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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소연의 빌런들]
뮤지컬 '위키드'의 엘파바

편집자주

현실에선 피해야 할 상대지만 무대 위의 빌런은 작품의 밀도를 높이는 중요한 축입니다. 공연 담당 김소연 기자가 매력적인 무대 위 대항자들을 새롭게 조명합니다.
뮤지컬 '위키드' 중 엘파바(오른쪽)와 글린다가 우정을 이야기하는 '널 만났기에'를 노래하고 있다. 에스앤코 제공 ⓒJeff-Busby


'굿 뉴스 / 그녀가 죽었다 / 초록 마녀가 죽었다.'

10여 명의 앙상블이 리본을 흔들며 "그 사악하고 추악한 마녀가 / 오즈 모두의 적, 그 마녀가 / 죽었다 / 굿 뉴스"라고 노래한다. 마녀는 죽었고, 아무도 애도하지 않는다('No One Mourns the Wicked').

전통적 권선징악 구조에 익숙한 관객에게는 이야기의 끝으로 여겨질 악당의 죽음. 공공의 적이 사라지는 순간 모두 안도하며 행복해하는 모습은 전형적인 동화의 결말처럼 보인다. 그러나 뮤지컬 '위키드'는 그 결말을 이야기의 시작으로 삼으며 새로운 질문을 던진다. 초록 마녀의 죽음은 정말 누구에게나 '굿 뉴스'일까.

12일 블루스퀘어에서 개막하는 뮤지컬 '위키드'는 '사악한 마녀'라고 쉽게 단정했던 인물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한다. 단 한 줄의 설명 없이 악의 아이콘이 된 초록 마녀에게 서사를 돌려준다.

혐오와 배제 사회 반영한 우화

아름다운 에메랄드 시티에 도착한 엘파바와 글린다가 들뜬 마음을 '단 하루'라는 넘버로 표현하고 있다. 에스앤코 제공 ⓒJeff-Busby


'위키드'는 라이먼 프랭크 바움의 고전 동화 '오즈의 마법사'(1900)를 비튼 그레고리 맥과이어의 동명 소설(1995)이 원작. 도로시가 오즈에 떨어지기 전 시점의 이야기로 '오즈의 마법사' 속 조연인 나쁜(Wicked) 서쪽 마녀와 친절한 남쪽 마녀 글린다가 주인공이다. '위키드'에서 주어진 서쪽 마녀의 이름은 엘파바. 라이먼 프랭크 바움의 머리글자(L, F, Ba) 소리를 본떠 만들었다.

'위키드'의 출발점은 오즈라는 세계의 서쪽 마녀가 사실은 사악하지 않고 남들과 다른 피부색 때문에 배척당했다는 발상이다. 알고 보면 엘파바는 정의로운 이상주의자다. 초록 피부와 서툰 매너 때문에 오해를 사지만 마법적 재능이 뛰어나고 약자를 지키려다 체제와 충돌한다. 글린다는 외모와 인기 모두를 가진 인물이지만 권력에 민감한 야심가다. 상극인 둘은 친구가 되지만 세상은 한 명을 '선한(Good)' 마녀로, 다른 한 명은 '사악한' 마녀로 바라본다. '위키드'는 두 캐릭터를 함께 조명함으로써 사회가 규정한 선과 악의 경계가 어디에서 비롯되는지, 빌런이라는 낙인이 어떻게 형성되는지 질문을 던진다. 악은 때로 주관적이며, 때로는 강요당한다.

나쁜 인물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뮤지컬 '위키드'의 모리블 학장은 유쾌함과 섬뜩함을 오가는 캐릭터다. 에스앤코 제공 ⓒJustin Griffiths.


원작자 맥과이어는 이 소설을 통해 사람들이 어떻게 악당을 만들어내는지를 탐구하고 싶었다고 한다. 그는 집필 동기를 묻는 한 인터뷰 질문에 히틀러를 언급하며 "악의 본질, 그리고 악은 길러질 수 있는가에 관심을 갖게 됐다"고 답했다. 걸프전이 발발한 1990년대 초 영국 런던에 거주했던 맥과이어는 '사담 후세인: 새로운 히틀러?'라는 뉴스 헤드라인을 접하고 한때 히틀러에 대한 소설을 쓰는 것을 고민했다.

그리고 떠올린 것인 "미국인의 집단적 잠재의식 속에서 두 번째로 사악한 인물, 나쁜 서쪽 마녀"였다. 맥과이어는 "미국에서는 누구나 '나쁜 서쪽 마녀'가 누구인지 알지만 그에 대해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며 "그 안에는 더 많은 이야기가 있다"고 말했다. 맥과이어는 엘파바를 진실하고 정의로운 인물로 그리고, 그가 사회 질서에 반기를 들면서 악의 대명사가 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엘파바가 뮤지컬 '위키드'의 대표곡 '중력을 벗어나'를 열창하고 있다. 에스앤코 제공 ⓒJeff-Busby


뮤지컬은 단순히 엘파바의 억울한 사정을 파헤치는 데 그치지 않는다. '위키드'의 진짜 빌런은 따로 있다. 에메랄드 시티에 사는 최고 권력자인 마법사와 모리블 학장을 통해 권력에 대한 풍자를 담는다. 남들과 달라 핍박을 받는 것은 엘파바만이 아니다. 오즈는 말을 하는 동물이 하나의 인종처럼 인간과 공존하는 세상. 쉬즈대학교의 유일한 동물 교수인 염소 딜라몬드는 정책 변화로 동물 교수의 강의가 금지되면서 경찰에 연행된다. 이에 엘파바는 '위키드'의 작곡·작사가 스티븐 슈왈츠의 명곡 '중력을 벗어나(Defying Gravity)'를 통해 사회적 기대와 편견에 맞서리라 다짐한다.

마법사와 마담 모리블은 현대의 정치 권력을 연상시킨다. 마법사는 거대한 기계 장치 뒤에 숨어 시민을 속여 온 부패한 이미지 정치인이다. 모리블 학장은 사기꾼에 불과한 마법사의 실체를 알게 된 엘파바를 적으로 규정하고 대중을 현혹하는 데 앞장선다. 두 인물은 엘파바를 악당으로 만들고, 사회 질서 유지를 명분으로 진실을 덮는다. 권력자들은 어떻게 이미지를 조작하고 소문을 진실처럼 만들며, 개인을 악당으로 몰아가는가. 두 여성의 우정과 성장 서사 뒤에 권력이 진실을 뒤틀어 빌런을 만드는 또 한 축의 이야기가 자리하고 있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 소외된 이들을 희생양 삼고, 대중의 두려움을 교묘히 조작하는 권력의 모습은 오늘날 현실 정치에서도 낯설지 않다.

현시대 저격하는 역주행 명작

뮤지컬 '위키드' 한국 공연의 엘파바를 맡은 셰리든 애덤스(왼쪽)와 글린다를 연기할 코트니 몬스마. 에스앤코 제공


이번 '위키드'는 셰리든 애덤스(엘파바), 코트니 몬스마(글린다)가 주역을 맡아 10월 26일까지 공연된다. 2023년 시작된 미국 뉴욕 브로드웨이 초연 20주년 기념 월드 투어의 일환이다. 영어 프로덕션이 한국 무대에 오르는 것은 2012년 한국 초연 이후 13년 만이다.

'위키드'는 오는 10월이면 브로드웨이 개막 22주년을 맞는다. 많은 공연이 시간 앞에 빛을 잃는 것과 달리 '위키드'의 소수자와 진실 왜곡이라는 주제는 오히려 오늘의 관객에게 더 정확히 도달한다. 지난해 개봉한 영화 '위키드'가 역대 브로드웨이 뮤지컬 원작 영화 중 '맘마미아!' 다음으로 최고 흥행 수익을 기록한 데 이어 오는 11월에는 파트2 '위키드: 포 굿'이 그 관심을 잇는다.

특히 '위키드'는 오늘날 문화계에서 활발한 '빌런 재해석' 흐름의 선구자적 작품이다. 영화 '말레피센트'(2014)는 '잠자는 숲속의 공주'의 마녀 말레피센트가 주인공이다. 왜 요정인 말레피센트가 악녀가 돼 주인공을 괴롭히게 됐는지를 설명한다. 무어스 숲의 강력한 마법사이자 통치자인 말레피센트는 인간과의 갈등 속에서 숲과 요정들을 지키기 위해 노력한다. 영화 '크루엘라'는 디즈니 애니메이션 '101마리 달마시안'의 악역 크루엘라 드 빌을 재해석해 주인공으로 내세웠다. 1970년대 런던을 배경으로 크루엘라의 어린 시절과 패션 디자이너로서의 성장 과정을 그린다. 이들 작품은 모두 '악'이라는 이름 뒤에 가려진 사연과 구조를 되짚는다.

'오즈의 마법사'는 마녀가 죽음으로써 결말을 맞지만 '위키드'는 그 순간 이야기가 시작된다. 단정적 낙인, 반복 주입된 악의 이미지, 믿고 싶은 소문 속에서 우리는 과연 진실을 보고 있는가. 진실을 숨기기 위해 누군가에게 악의 이름을 붙이고 있지는 않은가. 엘파바는 판타지 속에만 존재하는 게 아니다. 우리는 지금도 또 다른 엘파바를 만들어내고 있는지도 모른다.

영화 '위키드' 속 마담 모리블(양자경·왼쪽부터)과 엘파바(신시아 에리보), 글린다(아리아나 그란데). 유니버설픽쳐스 제공


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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