 더했습니다. 역설적인 그림자 미학. 그게 바로 반구대입니다.”
1971년 12월 발견 직후의 반구대 암각화. 1년 평균 42일간 물에 잠긴다. [사진 김호석]
그의 책 속 ‘먹빛 조건의 지배를 받는다’의 뜻풀이다. 먹빛은 김 화백의 붓끝에서도 나온다. 그는 수묵화가다. 1999년 국립현대미술관 올해의 작가, 2000년 광주비엔날레 한국 대표작가로 뽑혔다. 풍경화에서 시작해 역사·인물·동물화까지, ‘씁쓸한 시대 위로 겹치는 따스한 생명력’이란 평을 받으며 수묵화의 지평을 열었다. 성철 스님과 법정 스님, 노무현 전 대통령 초상화도 그렸다. 궁금해서 얼마씩 받았냐고 물어봤더니 “영업 비밀”이란 말이 돌아왔다.

1979년 ‘아파트’를 내며 중앙미술대전으로 등단했던 22세쯤, 그는 반구대 암각화를 처음 만났다. “덜컥하고 당시 마음이 동했소”라는 말이 나왔으면 좋으련만. 김 화백은 “잠깐 내 말 좀 들어보소”라며 한 박자 늦췄다.
김호석 화백이 1979년 중앙미술대전으로 등단할 때 그린 '아파트'. [사진 김호석]
김호석 화백이 한가로운 휴식을 즐기는 모습으로 그려낸 성철 스님. [사진 김호석]
김호석 화백이 그린 법정 스님 초상화. [중앙 포토]
김호석 화백이 그린 노무현 초상. [사진 김호석]
시어머니와 며느리의 훈훈한 정을 그리워한 김호석 화백의 수묵화 '바람 목욕'. [사진 김호석]
김호석 화백은 '얼굴 없는 노무현'은 대해, 전 대통령을 직접 만나 대화하며 함께 구상한 작품이라고 설명했다. [사진 김호석]

그는 눈썹이 거의 없다. 치아가 너무 가지런하다. 임플란트가 10개다. “전시회를 한 번 열면 온 힘을 쏟아붓느라 눈썹과 치아가 빠져요. 머리털은 괜찮은데(웃음).” 이렇게 탈탈 털려 1990년대 초반 몽골 고비 사막에 갔다. 새벽에 텐트에서 나와 소변을 보는데, 어라? 소와 말·낙타의 환영이 보였다. 신기루였나. 그 새벽에? 알고 보니 거대한 선사시대 암각화 근처였다. 동물이 뛰었고, 사람이 숨 쉬었다. 김 화백은 “그 암각화에서 선과 점으로 표현한 생명력을 봤어요. 충격이었죠. 예술의 근원이 암각화라고 그때 느꼈습니다.” 이후 그는 몽골과 러시아 알타이, 티베트 등의 암각화를 80여 차례 찾았다.
반구대 암각화에는 296점의 그림이 새겨져 있다. 6월과 7월 오후 2시와 4시 사이에 가장 잘 보인다. 송봉근 기자

반구대 암각화에 사람과 동물 모양이 선명하게 새겨져 있다. 오른쪽 고래 모습은 어미는 음각으로, 등에 업힌 새끼는 양각으로 표현한 진일보한 암각 기법이다. 송봉근 기자

Q : 암각화 연구로 박사학위를 따셨더군요.

A :
“암각화는 미술의 시원(始原)입니다. 문화·예술·사상과 종교, 모든 사회상이 문자도 없던 시대에 문자를 대신해 그림으로 나타낸 게 암각화입니다. 그림으로 그려진 역사이자 제작자의 미적 안목이 적극적으로 개입한 ‘작품’입니다. 수묵화가인 제가 암각화 전문가 소리를 듣는 건 한국미의 근원을 알기 위해 암각화를 연구하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의문 둘’도 풀렸다. 그는 반구천 암각화의 세계유산 등재 여부 소식을 러시아에서 듣는다. 인터뷰 직후 세계유산인 알타이 암각화군 현장 답사에 나섰기 때문. 그는 “그림 파는 족족 암각화를 보러 다니니 모은 돈이 없다”며 다시 웃었다.

반구천 천전리와 반구대 암각화는 ‘크리스마스의 선물’로도 불린다. 각각 1970년 12월 24일과 1971년 12월 25일 발견돼 국보로 지정됐다. 이후 다른 암각화도 속속 드러나면서 총 13곳이 보고됐다고 한다. 김 화백은 특히 반구대 암각화가 아시아 북방에서 봐온 암각화와의 차이점이 뚜렷하다고 했다.

그래픽=이현민 기자

Q : 공통점부터 말씀해주신다면요.

A :
“선사시대 미술은 선의 미술, 윤곽의 미술입니다. 현재도 선은 회화의 기본입니다. 사물을 지각하기 위해서는 점과 선을 이해해야 합니다. 아시아 북방의 암각화와 반구대 암각화는 똑같이 선 쪼기-면 쪼기-굵은 선 새김-선과 면의 장식 새김으로 제작 기법이 이어집니다. 그래서 암각화가 미술의 시원이란 말입니다. 사실주의와 절제된 단순화도 공통점이고요.”

Q : 그렇다면 차이점은요.

A :
“반구대 암각화는 앞서 말했듯 북향입니다. 암각화 제작자들의 양식이 돼준 동물들을 위한 제의적 성격을 갖지 않았나 싶어요. 아시아 북방 암각화들은 서로 인접한 곳에서 시리즈처럼 이어집니다. 이동 문명의 흔적입니다. 한데, 반구대 암각화는 하나의 바위 면에 집중적으로 그려져 있어요. 구도는 수평과 수직, 사선까지 동원해 긴장과 이완, 맺힘과 풀림으로 완성도를 높였어요. 수렵에 반려하는 개도 등장하지 않습니다. 대신 동물을 우리에 가두거나 묶은 표현이 있어요. 정착의 시기에 특정 집단이 지속적으로 제작했을 겁니다. 이들은 고래잡이 전문가들이었을 거고요. 세계유산 조건인 ‘탁월한 보편적 가치(OUV)’가 여기에 있습니다.”
선 쪼기, 면 쪼기, 굵은 선 새김 등 제작 기법으로 나눈 반구대 암각화. 반구대 암각화는 전면 높이 2.7m, 너비 6m다. 사진처럼 좌우에 있는 암벽의 그림까지 합하면 너비는 9m에 이른다. [사진 김호석]

책 속의 '선은 지적인 범주에 속한다'는 뜻풀이도 나왔다. 높이 2.7m, 너비 6m의 반구대 암각화에는 296점의 그림이 있다. 고래가 50여 마리로 가장 많다. 호랑이와 표범 등 범 종류가 25마리 안팎으로 그 다음이다. 주목해서 볼 동물은 고래다. 고래의 종류를 가늠할 수 있을 정도로 묘사했다. 좌측 하단 세 마리의 북방긴수염고래는 등의 분기공으로 물을 내뿜는다. 혹등고래는 암수까지 구분해 그렸다. 번성했던 울산 장생포의 고래잡이들은 반구대 암각화에 그림을 새겼던 이들의 후예일지도 모른다.

“10만원권에 넣자” 도안 자문위원 활동도
반구대 암각화도 천적이 있으니, 바로 물이다. 연평균 42일간 물에 잠긴다. 반구천(혹은 대곡천) 하류의 사연댐 때문이다. 암각화가 발견되기 전인 1965년 완공됐다. 김 화백은 “수문이 없는 멍텅구리 댐”이라며 “암각화가 잠기는 수위는 53m”라고 말했다. 그는 1970년대 초반과 최근의 탁본을 비교해 보니 물 때문에 훼손된 곳이 100여 군데나 된다고 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이 대선후보 시절 김 화백을 불렀단다. “어떻게 보존하면 좋겠어요?” “사연댐을 폭파하면 됩니다.” 김 화백은 “당시 어떻게든 반구대 암각화를 살리려고 과장법을 쓴 것”이라며 “현실적으로는 수위를 조절해야 한다고 조언했다”고 전했다. 2013년 국무조정실과 문화재청, 울산시가 반구대 암각화 주변에 투명 물막이 벽을 세우는 안을 추진했다. 하지만 모형 실험이 번번이 실패하면서 혈세 30억원을 날린 바 있다.
김호석 화백이 지난 7월 1일 오후 반구대 암각화 앞에서 설명하고 있다. 반구천은 이틀 전 폭우로 불어났으나 이날 신발을 신고 걸어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물이 빠졌다. 김홍준 기자.


Q : 20여 년간 줄곧 반구대 암각화의 세계유산 등재를 주장해 왔습니다.

A :
“형태와 내용은 민족의 자랑이라고 할 정도입니다. 보존이 걸림돌이었어요. 등재가 좌절될 때마다 10만원권에 넣어야 한다고 주장했죠. 물속에 있다는 걸 알리는 방법으로요.”

Q : 10만원권이요?

A :
“네, 노무현 정부 시절 실제로 추진되기도 했는데 이명박 정부 들어서면서 결국 발행되진 않았습니다. 시안 앞에는 김구 선생이, 뒤에는 반구대 암각화가 세로 형태로 들어갔어요. 5만원권과 함께 제가 도안 자문위원으로 활동했죠.”
울산시 울주군 대곡리 반구대 암각화 앞으로 흐르는 반구천에 물이 찬 상태에서 나룻배가 지나가고 있다. [사진 김호석]

보존은 반구대 암각화의 숙제다. 울산시는 사연댐에 수문 3개를 만드는 공사를 내년 시작하기로 했다. 수위가 낮아지면 불거지는 울산시의 용수 부족 문제는 대구시와 경북도에 협조를 요청한 상태다.

김 화백은 “타협을 모르는 꼴통이란 소리를 들으면서도 한국 문화의 자긍심이자 시원인 반구대 암각화 보존을 위해 20여 년을 뛰었다”며 “그동안 보존 방법을 놓고 치열하게 논쟁한 울산시에 진심으로 축하의 말을 전하고 싶다”고 했다. 어느새 해가 지고 있었다. 반구대 암각화가 다시 먹빛이 됐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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