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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명 정부 구상과 부합…‘정규직 중심주의’ 비판도
정보통신(IT)업체인 트웬티온스 직원들이 지난 7월 8일 오후 5시 40분경 퇴근하고 있다. 이 회사는 평일 근무시간을 1시간 줄이는 방식으로 주 4.5일제를 시행하고 있다. 이재덕 기자


지난 7월 8일 경기 화성 동탄첨단산업지구 내 정보통신(IT)업체인 트웬티온스 사무실. 직원들이 모니터 여러개를 놓고 코딩·디자인 작업을 하거나, 가상현실(VR) 헤드셋을 쓴 채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며 메타버스 공간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 오후 5시 20분이 되자 직원들은 헤드셋을 벗고 모니터를 끄는 등 퇴근 준비를 시작했다. 트웬티온스는 6월 2일부터 퇴근시간을 6시 30분에서 5시 30분으로 1시간 당겼다. 평일 오전 9시 30분부터 오후 5시 30분까지 하루 7시간(휴게시간 1시간 제외), 주 35시간을 일한다.

개발자 출신인 이용석 공동대표(36)는 “퇴근시간쯤 되면 다들 집중력이 떨어지게 마련인데, 근무시간을 1시간 당기면 그런 불필요한 시간을 줄일 수 있다고 생각했다. 개인적으로도 세 살, 다섯 살인 두 아이와 저녁식사를 함께할 수 있어 만족도가 높다”고 말했다. 경영전략팀의 김우림 대리(29)는 “이전에는 6시 30분에 퇴근해서 집에 가면 밥하고 저녁 먹고 설거지만 해도 밤 10시쯤 되니까 자기 바빴다. 가족과 함께 보내려고 돈을 버는 건데 이게 맞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며 “지금은 남편과 산책도 하면서 저녁시간이 여유로워졌다. 직장 일과 가정생활에 균형도 잡히고 그러면서 업무 집중도는 더 높아진 것 같다”고 말했다.

줄어든 시간만큼 일도 줄었을까. 트웬티온스는 생성형 AI(인공지능) 등을 업무에 활용하면서 단순하고 반복적인 업무, 코딩 작업 등에 들어가는 시간을 크게 줄였다고 설명했다. 김 대리는 “예전에는 문서 작성에 많은 시간을 들였는데, 지금은 챗GPT에 어느 정도 맥락만 설명해주고 문서를 대신 작성하게끔 한다. 그만큼 다른 업무를 볼 수 있게 됐다”고 했다.

김동연 경기도지사가 지난 6월 19일 수원 라마다프라자호텔에서 열린 경기도 4.5일제 시범사업 참여 기업과의 타운홀 미팅에서 단체 사진을 찍고 있다. 경기도청 제공


줄어든 임금은 지자체가 지원

트웬티온스는 경기도가 6월부터 시작한 ‘4.5일제 시범 사업’에 참여하는 업체다. 경기도는 도내 상시근로자 5인 이상, 300인 미만 중소기업들이 ‘주 35시간제’, ‘격주 주 4일제’, ‘주 4.5일제’ 중 하나를 선택하는 방식으로 주 35~36시간 근무 체계를 도입하면 노동시간 단축분만큼 임금 일부를 보전해주기로 했다. 법정근로시간인 주 40시간 중 5시간을 줄이면 노동자 1인당 월 26만원을 지원하고, 4시간을 줄이면 월 21만원을 지급한다. 이른바 ‘임금 삭감 없는 4.5일제’다. 시범 사업 기간은 총 3년으로, 참여 업체마다 노무사가 배정돼 4.5일제 적용을 돕는다. 시범 사업 중에 업체가 주 4.5일제의 가능성을 확인하고 노사가 이를 상시화하기로 합의하면 노동자들의 근로계약서에도 주 35~36시간 근무를 명시하기로 했다.

트웬티온스 같은 IT 업체뿐 아니라 서비스업, 제조업, 언론사 등 민간기업 67곳과 공공기관인 경기콘텐츠진흥원 등 총 68곳이 경기도의 4.5일제에 참여한다. 참여 기업인 레드원코리아는 경기 김포에서 LED 조명기구를 생산하고 직접 조명 설치 공사까지 벌이는 업체다. 레드원코리아는 둘째 주, 넷째 주 금요일마다 쉬는 ‘격주 주 4일제’를 택했다. 이 업체의 오은주 과장은 “지금은 비수기라 격주로 주 4일제를 해도 문제가 없지만, 당장 다음 주부터 공사가 잡혀 있다”며 “건설업체들은 요일에 상관없이 일하기 때문에 이에 맞추려면 우리도 연장근로가 불가피하다”고 말했다.

주 35시간을 일해도 연장근로를 법이 허용하는 최대치인 주 12시간씩 하게 되면, 총 근로시간은 주 47시간이 된다. 이 경우 4.5일제 취지가 무색해진다. 이 문제를 어떻게 풀었을까. 오 과장은 “연장근로 기간은 미리 경기도에 신고해야 하고, 연장근로시간도 이전 수준을 넘어서는 안 된다”며 “우리 회사의 경우, (예전 연장근로시간의 평균이 주 10시간이므로) 설치 공사가 많은 성수기 근로시간이 주 45시간(주 35시간+연장근로 주 10시간)을 넘겨서는 안 된다. 이걸 잘 맞춰야 경기도 4.5일제에 계속 참여할 수 있다”고 말했다.

한국노총, 전국여성노동조합, 청년유니온, 민주노총 산하 사무금융노조와 보건의료노조 등이 참여한 ‘주 4일제 네트워크’가 지난 4월 29일 서울 여의도 국회 정문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주 4일제 도입과 노동시간 단축 요구안을 발표하고 있다. / 문재원 기자


주 4.5일제는 그동안 대기업 중심으로 자율적으로 시도해왔는데, 광역자치단체 차원에서 지역 기업을 상대로 주 4.5일을 지원하는 건 경기도가 처음이다. 특히 주 4.5일제 전환에 부담을 느끼는 중소기업을 지원하는 방식은 “(법 제정 없이) 가능한 부분부터 점진적으로 주 4.5일제를 해나가야 할 것 같다”고 한 이재명 대통령의 4.5일제 구상과 부합하는 면이 있다. 김동연 경기지사도 지난 6월 19일 ‘경기도 4.5일제 시범사업’ 참여 기업과의 타운홀 미팅에서 “이재명 정부와 함께 (4.5일제의 정착을 위해) 의논하고 협의하면서 전국으로 확산하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법 개정 없이 임금 삭감 없는 주 4.5일제를 확대하려면 중앙정부나 지자체의 재정을 상당 부분 투입해야 한다. 노동시간 단축으로 추가 고용이 불가피한 업종에는 더 많은 돈이 들어갈 수밖에 없다.

정치권 논의에서 빠져 있는 문제들

다만 현재 경기도나 중앙정부, 정치권에서 논의되는 ‘주 4.5일제’는 ‘노동권’보다는 ‘워라밸(일과 삶 균형)’에 초점이 맞춰져 있고, ‘정규직 중심주의’라는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근로기준법의 법정근로시간(주 40시간)과 연장근로시간(주 12시간) 적용에서 제외되는 5인 미만 사업장, 농축산업 노동자, 플랫폼·특수고용직 노동자들이 늘어나는 상황에서 일부 대기업과 공공기관, 사무직 등 근무시간 단축이 상대적으로 용이한 일자리를 대상으로 한 4.5일제는 노동자 간 격차를 키울 수밖에 없다. 예컨대 지난해 5월 과로사로 사망한 쿠팡 택배노동자 고 정슬기씨의 경우, 오후 8시 30분 출근해 다음 날 오전 6시 30분~7시까지 근무했지만, 특수고용직 노동자라 주 52시간 적용을 받지 않았다.

황세원 일in연구소 대표는 “일부 기업들이 주 4.5일제를 시작하면 이런 분위기가 확산할 것이라고 얘기하는데 과연 그런가”라며 “정규직 노동자들의 근로시간이 줄면서 생산성이 떨어지는 것을 보완하기 위해 기업들이 온갖 일을 외주화하고,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더 많은 일을 하게 되는 현상을 이미 수없이 목격하지 않았나”라고 말했다. 그는 “근로기준법의 예외인 노동자들이 많고 근로기준법을 지키지 않는 기업들이 얼마나 많은가. 이런 문제를 해소하지 않는 한 4.5일제는 노동자 간 양극화만 심화시킨다. 법과 제도를 고쳐 풀어야 할 문제는 쑥 빠지고 정치권에서 노동과 관련해 나오는 의제라는 게 ‘주 4.5일제’라는 건 좀 황당한 얘기”라고 말했다.

노동문제연구소 ‘해방’의 오민규 연구실장도 “현재 주 4.5일제 관련 논의의 프레임을 완전히 뒤집어야 한다”고 말했다. 오 실장은 “모든 노동자에게 예외 없이 적용되는 주 4.5일제를 실현해가려면 지금 당장 뭐가 필요하고 뭘 해야 하는지 등을 논의해야 한다. 공공부문이나 대기업, 사무직 등 가능한 쪽부터 먼저 줄이는 것보다, 5인 미만 사업장의 노동자나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잃어버린 노동기본권을 회복시켜주고 이들의 노동시간을 단축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는 게 우선”이라고 지적했다.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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