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튜버 ‘리버튜브’를 비롯한 보수 성향 시민들이 11일 서울 영등포구 대림역 인근에서 중국 출신 이주민 추방, 윤석열 대통령 복권 등을 요구하며 집회를 벌이고 있다. 정인선 기자 [email protected]
“우리가 무슨 힘이 있습니까, 그저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생각만 들죠.”
중국동포 밀집 지역인 서울 영등포구 대림동에 사는 이아무개(62)씨는 11일 최근 극우 세력이 “중국인 추방”, “조선족 몰아내자” 같은 구호를 외치며 거리로 쏟아져 나오는 걸 보고 “무력감이 든다”고 말했다. “중국에서 한국으로 건너와 건설 현장 일을 한 지가 벌써 20년”이라는 이씨는 “많은 한국인이 미국 같은 나라에서 온 이들은 우러러보면서, 저희 같은 사람들에겐 ‘가난한 나라에서 왔다’는 이유로 여전히 험한 말을 한다”고 했다.
이날 대림동에선 보수 성향 유튜버 ‘리버튜브’를 비롯한 극우 단체 관계자들이 중국 출신 이주민 추방과 윤석열 대통령 복권 등을 요구하는 집회를 벌였다. “온리 윤”(Only Yoon), “윤 어게인”(Yoon Again) 같은 문구가 적힌 붉은 머리띠와 모자 등을 착용한 30여명은 저녁 7시30분께 지하철 대림역 11번 출구 인근에 집결해 대형 태극기와 성조기를 흔들었다. 이들은 “윤 어게인”, “시진핑 아웃”, “부정선거 척결” 등 구호를 외치며 보라매역까지 행진했다. 일부 참가자는 노골적인 혐중 발언을 쏟아내기도 했다.
집회를 주최한 ‘리버튜브’는 지난 8일 자신의 사회관계망서비스에 올린 예고 게시물에서 “화교 커뮤니티는 기득권 그 자체”라며 “화교들의 본진에서 “윤 어게인”을 외치는 대담함을 보여주면 그들이 훗날 반국가행위를 (못 하도록 하는) 강력한 경고가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앞서 지난 4월에도 서울의 또 다른 중국 출신 이주민 밀집 지역인 광진구 자양동 ‘양꼬치 거리’ 인근에서도 극우 단체 ‘자유대학’ 회원들이 “윤 어게인”을 외치며 집회와 행진을 벌였다.
경계인의몫소리연구소, 플랫폼씨, 중국동포한마음연합회, 민주노동당 등 인권·시민사회단체·정당 관계자들이 11일 서울 영등포구 대림역 인근에서 ‘민주주의 파괴하고 혐오 선동 일삼는 극우세력 물러가라’ 긴급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민주노동당 제공
하지만 중국 동포 및 이주민을 향한 혐오의 날 선 외침만 대림동에 울려퍼진 건 아니었다. 이에 맞서 공존과 연대의 목소리를 내려는 사람들이 거리를 가득 메웠기 때문이다. 극우 세력이 대림동에 들이닥친다는 소식을 듣고 차별금지법제정연대, 경계인의몫소리연구소, 플랫폼씨(C), 중국동포한마음연합회총회, 민주노동당 등 인권·시민사회단체·정당 70여 곳이 연 긴급 기자회견에는 ‘윤 어게인’ 시위 참가 인원을 훌쩍 뛰어 넘는 200여명이 “중국계 이주민은 우리의 친구”, “혐오·차별 아웃!” 등 손팻말을 들고 모여들었다. 일부 참가자는 “차별에 반대한다. 이곳은 공존과 환대의 대림동”이라는 문구를 중국어로 옮겨 적은 손팻말을 들고 나왔다. 대림역 인근에는 “차별금지법 제정으로 이주민 혐오표현 막아내자” 같은 문구가 적힌 현수막도 여럿 내걸렸다.
김세광 중국동포한마음연합회총회 회장(왼쪽 세번째)이 11일 서울 영등포구 대림역 인근에서 열린 ‘민주주의 파괴하고 혐오 선동 일삼는 극우세력 물러가라’ 긴급 기자회견에서 발언하고 있다. 민주노동당 제공
기자회견에 참가한 중국 동포 및 이주민들은 자신들을 향한 혐오 선동이 12.3 비상계엄 이후 노골화된 데 큰 우려를 표했다. 박동찬 경계인의몫소리연구소 대표는 “지난 4월 광진구 ‘양꼬치 거리’에서 극우 세력이 입에 담지 못할 욕설을 하며 난동을 부릴 때부터 ‘혐오 사슬’을 제대로 끊어내지 않으면 대림동에서 똑같은 일이 재현될 것이라는 우려가 중국 동포들 사이에서 있었는데 결국 오늘 같은 참담한 상황을 마주하게 됐다”고 말했다. 김세광 중국동포한마음연합회총회 회장은 “우리는 아무런 근거도 없이 누군가의 분노를 대신 쏟아낼 대상이 아닌 이 땅에서 일하고 똑같이 세금 내고 자식 키우며 살아가는 평범한 이웃”이라고 말했다.
우다야 라이 이주노조위원장도 “이주민 동포들에게 한국은 고향과도 같지만, 이주노동자들은 ‘일자리를 빼앗는 존재’, ‘잠재적 범죄자’ 등으로 여겨지며 공격받고 있다”며 “극우 세력이 이주민 밀집 지역에서 ‘여기서 떠나라’고 외치며 혐오를 부추기는 것은 분명한 반인종적 행위로, 우리 사회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혐오에 맞선 싸움에 힘을 보태려는 일반시민의 목소리도 이어졌다. “구로·영등포 지역 학교에 발령받아 쭉 이곳에서 학생들을 만나고 있는 교사”라고 밝힌 한채민씨는 “최근 중국에서 온 지 얼마 되지 않은 한 학생이 ‘한국어를 잘 못 하면 차별받나요’라고 물었는데 제대로 답하지 못했다. 다른 학생들에게 조언을 구하자 한 학생이 ‘너와 친구가 될 많은 사람 중 한 명이 바로 나’라고 답했다”면서 “차별을 묻는 말에 우정으로 답한 학생들에게서 연대하는 법을 배웠다. 극우 시위대에 경고한다. 끝까지 남는 건 혐오에 맞선 이들의 연대와 우정임을 몸소 배우고 돌아가라”고 말했다.
서울 영등포구 대림역 인근에 11일 차별금지법 제정을 촉구하는 현수막이 걸려 있다. 정인선 기자 [email protected]
극우 세력의 혐오 선동을 방지할 제도적 대안 마련이 시급하다는 요구도 나왔다. 지오 차별금지법제정연대 공동집행위원장은 “혐오를 양산하는 무리로 인해 당장 내일 아침 가게 문을 열기 두려워지는 (이주민 밀집) 지역 주민들에게는 차별과 혐오를 마주해야 하는 하루하루가 먹고사는 일의 위기”라며 “이재명 대통령이 강조하는 ‘민생’을 위해서라도 차별금지법 제정이 시급하다”고 말했다.