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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혜영의 읽고사니즘

뼈아픈 대선 결과에 수많은 질문 계속
공항에서 우연히 만난 책에서 찾은 답
“나 정치 좋아하네. 좋아서 하는 거네!”
권영국 민주노동당 대통령 후보(가운데)가 지난 5월15일 서울 종로구 향린교회에서 ‘2030 탈핵 탈석탄 탈송전탑 희망 기후도보순례단’으로부터 대선 공약 요구서를 전달받고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정용일 선임기자 [email protected]

공항을 좋아한다. 짐을 부치고 출국심사를 전부 통과해 면세 구역에 들어서면 몸을 붙든 중력이 조금 가벼워지는 것 같다. 공항은 특정 국가의 영토 위에 세워진 건물이지만 그 안을 채운 것은 온통 하늘을 날아 어딘가로 향하는 사람들이기에 어쩐지 붕 뜬 느낌이다. 출국심사 자동문을 통과하는 순간, 조금 전까지 나를 압박하던 모든 일이 마치 먼 과거처럼 느껴진다. 새 메시지를 알리는 휴대폰 진동이 느껴져도 내겐 비장의 핑계가 있다. “죄송해요. 제가 지금 공항이에요. 내려서 연락드릴게요.” 모두가 늘 ‘온라인’인 것이 당연한 21세기 대한민국에서 이런 구조적 단절은 달콤하다. 탑승까지 기껏해야 몇십분쯤 주어진 짧은 자유를 만끽하며 오로지 떠나는 사람들을 위해 편집된 판매대와 책장을 구경하기 위해 구내서점으로 향한다. 어떤 책들이 놓여 있을까. 한 가지는 확실하다. 한강 작가의 소설책이 한국어와 영어로 쫙 깔려 있을 것이다.

과연 예상은 적중했다. 그 옆에 놓인 책들로 눈길을 돌렸다. ‘결심이 필요한 순간들’이라는 책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부제는 ‘인생의 갈림길에서 더 나은 선택을 하는 법’. 일상의 무대인 지표면에서 약 1만미터 정도 떨어진 창공은 확실히 현재를 조망하고 미래를 위한 중대 결심을 내릴 최적의 장소다. 여기 이 책을 진열한 사람의 안목은 탁월하다. 다소 진부한 감이 없진 않지만 클리셰와 클래식은 종이 한장 차이니까. 눈에 들어온 또 다른 책은 짙은 초록색 표지의 ‘설명하지 않고 설득하는 법’이다. 오렌 클라프라는 저자는 낯설지만 제목만으로도 어쩐지 정곡을 찔린 기분이다. 책을 펼쳐보니 ‘당신의 설득이 실패하는 이유’라는 소제목이 나를 반긴다. 또 의문의 1패. 그래, 내 설득이 실패하는 이유가 뭔지 들어나 보자.

“설득에 실패하는 가장 큰 이유는 우리의 잘못 때문이 아니다. 앞으로 살펴보겠지만, 우리 뇌에는 타인을 설득하는 데에 맞지 않는 진화상의 약점이 있다.”

내 탓이 아니라는 정중한 위로는 감사하지만 평소의 독서 취향대로라면 두권 모두 다시 얌전히 판매대에 돌려놓았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행운을 바라는 여행자의 마음으로 타로를 뽑듯 이 두권의 책을 품에 안고 비행기에 올랐다.

왕복 30시간이 넘는 이번 출장길에 나는 대선 이후 내내 고민해온 문제들에 나름의 결론을 내리겠다고 다짐했다. 내가 몸담은 민주노동당은 이번 대선에서 시민들을 우리에게 투표하도록 설득하는 데 크게 실패했다. 광장에서 울려 퍼진 다양성의 목소리를 ‘나중’으로 미루지 않은 유일한 진보 대통령 후보는 최종적으로 1%에도 미치지 못하는 0.98%의 득표율을 기록했다. 차별금지법 있는 대한민국을 꿈꾸는 시민이 전체 유권자의 1%도 되지 않는다는 뜻일까.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이 뼈아픈 결과는 우리의 실력 부족을 의미했다. 많은 유권자들이 우리의 존재 자체를 몰랐고, 알았어도 우리에게 투표할 충분한 이유를 찾지 못했다. 역대급 악조건 속에서 선거를 무사히 완주해낸 것만으로도 기적 같은 일이지만 여기 안주할 수는 없었다. 우리는 더 잘하기 위한 방법을 찾아야 했다. 그런데 무엇을? 어떻게? 무슨 힘으로? 쉽게 답하기 어려웠다.

비행기가 이륙하는 동안 이 답 없는 고민을 붙들고 있다가 기분 전환 겸 책을 읽기로 했다. 결심이 필요하다고 해서 ‘결심이 필요한 순간들’부터 읽으면 재미없으니 ‘설명하지 않고 설득하는 법’부터 집어 들었다. 유수의 프로젝트에 수십억달러의 자본을 조달해온 금융시장 전문가인 저자는 뇌과학의 이론을 설득 커뮤니케이션 분야에 접목시켜 스스로 구축한 특유의 방법론을 자신의 성공 스토리와 엮어 설파했다. 술술 읽혔고 유용해 보이는 조언도 있었지만 그게 다였다. 역시 이 책은 내 고민에 대한 힌트가 될 수 없다고 생각하는데 예상치 못한 문장이 눈에 들어왔다.

“물론 나는 확실한 결과를 바란다. 대출을 갚아야 하고, 직장을 유지해야 하며, 돈도 필요하고, 거래 역시 꼭 따내야 하고, 뭐 그런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유일한 이유는 아니다. 내가 이 일을 하는 이유는 그만큼 재미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거래를 성사시키는 사람이라면 모두 그 과정에서 결코 잊지 못할 최고의 순간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저자가 자본시장에서 천문학적인 돈을 움직이기 위해 엄청난 강도의 노동, 스트레스, 투자자들의 갑질을 기꺼이 감당하며 이 일을 계속하는 핵심 이유는 생각보다 산뜻했다. 재미있으니까. 이 일이 좋으니까. 순수한 즐거움이 책 너머로 전해졌다. 문득 나는 나를 돌이켜보았다. 나는 어땠더라. 이 일이 재미있나? 이 일을 좋아하나? 왠지 코가 간질거렸다. ‘정치’를 ‘좋아한다’니. ‘고통’ ‘인내’ ‘극복’ 같은 단어라면 몰라도 ‘좋아한다’는 단어가 영 어색했다. 그런데 생각의 질주를 멈출 수 없었다. 저자가 묘사한 즐거움의 감정을 나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뻐근하게 벅차오르는 마음, 시큰한 감동. 결코 잊을 수 없는 미소. 그건 어떤 순간이었지?

놀랍게도 내 안에는 답이 있었다. 그것은 사람들의 생각이 변화하는 순간이었다. 서로 적대하던 사람들이 그래도 함께 살아가는 방법을 찾아보기로 결심하고, 개인의 불운이나 능력 부족을 탓하던 사람들이 사회적 차별에 맞서 싸우기를 결의하며, 원래 세상이 다 그렇다고 체념하던 사람들이 일말의 변화 가능성을 만드는 일에 진심으로 동참하는 순간들이 내겐 최고의 순간이었고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기쁨이었다. 와, 그렇구나. 나는 당혹스럽게 깨달았다. 나 정치 좋아하네. 좋아서 하는 거네.

책 속에 길이 있다고 했나. 이 책이 의도한 길은 아닌 것 같지만 어쨌든 나는 책 속에서 또 한번 내 길을 찾았다. 진보 정치를 계속하는 이유를 찾기 위해 당위의 숲을 헤매고 있었지만 답은 엉뚱한 곳에 있었다. 즐거움 말이다. 지금의 진보 정치 앞에 놓인 길이 아무리 고통과 인내로 수놓인 길이라 해도, 내가 이 길을 가는 이유는 결국 좋아서다. 인간의 변화 가능성을 믿는 즐거움을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태평양을 가로지르는 1만미터 상공에서 깨닫고 말았다. 나는 좋아서 정치를 하는 사람이다.

장혜영 전 국회의원

권영국 민주노동당 대통령 후보(가운데)가 지난 5월15일 서울 종로구 서울향린교회에서 열린 ‘2030 탈핵 탈석탄 탈송전탑 희망 기후도보순례단 대선 공약 요구서 전달식’에서 발언하고 있다. 정용일 선임기자 [email protected]

설명하지 않고 설득하는 법 l 오렌 클라프 지음, 박준형 옮김, 빌리버튼(2025)

장혜영 전 국회의원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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